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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저작에 언급된 장고봉사건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7월30일 08시22분    조회: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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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7월 30일, 일본군은 장고봉의 쏘련군진지를 향해 진공을 개시하고 3일 새벽에 장고봉과 장군봉을 점령하였다.

지금으로부터 77년전인 1938년 7월하순, 연변 훈춘 방천에 있는 장고봉(张高峰)에서 일본군과 쏘련군간의 치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외국군대가 들어와 다른 외국군과 국경다툼으로 일어난 첫 전쟁사례이다.

모택동주석은 이 장고봉사건을 자신의 저작에서 언급한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있다. 필자는 간고했던 항일의 나날에 발행한 장고봉사건을 소개하려고 《훈춘문사자료》 등 문헌들을 참고하면서 이 글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신문과 잡지에 공개되지 않았던 일본 종군기자가 그 당시 전쟁상황을 찍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훈춘 경신향경내에 있는 장고봉은 해발이 겨우 152메터밖에 되지 않는 낮다란 산이다. 장고봉은 한때는 《칼산》이라고 불리였으며 로씨야 이름으로는《자오르나야》라고 하는데 호수 맞은켠이라는 뜻이다. 이 산은 우리 나라의 동쪽끝 중국, 로씨야 , 조선 3국 접경지대에 있는 군사전략요충지나 다름없다.

장고봉사건으로 하여 피해를 받은 중국 방천촌의 농가들.

그젠날 우리의 조상들은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이 땅을 개척하면서 살았다. 우리 민족은 그 어느 고장에 살든 지역의 산들에 대하여 모양새와 지형에 따라 많은 이름들을 지어불렀다. 례컨대 형제같다하여《형제봉》이요. 모자같다하여 《모아산》이요 도끼같다하여《도끼봉》, 락타같다하여 《락타봉》등 많은 이름들이 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장고봉》도 례외가 아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방천이란 이곳에서 살면서 서북쪽에 있는 신기한 봉이 마치 우리 민족의 장고같이 생겼다고 하여《장고봉》(长鼓蜂)이라고 불렀다. 후에 한어로 그음을 따서 산이름을 적다보니《장고봉》(长鼓蜂)이 《张高峰》으로 되였다. 또한 《방천》(防川)도 처음에는 우리 조선인 간민들이 이곳에 살면서 버드나무가 자라 강뚝을 이루었다 하여 《버들방천》이라고 불렀다. 후에 지명을 올릴 때《버들》을 빼고 뒤부분의 음을 본따서 한자 《防川》이라고 하였다.

 

장고봉사건이 일어나자 남성들은 전선에 강제동원되고 부녀들과 어린이들이 난민으로 되였다.

장고봉은 훈춘에서 150리 떨어져있는 조선동해로부터 륙지로 40리 들어온 두만강동안에 위치해있다. 산기슭에는 고기가 많이 나는 늪과 방천마을이 있다. 강건너편은 조선이다. 장고봉에 오르면 하싼호와 뽀시에트평원이 보이는데 화장한 날에는 해삼위(海参崴)도 아득히 바라보인다. 이 산마루를 따라 5리가량 가면 중국, 로씨야 국경의 첫 경계인 《토자비》(土字碑)가 세워져있다.

일찍 20세기 초부터 일본침략자들은 로씨야를 침략하려는 야심을 품고 1938년 7월부터 장고봉근처의 하싼호일대를 《만주땅》이라고 우겨대면서 쏘련군에 무조건 철거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여러번 제기하였다. 쏘련정부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리 없었다.

7월 15일, 일본군은 장고봉일대에 있는 쏘련군의 군사시설과 병력배치를 정탐하기 위해 마쯔시마(松岛)오장과 이도(伊藤)군조 등 3명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인 농민옷차림으로 가장하고 사진기를 몰래 갖고 쏘련군의 군사배치를 찍기 시작하였다. 이를 발견한 쏘련변방군은 상급의 명령에 따라 마쯔시마오장을 당장에서 격사하였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삼고 쏘련측에《장고봉일대에서 즉시 철거하라. 그렇지 않으면 과단한 조치를 대겠다.》는 통령을 내렸다. 그러나 쏘련정부에서는 그들의 말을 귀밖으로 들었다.

 

 

1938년 8월 2일, 쏘련군대가 고성 남봉산의 일본군대진지를 포격하고있다.

일본군은 조선 라남에 주둔시킨 19사단의 보병 4개 중대, 산포병 2개 대대, 야전중포병 1개 대대를 두만강접경지인 경흥, 아오지 등지에 몰래 집결시켜놓고있었다.

1938년 7월 30일 저녁에 두만강을 건너 방천에 집결된 일본군은 이튿날 밤 12시경에 돌연적인 야간습격을 들이대 장고봉과 사초봉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의 통령을 개이치 않게 여겼던 쏘련군은 많은 피해와 사상자를 냈다. 그제야 쏘련군은 급히 보병 32사, 40사, 기계화 2대, 려대에 소속된 땅크영으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8월 6일에 고지를 다시 탈환한 쏘련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욕심이 한정없는 일본군은 참패를 당하고도 빼앗기게 된 고지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야간습격전술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장고봉을 또 강점하였다. 쏘련군은 일체 무기와 병력,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총공세를 벌렸다. 장고봉을 두고 일어난 전쟁에서 고지쟁탈로 주인이 네번이나 바뀌다보니 쌍방이 참중한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쏘련군의 호된 타격을 받은후 쏘련군과 담판을 하고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사진은 일본교섭인원이 흰기를 들고 쏘련교섭원들한테로 다가가는 장면이다.

하야시산로(林三郎)의 《관동군과 쏘련원동군》이라는 저서에는 일본군만 해도 사상자 총수가 1440여명, 그중 사망자가 526명이라고 적혀있다. 8월 10일부터 일본군은 장고봉근처에 더는 얼씬하지 않았으며 정전협정담판석에 앉지 않으면 안되였다.

모택동주석은 일찍 자신의 저작 제4권《세계인민의 리익을 위하여》라는 문장에서 훈춘의 장고봉전투를 간단하게 언급한적 있다. 《… 쏘련이 중국을 지원하지 않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게 되였다. 나는 이러한 관찰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로몽한 정전협정이 과거 장고봉(张高峰)정전협정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1938년 8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장고봉정전협정이 체결되였다. 동협정은 쌍방이 즉시 정전할것과 쌍방경계선의 최후 획정은 쏘련대표 2명과 일본대표, 《만주국대표 》 2명으로 혼성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사처리할것을 규정하였다. 》(이상 모택동저작에서 참조)

장고봉전투가 있은지도 수십년 세월이 흘렀다. 그제날 세상을 놀래웠던 장고봉은 개혁개방을 맞아 동북아 《금삼각》지대로 부상하였다. 1991년 1월초 전임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강택민은 방천장고봉을 돌아보고 《바다로 나간다》(出海)는 한마디를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 장고봉은 해외로 바다로 나가는 문호로 되였으며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여 해내외 관광객을 맞이하고있다. 항일투쟁사의 한페이지로 남았던 장고봉은 인젠 나라와 인민에게 복을 주는 《장고봉》으로 되였다.

(글 김원범, 사진 리광평)


출처-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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