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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사건', 경신참변 일어난 룡정 장암동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5월14일 09시22분    조회: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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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일본군, 성인 남자들 교회 가두고 불질러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2) 중국 (中) 북간도 ‘제암리 사건’, 경신참변 일어난 룽징 장암동

장암동은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약 13㎞ 떨어진 곳에 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와 농촌의 좁은 골목길을 몇 군데 거쳐야 나오는 오지다. 선조들은 노루가 많은 지역이란 의미로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은 지린성 룽징시 동청융진 런화촌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인적이 드물고 폐가가 많아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마을의 70∼80대 조선족 어르신에게 물어물어 야트막한 뒷산에 가니 허허벌판 위에 ‘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라고 적힌 비석과 누런 풀로 뒤덮인 묘가 나왔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비석 옆면에는 ‘일본 침략군은 경신년 대참안을 벌릴(벌일) 때인 1920년 10월 이곳에서 무고한 청장년 36명을 이중 학살하여 천고에 용서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고 한글로 적혀 있었다. 1920년 일제가 만주 지역 조선인마을에 침입해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경신참변(庚申慘變)’. 그 중 대표적 사건인 ‘장암동 학살’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일제, ‘기독교인은 사회 불만세력’=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을 명목으로 ‘만주 거주 조선인 말살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그해 10월부터 3∼4개월간 중국 동북지역에 침입해 독립군의 기반인 조선인 마을과 학교, 교회를 불사르며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를 경신참변이라고 부른다. 장암동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는 군인 70여명을 이끌고 장암동 마을을 포위해 성년 남자들을 교회에 가둔 뒤 불태워 죽였다. 1919년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교회 학살사건’과 판박이다.

당시 장암동 마을 주민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독립군을 적극 후원했다. 이들은 3·1운동의 여파로 1919년 룽징에서 전개된 3·13만세운동에도 대거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장암동 주민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반일 조선인)’으로 낙인찍었다. 일제가 작성한 ‘간도출병사’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장암동 기독교인의 반일감정을 경계했는지 기록한 대목이 나온다.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은 화전사 허문동과 함께 모두 불령선인의 소굴로 불리는데 (중략) 이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 대부분은 예수교 신자들이며 불령행동의 주모자들 역시 모두 예수교 신자들이다. 불령행동의 음모는 이들로부터 꾸며지고 있다.”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대대장 오오카(大岡)의 지시를 받은 스즈키(鈴木) 대위는 1920년 10월 30일 밤 군인 70명과 헌병 3명, 경찰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장암동을 습격했다. 31일 이른 아침 마을을 포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색출한다며 가택을 수색한 뒤 주민들을 모두 교회 앞마당에 집결시켰다.

일본군은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성인 남자들을 모두 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교회를 포위한 채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을 검으로 찔렀다. 불에 타 죽지 않은 사람들은 근처에 판 구덩이에 생매장했다. 교회 앞마당에 모인 주민들은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오열하며 지켜봐야만 했다.

◇은폐 위해 시신 불태운 일본군=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교회를 불태운 일본군은 아예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집은 물론 소 말 개 등 가축도 한 마리 남지 않을 만큼 큰불이었다. 목숨을 건진 주민들은 여성과 노인, 어린이뿐이었다. 일본군이 철수한 뒤 잿더미만 남은 마을로 돌아온 이들은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냈다. 

며칠 뒤 일본군이 다시 장암동을 찾아왔다. 이들은 유가족이 된 주민들에게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했다. 일본 풍속에 따라 화장 방식으로 다시 장례를 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일본군은 그러나 주민들 앞에서 시신을 불태우며 ‘불령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철수했다. 이후로도 군대와 경찰을 보내 완전히 타지 않은 시신을 찾아내 불태워 흔적을 없앴다. 주민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태워진 시신의 유해를 한데 모아 마을 뒤 언덕에 합장했다. 

장암동 학살사건으로 참혹하게 희생된 이들의 수는 자료마다 제각각이다. 일제가 1921년 2월 25일 작성한 ‘간도사건에서의 조선인, 중국인 사상자조사표’에는 희생자 수가 24명으로 나와 있지만 독립신문 간도통신원이 조사한 자료에는 75명으로 기록돼 있다. 영국인 선교사로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룽징 제창병원 원장인 마틴은 주민 36명이 희생됐다고 기록했다. 학살 당일인 31일 캐나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푸트와 함께 현장을 방문한 그는 참혹한 현장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는 31일 직접 뇌라바위(노루바위) 마을로 갔다 (중략) 잘린 다리와 잘린 손을 원하는 곳에 안치하고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사진기를 들 수 없었다. 사진을 겨우 찍었다. 기도할 때 교외의 한인과 중국인들이 함께 보았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을에 있는 예배당과 소학당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한국교회, 장암동 학살사건 기억해야=장암동 사건은 마을 전체를 불사르고 수십 명을 총칼과 불태워 죽인 끔찍한 사건이지만 이를 기억하는 현지인은 거의 없었다. 유적지를 찾기 위해 마을의 조선족들에게 ‘장암동’과 ‘경신참변’을 묻자 고개부터 저었다. 인근 마을에서 만나 기자를 안내한 조선족 이모(75)씨는 “비석의 존재는 알았지만 내용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장암동 학살사건에 관한 비석과 묘는 1999년 룽징 3·13기념사업회가 현지 조사를 한 뒤 만든 것으로 2010년 재단장됐다.  

안병렬 옌볜과기대 한국어과 교수는 “나라 없는 죄로 마을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된 가슴 아픈 일인데 제암리교회처럼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도 못했고 일본인에게 사죄도 받지 못했다”며 “후손들이 이를 까맣게 잊고 사는 것도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현장에 동행한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는 “당시 만주 지역 기독교인들은 모두 독립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며 “민족이 고난을 겪고 있던 시기 기독교인들이 보였던 의기를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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