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연변의 “명함장”으로서 전래(传来) 순간부터 그 열이 식을줄 몰랐다. 더구나 요즘 전국 상하가 축구로 분위기가 화끈한 가운데 연변축구는 “동산재기”로“축구고향”으로서의 그 명예를 되찾음이 바람직한것이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다면 중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조선족축구가 어떻게 전파되였을가?
중국조선족 체육력사에서 권위로 일컫는 체육사(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11)에서는 중국조선민족들속에서의 축구의 전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0세기초에 우후죽순마냥 일어선 근대적인 민족학교들에서는 신학사상의 영향하에 봉건적인 서당에 비하여 교육내용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체육도 정식과목으로 과정안에 설치되였다. 이 시기로부터 축구는 조선으로부터 중국 동북에 이주한 지식인들과 일본으로부터 돌아온 류학생들, 그리고 개별적인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여러 학교들에 널리 전파되였으며 점차적으로 축구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되였고 학교지간의 대항경기도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단오절이 오면 학교별로거나 혹은 여러 학교들이 련합으로 축구대회를 여는것이 거의 전통으로 되여있었다...”
“...1910년부터 화룡현 대립자 명동촌의 명동학교와 지신자 창동촌의 창동학교지간에는 매년 봄과 가을이면 축구대항경기가 있었다. 1912년 6월에 몇몇 학교의 발기로 룡정에서 동남으로 5리쯤 떨어진 대교동에서 간도사립학교운동대회가 열렸는데 축구도 하나의 경기종목으로 되여있었다...”
이로부터 알수 있다싶이 중국 조선족들속에서의 축구의 전파에서 지식인, 류학생, 개별적 외국선교사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한것이다. 예로부터 조선민족은 문화를 숭상하고 축구운동에 남다른 애착과 중시를 돌려왔다. 1863년을 근대축구가 발생한 “원년”이라면 중국조선족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대량으로 동북지구에 이주해오게 되였다. 이때 이민들속에 예로부터 전해내려온“만덕공”(락타오줌보에 공기를 넣고 새끼줄을 말아서 넣어 만든 공)을 즐기는 적지 않은 이들도 섞여있었을것이고 이네들이 원시적이나마 축구와 비슷한 “유희”를 조선족들속에 전파했을 가능성도 있었을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일설도 있다.
연변일보 김창혁 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