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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전쟁고아와 조선족가정의 운명적인 인연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8월8일 13시05분    조회: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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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일본 이름은 가미오찌노미쯔꼬, 1937년 1월 4일, 일본 후꾸시마껜 이시가와군의 한 평민가정에서 출생.

  1941년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밀산시에 와 살았다.8세때 '8.15광복'이 오자 일본으로 피난도중 부모와 동생을 잃고 오빠에게도 '버려'졌다가 한 조선족가정과 운명적으로 만났다.리씨가정의 도움으로 토비가 욱실대는 당시 요행 살아남게 되였고 초중도 졸업하고 정부에서 일자리를 배치받았고 전국제2차청년사회주의건설적극분자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도 탔다.문화혁명기간 일본특무로 몰리기도 했다가 명예를 회복하였다. 미쯔꼬는 이름도 리미자가 되였다가 리경옥으로 또 바뀌여야 했다.일본전쟁고아의 인생은 말그대로 파란많은 인생이였다. 리경옥은 40년간 동북에서 살았고 중국조선족 량희웅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아들딸을 두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녀, 일본 이름은 가미오찌노미쯔꼬(上远野光子), 1937년 1월 4일, 일본 후꾸시마껜 이시가와군(福岛县石川郡)의 한 평민가정에서 출생.

  리경옥은 일본전쟁고아로서 40년간 동북에서 살았고 중국조선족 량희웅과 결혼하여 슬하에 세 아들딸을 두었다.

  1940년 경옥의 부친 가미오찌노히로하리(上远野广治)는 독신으로 만주에 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흥농합작사에 취직하였다. 1941년 6월에 부친의 의견에 좇아 모친은 미쯔꼬의 오빠 가자(香)와 미쯔꼬(光子), 그리고 동생 마사미찌(正道) 3남매를 데리고 만주 동안시(오늘의 흑룡강성밀산시)에 이주하였다. 미쯔꼬의 집은 동안시 소남구 룡승로 709번지이고 그곳에서 미쯔꼬의 모친은 녀동생 쇼시(昭子)와 가시(佳子)를 낳았는데 쇼시(昭子)는 만 한달이 되기 전에 요절하였다.

  1943년 4월, 미쯔꼬의 부친은 관동군에 참가하였다.

  1945년 8월 10일, 동안성(东安城)내의 일본인들은 일본군부의 철퇴명령에 좇아 동안역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역주위는 인산인해이고 뒤죽박죽이 되였으며 사람들은 밀치락닥치락하며 서로 앞다투어 렬차에 오르려고 악을 썼다. 그들 집안의 다섯명은 안간힘을 다하고 간난신고를 거쳐 끝내 렬차에 올랐다. 피난하는 사람들은 시루의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객차안에 몰켜 발을 옮길 자리조차 없고 객차안은 사람이 많아 시루처럼 덥고 숨쉬기도 가빴다.

