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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한국 남성 보고서
아이라인 그리는 아들 혼내던 아버지 화장품 몰래 훔쳐 쓰다 걸렸다는데…
2000명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멋진 남자란?"
남자, 옷장이 달라졌다… 주는 대로 입는 건 옛말
티셔츠 한 장도 취향대로 "옷 잘 입는다는 말 좋아"
性 구분 사라진 패션… 여성용 옷 입는 지드래곤,
패셔니스타로 통해 미소년 아이돌도 인기
초식남? 미식남? 개인주의 성향 강해지며
전통적 가치관도 무너져 "결혼 대신 연애나 실컷"
직장인 정구현(28)씨는 대학 시절 동기들 사이에서 '파격남(男)'으로 통했다. 좋은 뜻은 아니었다. 스무 살 이 남자는 동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과방에서 자주 아이라인을 그렸다. 손바닥만 한 파우치에 기초화장품과 BB크림, 기름종이와 아이라이너, 선크림을 늘 챙겨 다녔다. 화장하는 모습을 쳐다보는 남자 동기에게 "너도 그려줄까?" 물으면 다들 기겁했다. "저 혈기왕성한 '상남자'입니다. 아이라인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성(性) 정체성이 남다른 것 아니냐' 자주 오해받았지요." 그는 스타일 빼어나기로 유명한 또래 아이돌 그룹 빅뱅 멤버 지드래곤을 선망한다.
‘남자다움’이란 대체 뭘까. 시대마다 선호되는 남성상(像)이 있다. 1990년대 ‘터프한 남자’의 상징이었던 최민수(왼쪽)가 야수 같았다면, 2010년대 ‘선망의 대상’으로 꼽히는 지드래곤(오른쪽)은 공작 같다. 맹수의 이빨이 빠지고, 화려한 날개털을 단 셈이다.
/GettyImage 이매진스
아버지 정지현(55)씨는 1990년대 '터프가이'의 대명사 최민수를 '최고의 남자'로 꼽는 사람이다. 화장하는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건 당연했다. 거실 소파에서 아이라인 그리는 아들을 보면 걸쭉한 육두문자를 날렸다. 아버지가 "사내새끼가 남자답지 못하게 왜 화장하고 다니느냐"고 나무라면 아들은 "아버지도 아이라인 한번 그려보시라"며 도발했다. 성난 사자처럼 달려든 아버지가 화장품을 쓰레기통에 쏟아붓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화장품을 둘러싼 부자(父子)의 냉전 기류가 전환을 맞은 건 작년 봄이다. 아들은 어느 날부터 자신의 남성용 에어쿠션 파우더가 조금씩 줄어드는 걸 느꼈다. 집 안에 '수컷'이라곤 아버지와 아들, 중성화 수술 막 마친 푸들 한 마리가 전부였다. "아버지 제 화장품 쓰세요?" 의구심에 물었다가 "정신 나간 소리 한다"며 핀잔 듣기를 여러 번. 어느 날 에어쿠션 테두리에 덕지덕지 화장품이 묻은 걸 발견하고 아버지를 범인으로 특정한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사건 현장을 급습했다. 현행범으로 붙잡힌 아버지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버지는 화장품 찍어 바르는 패드 뒷면에 오른손 중지와 검지를 살포시 끼운 채로 서 있었다. 한참을 웃던 아들이 물었다. "남자가 왜 화장을 하세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바이어 만날 때 한번 찍어 발라보니 '때깔'이 달라 보이기에…." 아버지는 그날 리필용 에어쿠션 파우더값 1만1000원을 그의 계좌로 보냈다. 통장에 찍힌 메모는 '화장품값'이었다.
◆ 고3 손자도, 30代 삼촌도, 은퇴한 할아버지도… "BB크림·파우더 써봤죠"
한국 남자가 달라졌다. 겉과 속 모두 바뀌었다. 패션·미용 등 겉모습 가꾸는 데 적극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배격한다. 'friday' 섹션이 지난 7일 SK플래닛 설문 플랫폼 '틸리언'에 의뢰해 10~70대 남성 2008명에게 '2017 대한민국의 남성상(像)'을 물은 결과, 외모·패션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꾸는 사람이 '멋진 남자'의 핵심 잣대가 됐다.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 남성은 더 감각적이고, 세련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프로듀스 101'로 대변되는 소녀 같은 10대 청소년부터 외모를 가꾸는 70대 '신(新) 장년'에 이르기까지 전환적인 변화를 맞은 대한민국 남성들의 실상을 friday가 들여다봤다.
