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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에게 미쳐 산 30년 … '옥중생활은 성자·부처 같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3월13일 08시11분    조회: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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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중 스님은 자나깨나 염주 두 개를 가지고 다닌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형수 둘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스님은 “힘들 때마다 그들의 영혼을 불러낸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형수의 대부' 박삼중 스님

3·1절 아침이다. 95년 전 조선 땅 곳곳에서 대한독립을 향한 열망이 들끓었다. ‘사형수의 대부’로 불리는 박삼중(80) 스님이 올해 3·1절을 맞는 감회는 각별하다. 스님은 이날 오전 6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간다. 1~5일 북제주군 한경면 ‘먹글이 있는 집’에서 열리는 ‘안중근 의사- 제주와의 만남전’에 참가한다.

 박삼중 스님은 이번 전시에 본인이 소장하던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묵(遺墨) ‘경천(敬天)’과 ‘빈여천인지소오자야(貧與賤人之所惡者也)’ 두 점을 내놓는다. 각각 ‘하늘을 공경하며 살아라’와 ‘가난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란 뜻이다. 둘 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기 전에 일본인에게 써준 글이다.

 스님은 이번에 안 의사 관련 희귀 엽서도 공개한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을 획책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직후의 안 의사 사진이 담겨 있다. 거사 전에 무명지(無名指·넷째손가락)를 잘랐던 안 의사의 절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안 의사의 유묵이 제주에 전시되기는 처음일 겁니다. 경찰 사이드카도 나온다고 들었어요. 물론 제가 아니라 안 의사를 경호하는 것이죠. 하하”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손바닥 도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박삼중 스님. 아래는 스님이 일본인에게서 돌려받은 안 의사의 유묵 ‘경천’이다.
 오는 26일은 안 의사 서거 104년이 되는 날. 특히 올해는 중국 정부가 지난 1월 19일 하얼빈역에 안중근 기념관을 전격적으로 연 데 이어 일본 우익인사들이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리는 등 안 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스님의 마음 한편에는 기대감이, 또 다른 한편에는 착잡함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0년간 안 의사의 중국 내 행적을 찾아다니고, 일본 내 유묵 반환 운동에 적극 나섰던 그이기에 더욱 그렇다. 자칭 ‘안 의사에 미친 중’이라고도 했다.

 -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새로 세워졌습니다.

 “한·중 관계가 좋아졌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안 의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미진한 편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안 의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합니다.”

 - 안 의사의 어떤 부분에 매료되신 건가요.

 “안 의사는 한마디로 성인입니다. 성자 같은 분이죠. 그가 가톨릭 신자여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옥중생활을 놓고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 50여 년간 사형수를 많이 만나봤잖아요. 한 600명쯤 될 겁니다. 감옥에서는 위선과 가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교도관 앞에선 사형수의 모든 게 노출됩니다. 대다수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선 별짓을 다 하죠. 그런데 안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더 위대한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오죽했으면 일본 교도관·검찰관 등이 서로 글을 받으려 했고, 또 자기 후손들에게 유묵을 잘 보관하라고 유언까지 남겼겠습니까. ”

 - 불교로 말하면 어떤 분이실까요.

 “안 의사는 보살(菩薩)을 넘어 부처 같은 분입니다. 속되게 말해서, 다른 스님들의 욕을 들을 수 있어도, 부처님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시대를 살았다면 욱하는 마음에서 이토를 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겁니다. 안 의사는 참사람이었습니다.”

 - 부처에 비유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까요. 안 의사도 결점이 있을 텐데요.

 “부처는 멋쟁이였습니다. 인간 최고의 경지를 보여줬어요. 부처도 말년에 등창으로 고생했습니다. 당시 임종을 앞둔 제자 하나가 부처를 꼭 뵙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어요. 팔순 가까운 부처가 노구를 이끌고 오자 병석의 제자가 ‘삼 배 절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부처가 대답했죠. ‘그냥 누워서 가거라. 그 몸을 세워 세 번 절을 하는 게 무슨 공덕이 되겠느냐. 지금 내 몸도 썩어가고 있다’고요. 안 의사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본 교도관을 오히려 위로하지 않았습니까.”

 박삼중 스님은 안 의사와 첫 인연을 맺었던 30년 전으로 기억을 더듬어갔다. 1984년 일본 불교계의 초청으로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에서 열린 전국교도소포교사대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들른 다이린지(大林寺)에서의 경험을 들려줬다.

 “사찰 대웅전 앞에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란 글귀가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곳 출신 지바 도시치(千葉十七)가 안 의사에게 감동받아 세운 비였습니다. 그전까지 전혀 몰랐던 사실이죠.”

 지바는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공판장을 오갈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 헌병간수였다. “네가 만주 땅에서 고생하는 것도 이토 때문이다”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감명받았고, 안 의사에게 부탁해 ‘위국헌신 군인본분’ 글자를 받았다. 안 의사의 사형집행 명령을 하달하면서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통곡했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지바는 고향에 돌아와 안 의사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 20년 동안 안 의사의 글씨와 영정을 모시고 매일 추모를 했다. 80년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 유묵을 한국의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했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부인과 조카딸이 안 의사의 명복을 계속 빌어왔다.