  바로 이날 오전에 난민을 가득 실은 렬차가 떠날 찰나에 "우르르 쾅"하는 폭발소리가 나고 렬차는 한차례 진동하다가 곧 멈췄다."렬차가 폭발하였다","빨리 차에서 뛰여내리라!"이런 웨침소리와 함께 객차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들 남매 셋도 어른들을 따라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객차에서 뛰여내렸다. 이때 그들은 온 몸이 땀투성이고 놀라서 정신이 다 나갔다. 그때 오빠는 10살, 미쯔꼬는 8살, 동생은 6살로 모두 철부지 어린애였다. 차에서 뛰여내린후, 정신을 차려보니 기차 뒤끝의 몇개 객차가 뒤집히고 주위에는 팔과 다리가 끊어진 시체가 누워있으며 사방에 짙은 붉은 빛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광경이였다."엄마, 엄마!" 동생은 울면서 불렀다. 그들은 사방으로 찾았지만 회답이 없고 모친과 녀동생의 시체도 찾지 못하였다. 그해에 미쯔꼬의 모친은 (千力)30세에 전쟁에 의한 비명으로 젊은 인생길을 마쳤다. 당시 일본 난민이 탄 렬차가 역에서 천천히 떠날 때 일본군이 50kg의 폭탄을 폭발시켜 36개 객차중의 13개 객차가 전복되여 40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관동군이 화약창고를 폭발시킬 때 련속폭발로 그 렬차가 전복되였다고 한다. 피난중의 세남매는 동안역에서 모친과 녀동생을 여의고 미쯔꼬의 가슴속에 마멸할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엄마는 꼭 와서 우리를 맞아들일게야, 너희는 안심하라." 오빠는 미쯔꼬를 얼리면서 말하였다. 그는 말하면서 동생을 업고 미쯔꼬의 손을 잡고 피난의 길에 올랐다. 3남매는 목표도 없고 어찌하는수 없이 난민들을 따라 도망쳤다. 갑자기"꽈르릉"하는 포소리가 나고 동생이 순식간에 넘어졌다. 동생의 앞가슴에서 선혈이 흘러 웃깃을 붉게 물들였다. 나어린 동생은 눈을 크게 뜨고 오빠와 미쯔꼬를 쳐다보다가 두눈을 감고 호흡을 정지하였다."미사미찌(正道)… 미사미찌(正道)… 오빠는 울면서 웨쳤으며 폭탄에 맞아죽은 동생을 안았다. 미쯔꼬의 왼팔도 폭탄파편에 맞아 피가 흘렸다. 오빠는 나무잎을 뜯어서 미쯔꼬의 피를 닦아주었다. 미쯔꼬는 "엄마, 엄마"하고 부르면서 눈물을 닦고 슬퍼하며 동생의 그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동행하는 어른들이 이 광경을 보고 남매를 권고하여 말하였다."지금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길을 다그쳐 목숨을 건지는게 급하다." 이어서 그들은 가슴아파하며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오빠는 동생의 시체를 안아서 모르는 사람의 시체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기의 적삼을 벗어서 동생의 얼굴을 덮었다. 그는 일어서서 동생을 한번 바라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천진란만한 동생은 미처 전쟁이란 무엇인지 알 새도 없이 피난의 길에서 비명에 짧은 한생을 마쳤다. "우리는 여기서 죽을수 없다. 고향에 가야만 목숨을 건질수 있다. 빨리 어른들을 따라가자!" 오빠는 말하면서 미쯔꼬의 손을 잡아끌며 갈대밭속에 뛰여들어 끝내 난민대오를 따라잡았다. 갈대밭을 뚫고나왔을 때 미쯔꼬는 온 몸이 나른하고 디시는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미쯔꼬는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데다 고달프고 게다가 엄마가 생각나서 목놓아 크게 울어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동생아, 울지 마라! 우리는 빨리 피난가야 한다."오빠는 미쯔꼬의 손을 잡고 이끌며 겨우 발을 옮겼다. 산골짜기는 벌써 밤의 장막이 드리웠다. 사방은 공포에 차고 뒤돌아보면 마치 엄마와 동생이 미찌꼬남매를 부르는 듯하였다. 피난하는 사람무리는 힘들게 앞으로 굼뜨게 움직였다.

  며칠 몇밤을 걸었는지 미쯔꼬의 신이 떨어지고 발가락에서 피가 났다. 오빠는 제 적삼의 한 모서리를 찢어서 미쯔꼬의 피가 난 발가락을 싸매주었다. 조선마을을 지날 때마다 오빠는 먹을것을 구걸하여 조심스럽게 미쯔꼬의 손에 쥐여주었다. 미쯔꼬는 몇 입 먹고 오빠라고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빵을 한쪼각 쪼개여 오빠의 입에 넣었다."나는 배고프지 않아, 빨리 먹고 용기를 내여 대오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가자!" 오빠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의 눈은 공포와 어쩔수 없다는 생각이 충만되여 있었다. 어느 날, 미쯔꼬와 오빠가 산기슭에서 자다가 깨여나 사방을 살펴보니 함께 왔던 난민들이 온데간데 없었다. 그들 둘은 놀라서 기다가 구르며 어쩔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며 앞을 바라고 달렸다. 드디어 난민대오를 따라잡았다.미쯔꼬의 다리가 흰 무우처럼 부어서 정말 발을 움직일수 없어 오빠의 손을 잡고 울면서 엄마를 불렀다. 오빠가 말하였다."미쯔꼬야, 미쯔꼬야, 착한 애야, 빨리 일어나라, 견지하면 일본으로 돌아갈수 있다." 미쯔꼬는 쓰러져"오빠가 나를 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빠도 기진맥진하여 자기도 발을 들지 못하는데 오빠가 녀동생을 업고 갈수 있겠는가? 10살밖에 안되는 어린이에게는 황당한 일이다, 속에서 불이 나듯 조급해난 오빠는 잠간 망설였다. 어찌하는수 없어서 난민대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몇 걸음 달리다가 고개를 돌리고 "미쯔꼬, 미쯔꼬 "두번 웨치고 가슴을 조이며 애타게 미쯔꼬를 향해 손을 흔들고 돌아서 갔다. 미쯔꼬도 오빠를 부르면서 젖먹던 기운까지 다하여 앞으로 기고 또 기였다. 그러나 결국은 김 빠진 가죽뽈처럼 맥이 풀려 길에 누워 꼼짝하지 못했다. 미쯔꼬는 혼자서 다만 울고 또 울었다. 어둠의 장막이 드리울 때 미쯔꼬는 울다가 지쳐 부지불각에 깊이 잠들었다.

