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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와 잊힌 영웅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4월15일 02시28분    조회: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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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신문]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1910년 경술국치조약으로 일본에 합방된 대한제국은 1945년 8·15 광복을 맞을 때까지 기나긴 암흑기를 보냈다. 일제강점기 36년간의 어두운 역사는 한편으론 끊임없는 항일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 곳곳에서 각자의 지향점과 역할에 맞춰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 중 항일무장 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곳이 간도지방, 즉 현재 중국 동북지방이다. 백명수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상임대표는 일제강점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됐던 항일무장투쟁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광복과 함께 찾아온 남북 분단은 곧 이념의 분쟁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그간 한국은 일제강점기 큰 축을 차지하는 당시 중국 동북지역의 항일무쟁투쟁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정통성을 인정받아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상해임시정부와 크게 비교되는 대목이다. 우리는 잊고 있지만, 그곳에는 우리의 독립과 건국에 큰 힘을 보탠 인물과 역사가 수두룩하다. 반드시 조명해야 하고 찾아나서야 할 시점이다.”

<일요신문>은 창간 23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맞아 당시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와 그 관련 유적을 중심으로 장장 2500㎞에 달하는 대장정에 나섰다. 


[1탄] 중국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요람

<일요신문>은 지난 4월 6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번 답사를 함께할 전정혁 선생(66)이 나와 있었다. 조선족인 그는 교원 및 문화국 공직자 출신이며 현재 요동항일영렬연구실 주임을 맡고 있는 향토학자다. 그의 선친 역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그는 지난 30여 년간 중국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 출신의 항일 의·열사들을 연구해왔다. 
 

신흥무관학교 첫 설립지인 추가가엔 현재 건축자재를 다루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아래 사진은 강 건너편에서 본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일요신문>이 처음 향한 곳은 지린성(吉林) 류허(柳河). 출발지인 선양으로부터 약 340㎞가 떨어진 류허는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전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무장투쟁의 요람과 같은 곳”이라며 “활동기간은 불과 10년 남짓이지만, 그곳을 거친 졸업생 수천 명은 훗날 항일무장투쟁의 주축으로서 활동했다”고 평가했다. 첫 답사지로 류허를 택한 이유다. 

신흥무관학교의 탄생은 당시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자, 곳곳에서 무장투쟁 운동이 전개됐다. 하지만 일제는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의병을 비롯한 무장투쟁 세력들은 국내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이들 상당수는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1910년 항일결사 조직인 신민회 간부들은 당시 간도 지역에 인재를 양성할 무관학교 창설에 동의했다. 이에 혁신유림 출신의 의병장 이상룡을 주축으로 이회영·시영 6형제, 훗날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는 이동녕 등은 사전 답사를 통해 지금의 류허 ‘추가가(鄒家街)’에 자리를 잡는다. 이들은 그곳에 경학사라는 별도의 결사조직을 결성했고, 무관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를 설립한 망명자들은 국내 가산을 모두 처분했고, 척박한 이국땅에서 기약 없는 삶을 시작했다. 1911년 5월의 일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지인 추가가의 터는 현재 건축자재를 다루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주변은 광활한 평야지역이었다. 특히 상당한 규모의 논이 눈에 띄었다. 중국 동북지역에 이전에는 없었던 논농사를 들여온 것은 당시 조선의 이주민들이었다. 봇짐 한 켠에 꼭 볍씨를 넣어 두었다는 한민족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증표인 셈이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지 뒤에는 설립자들이 노천회의를 열었다는 대고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대고산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군사교육 장소이기도 했다. 설립지 앞에는 이회영 가족이 기거했던 촌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정혁 선생에 따르면, 학교 설립지로 추가가를 택한 이유는 조선 본토와 오갈 수 있는 교통 환경과 자체 경작이 가능한 평야가 큰 몫을 했다고 한다.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당시 학교의 공식이름은 무관학교가 아닌 ‘신흥강습소’로 했다. 학교가 설립된 해 12월 속성 과정을 마친 학생 40명이 신흥무관학교의 첫 졸업생으로 배출됐다. 현재 한족 주민들은 이와 관련한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학교의 옛터와 대고산을 매입해 기거하고 있다는 한 노파는 “예전부터 신흥무관학교의 옛터라는 것도, 그 앞에 이회영 형제가 살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답하며 먼 곳의 대고산을 가리키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처음 설립된 추가가는 항일투쟁의 요람이자 성지인 셈이지만, 그 역사는 오래지 못했다. 뛰어난 지리적 접근성과 경작이 가능한 평야지역이라는 이곳 특징은 곧 외부의 침입과 보안에는 취약점으로 나타났다. 무관학교의 특성상 일제는 물론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이따금씩 도적떼가 습격하기까지 했다. 