길거리 패션을 찍으며 시각사회학을 연구하는 마이클 허트 전 홍익대 교수가 포착한 한국 남성. 성별은 남성이지만, 패션은 여성스럽다.인스타그램 캡처
10대도, 70대도 '패션 센스男'이 멋진 남자
"1년에 두세 번 갈까 말까 하던 백화점을 요즘은 매주 가네요. 짤막하니 발목 드러난 바지도 입고요. 옛날엔 가당키나 했겠어요. 사내가 외모 신경 쓰면 할머니들이 '고추 떨어진다'고 했는데. 허허."
퇴직 공무원인 일흔의 정해승씨는 은퇴 후 '옷장'이 달라졌다. 젊은 날엔 남우세스러워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다. 옷은 아내가 주는 대로 입었다. "그저 돈 잘 버는 가장이면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엔 '젊어 보인다'는 말보다 '센스 있다'는 말 들으면 기분이 제일 좋아요." 손녀가 깔아준 사진 촬영 앱으로 셀피(selfie)도 자주 찍는다.
시대상이 변하면서 남성상도 변했다. 일러스트는 외모·패션 등 겉모습이 여성적으로 변해가는 대한민국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왼쪽이 과거, 오른쪽이 현재다. 일러스트=김병철
고등학교 3학년 정세준(18·가명)군은 '근육 집착남'이다. 지난 여름방학 땐 보충수업을 1교시만 하고 독서실 아닌 헬스장으로 달려갔다. 옷 태 예쁘게 하려고 가슴, 팔, 어깨 근육 키우는 데 집중하고 하체 운동은 안 한단다. "공부 잘하는 애가 여자친구도 있고, 옷도 잘 입어요. 외모도 경쟁력. 몸매, 헤어스타일이 성적만큼 중요해요."
"예쁜 옷 입은 날, 머리 왁스 손질 잘된 날 일이 더 잘되는 느낌이에요. 옷 칭찬, 외모 칭찬 한마디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일할 수 있거든요. 자신감, 자존감 올라가니까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외모도 잘 꾸미면 좋지요." 눈썹 문신, 모발 이식을 한 최진용(31·가명)씨는 일반 선크림과 메이크업베이스 겸용 선크림을 번갈아 바른다.
2017년, 대한민국 남성들은 세대 불문 외모 꾸미기에 한창이다. 남자들이 '패션의 피읖'도 못 꺼내고, 아내나 엄마에게 쇼핑을 일임했던 지난날은 아득하다. 티셔츠 한 장을 사도 자기 취향 따져 꼼꼼히 산다.
설문에서도 이런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멋진 남자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복수 응답)에 '성품'(43.8%) '가치관'(32.5%)과 함께 '외모·패션'(22.7%)이 핵심 기준으로 꼽혔다. 성격도 좋아야 하지만, 잘 입고 잘 꾸며야 멋진 남자란 얘기다. '잘 꾸미는 남자'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잘 꾸미는 남자'에 대해 '멋있다'(37.2%)거나 '따라 해보고 싶다'(30.1%)는 반응이 절반을 훌쩍 넘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반응은 7.1%밖에 안 됐다. 70대 이상 남성 10명 중 3명 꼴로 'BB크림·파우더 등 미용용 화장품을 사용해본적이 있다'고 답했다.
1986년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에 출연한 22살 최재성(왼쪽). 반항아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별명은 ‘한국의 제임스 딘’이었다. 아이돌 그룹 ‘샤이니’ 멤버 태민(오른쪽)은 데뷔 초부터 미소년 같은 풋풋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인터넷 캡처·GettyImage 이매진스
초식화된 한국 남자?
2006년 일본의 여성 칼럼니스트 후카사와 마키는 '초식계 남자(草食系男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가부장적인 기존 남성과 대비되는 새로운 남성상으로 '초식계 남자'가 뜨고 있다"며 "이들은 연애·결혼·성(性)에 무관심하고, 취미 생활·자기 계발에 열중하며 패션·미용 등 외모를 가꾸는 데 주력하는 남자"라고 적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2009년 "쇠락하는 일본 경제가 일본 남성을 '초식남'으로 변모시켰다"고 진단했다. 일본처럼 장기 불황 국면에 접어든 한국에서도 남성의 초식화(草食化) 논쟁이 뜨겁다.