  비록 대낮이지만 미쯔꼬는 무서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빠가 원래 온 길을 되돌아와서 자기를 데려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바로 이때 일본 병사 둘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 둘도 피난가는 도중에 미쯔꼬를 만났다. 그 둘은 바꾸어가며 미쯔꼬를 업고가다가 때로는 피곤하면 미쯔꼬를 목에 앉혀 몇날 몇밤을 갔는지 모른다. 그들이 "뉴워이바거우(牛尾巴沟)"산골짜기의 작은 마을(오늘의 해림시 장정진 영정촌)에 도착하여 20여세 되는 조선족청년에게 미쯔꼬를 맡겼다. 피난중에 만났던 이름도 모르는 두 일본군인은 미쯔꼬의 구명은인이였다.

  미쯔꼬를 부양하는 집에는 할머니 김명숙, 양아버지 리성춘, 양어머니 유복순, 큰삼촌 리성방, 그리고 미쯔꼬까지 합치면 다섯식구였다. 당장 무너질듯한 흙집에 석유등잔불을 켜고 다섯식구가 빙 둘러 앉았다. 할머니는 미쯔꼬를 무릎우에 앉히고 얼굴을 싯어주며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다행으로 큰삼촌이 일어를 대충이나마 알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되였다. 알고보니 미쯔꼬를 부양하는 리씨가정은 조선사람이였다. 큰삼촌은 미쯔꼬에게 리미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때로부터 미자는 진정으로 리씨가정의 일원으로 되였고 운명은 리씨집안과 묶이게 되였다.

  1945년 "8.15"광복으로부터 1947년 여름까지 미자네 집이 사는 림업지구는 토비들의 활동이 창궐하고 무정부상태하의 비상시기여서 미자는 리씨집안의 부담이였다. 미자는 일본전쟁고아였기때문에 하마트면 토비에게 살해될번 하였고 리씨집안도 하마트면 련루되여 온 가족이 피살되는 재난을 당할번 하였다. 할머니는 미자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사람의 옷을 만들어 입히고 뉴워이바거우(牛尾巴沟)로부터 선후로 얜징얜쇼툰(眼镜岩小屯), 흐이잉툰(黑鹰屯), 창팅훠룽거우(长汀火龙沟), 신안진 등지로 이사하고 비적들의 화를 피해 사처로 숨어 살았다. 미자가 할머니를 따라 뉴워이바거우툰에서 훠룽거우로 피난할 때였다. 미자와 할머니가 쪽배에 앉아 해랑강을 건늘 때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한무리의 토비들이 수림속에서 뛰쳐나왔다. 할머니는 지혜롭게 낡은 버들상자를 열고 미자를 상자안에 눕게 하였다. 토비가 소리쳤다."누가 일본사람을 감추었으면 총살이다." 할머니는 태연자약하게 몸으로 버들상자를 가리우고 자기는 조선사람이라고 말했다."그래도 조선사람이 사는 곳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하면서 미자를 데리고 신안진에 가서 살았다. 1946년 섣달 그믐날 밤에 토비들이 신안진을 공격하여"조선사람을 모조리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미자를 채소움에 숨기고 남몰래 밥과 채소를 날라다주었다. 그 후에 양부모집에 불행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둘째 삼촌이 토비숙청전투에서 희생되고 양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고 양아버지는 가출하여 종무소식이였다. 할머니는 미자를 부양할 힘이 없어서 미자에게 숙모집에서 학교에 다니라고 부탁하고 뉴워이바거우 친척집으로 갔다. 숙모집의 형편은 매우 힘들었다. 큰삼촌은 조선전쟁에 나가고 혼자서 두 아이를 데리고 겨우 생활을 유지하는데 미자까지 끼워 궁한 모양은 가히 짐작할수 있다. 미자는 숙모를 도와 두 동생을 돌보고 번중한 가무로동도 해야 하였다. 숙모는 미자를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학교의 선생님이 오셔서 숙모에게 미자를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였다. 숙모는 선생님의 권고를 마이동풍으로 삼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미자가 공부하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다른 애들이 학교에 갈 때 미자는 동생을 업고 그들을 따라갔다. 상학종이 울리면 교실창문밑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미자가 9살 때 학교 교장은 미자의 불행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면비로 공부하게 하였다. 미자는 동생을 업고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다. 학습성적이 우수하여 2년반의 시간으로 4학년에 올라갔다. 일본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마음도 착하다는 소문이 떠돌고 미자를 양녀로 삼겠다는 집이 많아졌으며 숙모가 미자를 학대한다는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런 소문을 듣고 숙모는 화가 나서 미자를 학교에 못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미자는 학습을 중단하고 말았다.