결국 설립자들은 이듬해 인근 지역인 퉁화(通化) ‘합니하(哈泥河)’로 학교의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합니하는 신흥무관학교의 세 번째 교사인 ‘대두자()’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 학교의 본교로서 역할을 했기에 학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새로운 교사를 축조하는 데는 이회영 6형제의 차남 이석영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처분해 자금을 내놨다. 

설립자들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사 이동장소로 ‘합니하’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요신문> 취재진은 해당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몸소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2시간여 해당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말 그대로 험로에 험로가 이어졌다. 이동 내내 산지를 넘었고, 길은 아직도 잘 닦이지 않아 차가 계속 들썩였다. 차 안에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당시 설립자들은 외부의 눈을 피해 깊고 깊은 요새를 찾았던 것이다. 척박한 요지기에 땅값 역시 다른 곳에 비해 저렴했다. 지금 이곳은 ‘광화(光華)’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취재진이 도착한 ‘합니하’는 한눈에 봐도 요새에 가까웠다. 신흥무관학교의 두 번째 교사가 있었던 장소에는 현재 이곳 특산물인 포도 가공식품 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뒤에는 험준한 산세가 펼쳐졌고 앞에는 물살이 제법 강한 강물이 흘렀다. 이 강 이름이 바로 당시 지명이었던 ‘합니하’다. 

교정이 자리 잡았던 장소 오른편엔 험난한 산세에 어울리지 않은 전답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전답들은 당시 학교를 세우고 자리했던 망명자들과 학생, 그리고 그 가족들이 온갖 노력 끝에 개간한 결과물이었다. 제법 넓게 자리 잡은 전답을 보고 있자니, 당시 사람들이 겪은 힘겨운 삶의 투쟁이 그대로 전해졌다. 

강 넘어 언덕에는 경사진 옥수수 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당시 학생들이 식사를 했던 ‘고려관’이라는 식당이 있었다고 한다. 험준한 지형 탓에 학생들은 밥을 먹으러 교사에서 식당으로 이동하는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취재진이 식당 자리를 살펴보기 위해 직접 이동해 보니, 당시 학생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까 새삼 느껴졌다. 험로의 연속이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재학생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산(<아리랑>의 주인공)의 증언에 따르면, 합니하 교정에는 모두 18개나 되는 교실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밖에 학년별 강당과 교무실, 사무실과 편집실, 숙직실이 들어선 별도의 내무반 등이 들어섰다. 초라한 창고에 마련한 앞서의 추가가 교정과 비교하자면 제법 규모 면이나 시설 면에서 번듯했던 셈. 이때 학교에선 일반 중등교육과정도 가르쳤기 때문에, 기존의 ‘신흥강습소’라는 공식 명칭에서 ‘신흥중학교’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이곳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에는 이미 6년 전, 지역 조선족들에 의해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절차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얼마 안 가 철거했다. 이 때문에 앞서의 추가가와 합니하, 그리고 세 번째 본교 교정이 자리 잡았던 대두자 등 현재 해당 장소엔 신흥무관학교의 옛터였다는 것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시도 없었다. 단지 조선족들을 중심으로 고찰과 전래를 통해 장소가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도 크게 한몫을 한 셈이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교과 내용은 여타 사관학교와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학교 역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합니하 학교의 연수 과정은 크게 일반 중등과정과 부설과정인 군사과로 나뉘었다. 일반 중등과정은 군사교육과 더불어 교양교육이 병행됐으며 총 3년의 과정을 거쳤다. 군사과는 1년 과정으로 군사교육이 중심이었다.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이들은 대개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다만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교구재가 부족했고, 기마훈련은 운영이 쉽지 않았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는 세 번째 교사인 대두자로 자리를 옮긴다. 기존의 합니하 교정은 분교로 이용됐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수많은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찾으면서 보다 넓은 장소가 필요했던 것. 그 많은 청년들을 수용하기에 요새인 합니하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세 번째 교사로 옮겼을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인근 지역에 몇 개의 분교를 마련하는 등 확장에 나섰다. 

