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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빛을 본 봇나무껍질속 편지 한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7월1일 10시38분    조회: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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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 그가운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오늘은 인생의 황혼녘에 선 갑삭한 88세 로인의 묵직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60년만에 빛을 본 편지

2000년 청명, 룡정시 개산툰진의 김문필옹(당시 73세)은 해마다 그래왔던것처럼 안해 강금자씨(올해 81세)가 정성담아 싸준 제사음식을 들고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 1대에 위치한 아버지 김철운의 묘소를 찾았다. 3남2녀중 막내아들인 김문필옹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던 모양, 해마다 청명, 단오, 추석이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꼭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산소에 도착해보니 주변에서 방목되던 소들이 밟아놓은듯 제사돌이 엉망으로 되여있었다. 김문필옹은 정리를 할 료량으로 부스러기 돌들은 치워버리고 큰 돌은 바로잡으려 손을 돌밑으로 넣었다. 그때 손끝에 뭔가 걸리는것이 있었다. 무심코 꺼내본 그것은 누군가 베실로 꽁꽁 동인 봇나무껍질통이였다.

“길이가 한뼘쯤 되였는데 겉에는 초를 발라 밀봉했더군요. 마개를 겨우 뜯었는데 그속에는 한장의 종이가 들어있었어요.”

종이에는 조선글이 빼곡히 적혀있었고 초를 발라 마무리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상태는 온전했다. 다만 새까맣게 된 봇나무껍질이 어느정도 세월의 흔적을 짐작케 할뿐이였다.

김문필로인은 돋보기가 없었던 탓에 편지내용을 읽지 못하고 아래켠에서 일을 하던 황기화와 리홍화 두 부녀를 만나서야 비로소 편지내용을 알수 있었다.

편지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씌여있었다.

“김철운 아들 김문학, 김문국, 김문필

김철운동무는 민국 19년(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로당원이며 적후투쟁에서 우리 당 동만항일유격대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우수한 정보원이였다. 그중 대표적인것은 홍기하전투, 이 대승리는 김철운동무의 정보와 갈라놓을수 없다.

마지막 정보는 민국 29년 4월에 보낸 정보에 의하여 서성구 민생단 두목을 청산한것이다.

우리는 김철운동무를 만나려고 왔으나 감옥에서 고문당한 미열로 앓다가 희생되였다는것을 알았으며 비통한 심정으로 이 글쪽지를 김철운동무의 무덤에 묻어놓고 간다.

민국 29년 10월 29일

동만항일련군 2군

유격대원 류경수 강위룡”

편지내용을 다 들은 김문필옹은 쿵쿵 세차게 뛰는 가슴을 눅잦힐수 없었다. 머리속에는 대뜸 지난 세월의 편린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며 퍼즐조각마냥 무어지기 시작했다…

일 안하고 “나돌아다니던” 아버지

김문필옹의 기억속에 아버지는 집에 거의 붙어있지 않았다. 한번 왔다가는 몇달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은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거칠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마을사람들은 집식구도 먹여살리지 못한다고 아버지를 비난했고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원망을 많이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것은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했던 이사였다. 온 가족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수차나 이사를 강행했다.

때는 1937년, 개산툰에 이사간후 일본인의 팔프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중국인 로동자를 구타하는 일본십장을 반주검이 되도록 두들겨팼다. 그리고 또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가을께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두 사람의 부축하에 간신히 걸을수 있는 정도였다. 가족들에게는 일본인과 싸워서 그런것이라고 했다. 반년후 몸이 춰서자 또다시 어데론가 나갔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남에게 업혀서 돌아왔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였는데 왼쪽 하복부에 생긴 사발만큼한 크기의 상처가 가장 엄중했다.

라진감옥에 갇혔을 때 놈들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져놓은 자리였다.

그때에야 김문필옹은 아버지와 가까이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수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는 어린 김문필옹에게 방토문(쪽지)를 써줄터이니 국수당 돌밑에 넣어두라고 일렀다. 그리고 돌아올 때에도 돌밑에 뭐가 있는지 살피라고 했다. 그렇게 1년이 좀 넘는 기간동안 김문필옹은 아버지의 분부대로 30여차 글쪽지를 날랐다.

1940년 음력 6월 초엿새,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는 간신히 입을 열어 “나중에 정 살기 바쁘거든 십리평의 삼촌들을 찾아가거라, 도와줄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영영 눈을 감았다.

“아버지 편히 잠드세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당시 겨우 13살이였던 김문필옹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아버지 생전의 례사롭지 않았던 행적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의문을 품고 있었다. 봇나무껍질속 편지의 내용을 듣는 순간 김문필옹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편지속 내용은 바로 김문필옹이 평생동안 그토록 알고싶어했던 아버지의 신분에 대한 답이였다. 그것은 그렇게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늦게 그를 찾아왔다...

김문필옹은 마음속에 사무치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채 아버지의 묘소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편지를 다 읽은 두 녀성이 자리를 뜨자마자 김문필옹은 아버지의 묘소에 무너지듯 쓰러져 꺼이꺼이 울었다.

김문필옹은 이 봇나무껍질속 편지가 비록 그들 형제에게 쓴것이지만 그속에 아버지의 신분을 비롯한 우리 당과 항일련군의 한단락의 투쟁사를 담고있음을 상기하고 여러모로 연줄을 달아 당시 주박물관 관장이였던 김만석에게 보냈다. 주박물관과 성문화청의 중시하에 봇나무껍질속 편지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2급문물로 지정됐다. 이 문물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소장돼있다. 김만석은 이에 그치지 않고 편지속 류경수와 강위룡의 신분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대량의 자료수집끝에 김일성장군회억록과 림춘추의 《청년위사》중에서 두 인물이 동북항일련군 1로군 제2방면군 로전사였음을 밝혀냈다. 김만석관장이 가져온 자료사진을 보는 순간 김문필옹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적 우리 집으로 자주 찾아왔던 키다리 아저씨들이 바로 류경수와 강위룡이였어요.”

길림성정부에서는 항일로전사인 류경수, 강위룡이 그의 전우 김철운의 신분을 증명하는 이 편지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연구를 거쳐 2001년 9월 25일에 김철운을 항일혁명렬사로 인정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세월보다 저세상에 간 세월이 훨씬 긴 오늘에도 김문필옹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북받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종래로 아버지를 원망한적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가정을 희생하면서 바꾸려 했던것은 이 땅의 모든 가정의 평화였다는것을 깨달은 순간 김문필옹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  왜 이 땅의 빛을 보지 못하고 그리 허무하게 가셨습니까!

장장 60년을 넘도록 일년에 3번씩 묘소에 다닌 정성이 갸륵해서였을가 어두운 무덤속에 묻혀있던 비밀은 기적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쓸쓸히 60년을 이름없이 누워있던 항일렬사는 드디여 편히 쉴수 있게 되였다.

취재가 끝나고 돌아서는 길, 머리가 하얗게 센 김문필옹과 안로인 강금자씨는 멀리 조그마한 점으로 보일때까지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며 바래주었다. 억겁의 세월속에 인간의 생명은 찰나에 불과하다. 흐르는 세월이 지난 세대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땅속에 묻어버리지 못하도록, 선렬들이 목숨으로 맞바꾼 평화가 빛바래지 않도록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또 해야 한다.

연변일보 글·사진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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