대한민국 남성에게 두드러지는 변화도 '여성화'와 '개인주의화'다. 엠넷 '프로듀스 101 시즌2'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미소년 아이돌'의 탄생기였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3개월간 CPI(콘텐츠 영향력 지수)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큰 인기였다.
성(性) 구분이 없는 패션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끈 연예인은 지드래곤이다. 지난달 럭셔리 브랜드 샤넬의 '가브리엘 백' 광고 모델로 나선 지드래곤은 여성용 트위드 재킷과 핸드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멋스럽게 소화했다. 10~20대 사이에서 지드래곤은 '여자처럼 입는 남자'가 아니라 '스타일 좋은 남자'다.
(왼쪽부터) 마동석, 샤이니 키
"근육질 몸매는 남성성의 상징이지만 남자 수강생 중 일부는 헬스장 나서면서 BB크림을 찍어 바르고 나가요." 헬스트레이너 임찬우(28)씨의 얘기다.
'연애·결혼에 대한 가치관'(25.4%), '육아·가사 분담률 변화'(24.9%) 등 결혼관 변화와 가부장적 가치관의 해체는 '최근 10년 사이 한국 남성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복수 응답)로 꼽혔다.
가부장적 문화의 울타리 안에 있던 남성들이 느끼는 변화는 여성들보다 클 수밖에 없다. 여성 내의 세대 차보다 남성 안의 세대 차가 더 큰 이유다. 아찔한 변화의 속도에 적응 못 하는 남자들도 있다. 사업가 박용진(68)씨는 "나약해진 남자들을 보면 이해 안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말하면 '꼰대' 소리 들을까 봐 참는다"고 했다. 적응파도 있다. "100세 시대인데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젊은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이죠. 의학 기술이 100세를 50세로 만들어줄 순 없지만, 외형을 가꾸고 생각을 젊게 해서 '노화'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에요." 변화에 적응 중이라는 박철수(68)씨 얘기다.
'초식남'은 없다는 반론도
'개인주의화' '여성화'된 한국 남성을 단순히 초식남이란 규격 안으로 편입시키기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friday가 만나본 20~30대 남성 대다수는 "평생직장이 사라지는 시대에 빚을 내면서까지 무리하게 결혼할 필요는 없다"면서도 "연애를 적극적으로 할 의향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성욕마저 거세된 것으로 표현되는 초식남은 과하다는 지적이다. '소개팅 앱'을 즐겨 쓴다는 직장인 이성진(29·가명)씨는 "지인에게 이성을 소개받기보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소개팅 앱' '데이팅 앱'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했다. 공시생(公試生) 박기환(28·가명)씨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결혼'을 꿈꾸긴 어렵고, 연애나 실컷 할 계획"이라고 했다.
웹툰 '김치남 스시녀'를 연재한 일본인 블로거 고마쓰 사야카씨는 지난달 인터넷 카페에 "초식남이라는 단어는 인기 없는 여자가 남자에게 가하는 성희롱"이란 글을 올렸다. 그는 "초식남이란 단어가 유행을 타면서 무분별하게 사용되지만, 실제로 초식남이나 '절식남(絶食男·여자에 아예 관심 없는 남자)'은 극히 드물다"며 "여성스럽고 매력 있는 여자 앞에 초식남은 없다. 초식남이 아니라 현명해진 '미식가'가 늘어난 것뿐"이라고 했다. 이 글을 옮긴 기사에서 남성들은 '정곡을 찔렀다'며 댓글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남성의 변화를 '젠더리스(genderless)'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길거리 패션을 찍으며 시각사회학을 연구하는 마이클 허트(45) 전 홍익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수년간 길거리 패션을 연구하면서 한국 젊은 세대가 가진 성 정체성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예전엔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가 있었다면, 최근에는 거기에 저항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서울에서 찍은 사진엔 립스틱을 바르고 여성용 핸드백을 팔에 건 남성이 있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부가 가치 노동 시장에선 전형적인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구분이 무의미해졌다"며 "특히 창의성이 강조되는 분야가 늘어날수록 이런 인간상에 대한 매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고리타분해 보이던 한국 남성들의 '변신'은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도전'이자 '숙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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