하지만 학교는 부흥과 동시에 한계도 다가왔다. <일요신문>은 그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의 마지막 교사가 자리했던 대두자로 이동했다. 본격적으로 망명자들의 발자취와 흔적이 펼쳐졌다. 

<다음호에 계속>

중국 지린=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100년 전 무상급식 원조

사제가 함께 교사 짓고 밭 갈고…

항일무장 투쟁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설립에 앞장선 망명자들과 그 일가족의 철저한 희생으로 운영됐다. 척박한 외지에서의 삶이었기에 이를 운영하는 망명자들이나 배움을 찾으러 온 학생들이나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앞서 살펴봤듯, 교사의 건축과 운영의 종잣돈은 망명자들의 가산으로 마련됐다. 그래도 부족한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망명자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모금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추가가 옛 터 뒤에 자리 잡은 대고산(위)과 당시 망명자들이 개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합니하 전답.


그럼에도 학생들은 일절 수업료를 내지 않았다. 수업료뿐 아니라 급식 역시 운영자들에 의해 마련됐고, 집이 먼 학생들은 기숙도 가능했다. 특히 부군을 따라 망명한 부녀자들의 희생이 컸다. 이시영의 부인은 현지서 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다. 어찌 보면 현재 이슈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무상급식’을 이미 100년 전에 실시했던 셈이다. 

대신 학생들은 학교 운영에 힘을 보탰다. 교사를 건축하고 밭을 개간해 농사에도 힘쓰는 등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겨울엔 인근 산지에서 땔감을 마련해 오기도 했다. 당시 ‘학·병·농 투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
 
설립 주역들

이회영·시영 6형제 답사부터 직접 나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익히 잘 알려진 인물은 애초 사전 답사부터 직접 나섰던 이회영·시영 6형제 가문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신민회 창립 멤버로서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전 만주 용정 지역에서 이미 서전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창립한 경험이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

그의 동생 이시영 역시 형을 따라 학교 설립 당시 간도로 이주하였으며 훗날 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이승만 정부 1대 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광복 이후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성재학원의 신흥전문학관(경희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또한 이회영 6형제 중 차남 이석영은 자신의 가산을 처분해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이전에 크게 기여했다. 

학교 설립의 또 다른 주축 인물은 이상룡 선생이다. 이상룡은 안동 명문가 출신으로 혁신유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99칸에 달하는 저택의 소유자로 알려졌던 이상룡은 젊은 시절부터 의병에 가담했으며 학교 설립 당시 가산을 처분하며 심적·물적으로 일조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의 모체인 ‘경학사’의 사장을 맡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이동녕 선생 역시 학교 설립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동녕은 신민회 조직 당시부터 이회영 가문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으며, 언론과 교육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린 독립 운동가이다. 그는 학교 설립 이전 이미 이회영 가문과 함께 간도로 망명했으며, 훗날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밖에 신흥무관학교에는 김형선, 이장녕, 이관직 등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교관으로 대거 참여하며 명실상부 당시 최고 권위의 독립군 양성 무관학교로 자리매김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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