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긴 눈'으로 독립된 조국을 꿈꾸다! 까만 색안경에 카이젤 수염을 한 멋쟁이 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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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그들 문중만을 별도로 '산동신씨'라고 부를 만큼 오랫동안 고령신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내려오는 곳이다. 신규식은 어려서부터 영민해 신채호·신백우와 더불어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는 1896년경 서울로 올라가 관립한어학교를 다녔으며, 1900년에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육군무관학교는 근대적 고급장교 양성학교로 입학 조건이 까다로워 지배층 관료 자제들이 아니면 입학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신규식이 무관학교에 입학했던 이유는 일찍부터 군사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을미의병 당시 16세의 나이로 소년 의병단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동지들과 거의를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 자결을 시도했다. 이때 한쪽 눈의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되어 그때부터 흘겨보는 듯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1907년 8월 일제가 군대해산령을 내리자, 해산식에서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육군 부위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는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안 독립협회·대한자강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고향에도 학교를 지어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매사에 의욕적인 그였지만 침탈당하는 조국의 모습은 번번이 삶의 의욕을 앗아갔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제일 먼저 홍범식 금산군수가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하였다. 신규식도 그 뜻을 이어 또 한 번 자결을 시도했는데 때마침 그를 방문했던 나철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망가진 눈을 호로 삼아 '예관(目+兒觀 흘겨본다)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신해혁명의 중심으로 뛰어들다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는 서구열강의 조계지가 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1910년 전까지만 해도 상하이는 정착한 한인이 거의 없었던 한국독립운동의 불모지였다.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좀 더 접근하기 수월하고 한인들이 많이 정착해있는 만주나 연해주지역을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반면, 신규식은 중국 남쪽에서 들끓는 혁명의 소식과 국제화된 상하이의 기운이 장차 한국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11년 봄, 그는 상하이로 망명해 신정(申檉)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다. 먼저 혁명가 쑹자오런(宋敎仁)이 주필을 맡은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쉬티엔푸(徐天復)와 교유관계를 맺고 이를 계기로 신해혁명을 준비하던 '중국혁명동맹회'에도 가입했다. 그는 신해혁명의 주역인 쑹자오런·황씽(黃興)·천치메이(陳其美)에게까지 친분을 넓히며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서 신해혁명에 당당하게 동참하였다. 상하이를 한국독립운동의 심장으로 만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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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력으로 상하이는 점점 한국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쑹자오런과 천치메이 등이 위안스카이에 의해 차례로 암살되었다. 그 역시 심한 감시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중국혁명인사들과 더욱 단단하게 유대관계를 다져나갔다. 1914년 발칸반도를 둘러싼 유럽의 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1차 대전의 전세를 관망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신규식은 박은식 등과 더불어 신한혁명당·대동보국단·신한청년당 등의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그가 조직한 단체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임시정부 대표로서 외교활동의 전면에 나서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거국적인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9월 11일 이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통합 임시정부는 출범과 함께 독립운동의 노선대립으로 갈등과 분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은 '외교독립론'이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1차 대전의 종전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독립 청원은 시도부터 좌절되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철저하게 승전국들의 이익을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국제회의였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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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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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와 삼천만 동포를 위해 전력해 달라' 신규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회의에서의 독립 청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은 쑨원의 호법정부가 아닌, 위안스카이의 베이징정부를 중국의 정통 중앙정부로 인정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모든 직임에서 사퇴했고, 임시정부의 분열을 자책하며 극심한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임시정부와 삼천만 동포를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하고는 일체의 음식은 물론 대화조차 거부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단식 끝에 그는 '정부! 정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1922년 9월 25일(43세) 상하이의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냉정한 국제사회와 외교독립노선의 좌절이 또 한 번 그를 자결과도 같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 김건실(충청대 강사·충북대 한국근현대사연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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