 - 뤼순 감옥도 여러 번 다녀오셨죠.

 “다이린지 비석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인도 이렇게 추모하는데,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죠. 이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으려고 뤼순을 여섯 번 다녀왔습니다. 한번은 사기꾼들에게 잘못 걸려 죽을 뻔도 했고요.”

 - 고생한 만큼 소득이 있으셨나요.

 “안 의사가 처형된 창고도 가보고, 사형수 묘지도 둘러보았습니다. 암매장을 했기에 유해가 묻힌 곳을 발견할 수 없었죠. 우리도 국가 차원에서 나섰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죠. 나름대로 심증이 가는 곳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고요.”

 - 98년 뤼순 감옥에 추모비를 건립하셨죠.

 “조선족동포와 재일동포 등의 뜻을 모았습니다. 중국 측이 인정한 본격 추모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세계 금융위기로 나라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안 의사의 국난극복 의지를 되새겼지요.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게 많습니다.”

 -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당시만 해도 중국이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높이 1.2m, 폭 80㎝ 크기의 옥돌로 추모비를 만들었는데, 안 의사 이름을 명기할 수 없었어요. 대신 ‘국제항일열사(國際抗日烈士)’라고 새겼습니다. 올해 중국 측도 안 의사를 적극 평가하고 있으니 이 부분을 보완하려고 합니다.”

 -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신가요.

 “당분간 유해는 찾기 어렵겠지만 뤼순 감옥에 안 의사 흉상(胸像)을 세우려고 합니다. 하얼빈 기념관에 흉상이 있지만 우리 손으로 직접 흉상을 만들려고 해요. 제가 살면 얼마나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돈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어요. 중국 당국과 풀어야 할 문제도 있겠지만 올해 중반 시작해 내년 안 의사 순국일에 맞춰 완성할 생각입니다. 돈이 모자라면 제가 갖고 있는 ‘경천’ 유묵이라도 팔려고 합니다.”

 - 안 의사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안 의사는 조선사람에게 글씨를 한 점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형 직전에 썼던 것이라 일본 감옥·검찰·법원 관계자들에게 써줄 수밖에 없었죠. 현재 50여 점이 확인되고 있는데, 일본 박물관에 소장된 것은 어쩔 수 없고, 개인이나 사찰에 있는 유묵이나 유물은 우리 정성에 따라 돌려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제 생명이 살아 있는 동안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이달 15일 일본에 잠시 다녀올 예정입니다.”

 - 요즘 안 의사를 보는 일본인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은데요.

 “그들 입장에선 안 의사가 국사범일 수 있죠. 하지만 안 의사가 이토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더 혹독한 전쟁에 무너졌을 겁니다. 일본 극우인사들은 한번쯤 이토의 죽음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행보를 의심하고 있습니까. 100년 전 이토의 과오를 요즘 일본 정치인들이 답습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아닌 역사 앞에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게 안 의사 동양평화론의 정신이기도 하고요.”

 스님의 건강은 요즘 그다지 좋지 않다. 만성신부전증으로 2012년 말부터 1주일에 사흘(월·수·금요일)을 투석하며 지내고 있다. 매주 목요일 일반 대중과 함께 『금강경(金剛經)』법회를 열고, 나머지 시간에 사형수 방문, 군대·기업 강연 등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군대강연만 100여 차례. 주제는 오직 ‘위국헌신 군인본분’ 하나다. 스님이 머물고 있는 서울 중림동 보덕사 대웅전에는 육군참모총장·제3함대사령관 등 각 군으로부터 받은 표창장·감사패가 가득하다.

 - 군대에 왜 그리 자주 다니시나요.

 “인간 안중근의 위대함을 전하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안중근이 어느 과 의사야’라고 하는 젊은이도 있잖아요. 안 의사를 머나먼 전설처럼 여기는 거죠. 군대에선 불교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가슴에 안 의사를 뜨겁게 살려내고 싶을 뿐입니다.”

 - 그래도 남은 소망이 있으시겠죠.

 “안 의사의 유언이 꼭 이뤄졌으면 해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에 옮겨 장사를 지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눈을 감기 전에 반장하는 날이 오면 저도 안 의사 말처럼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텐데요.”

 보덕사 한쪽 벽에는 구상(1919~2004) 시인의 ‘우음(偶吟·우연히 읊음)’이 걸려 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좌우명 같은 시입니다. 저는 평생 교도소에서 법문을 했어요. 제겐 사형수들이 스승이었죠. 그간 받은 편지만 2만 통이 넘어요. 그런데 교도소만 감옥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자기만의 생각에 묶여 살죠. 안 의사는 그런 감옥에서 자유로웠던 분입니다.”

박정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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