  하루는 미자가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가 살고있는 뉴워이바거우는 신안진에서 30리 떨어진 곳인데 맨발로 온 미자를 보고 할머니는 미자를 껴안고 울었다. 미자도 따라 울었다. 1953년 봄에 종무소식이였던 양아버지가 할머니집으로 왔다. 훗엄마 박복순과 그들의 자녀 김경자와 김경순을 데리고 왔다. 할머니가 미자에게 말하였다."너는 아버지를 따라 신안진으로 가라! 너는 그곳에 가면 계속 공부할수 있다."미자는 양아버지를 따라가서 신안진조선소학 6학년에 입학하고 이름도 양아버지집의 녀동생들의 이름를 따라 리경옥으로 고쳤다. 경옥은 훗엄마앞에서 고양이앞의 쥐처럼 오직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뿐이였다. 아침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두 녀동생을 돌보며 공일에는 나무를 해서 등에 짊어지고 돌아왔다. 5학년도 채 배우지 못한 경옥은 끝내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집중하여 공부했다. 졸업할 때에 이르러 아버지, 어머니께 초중입학시험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반대하고 아버지는 지지하였다. 경옥이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1956년에 초중을 졸업했지만 학비와 기숙비가 비싸서 녕안조선고중에 갈수 없었다. 신안조선중학교의 지도부에서는 경옥이가 녕안조선고중에 갈 희망이 없는것을 알고 아예 목단강사범학교에 추천하려 했지만 훗엄마가 집에 일손이 모자란다고 딱 잡아떼는 바람에 계속 학습할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1956년 7월, 초중을 졸업한 리경옥은 신안진정부에서 그에게 공작(일자리)배치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경옥은 해림현수리과건설설계실의 신안진하동양수참에서 근무하였다. 당과 정부의 관심과 배양하에 리경옥은 표현이 돌출하여 해마다 로력모범으로 평선되고 상급의 표창과 장려를 받았다. 1958년 10월, 녕안현제5차청년사회주의건설적극분자로 평선되여 표창대회에 참가하고 기념메달을 획득하였다. 그해 10월 30일, 흑룡강성제5차사회주의건설청년적극분자대회에 참가하여 장려를 받고 성위와 성정부령도의 접견을 받았다. 그해 11월 하순에 북경에서 열린 전국제2차청년사회주의건설적극분자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탔다. 1960년에 녕안현"3.8"홍기수로 평의되였다.

  "문화혁명"기간에"일본특무"로 몰려 비판, 투쟁을 받았으며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철저히 특무모자를 벗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1985년 9월, 리경옥은 고국을 방문하고 40년만에 생사리별했던 오빠 가미오찌노가자(上远野香)를 만났다. 두 남매는 포옹하고 눈물을 뿌리며 40년간 생사리별했던 평탄하지 않은 세월을 하소연하였다. 오빠가 말하였다."네가 아직 살아있구나! 40년 전, 만주 동안 갈대밭에서 나는 너를 버렸다. 이것은 기적이다. 하느님이 우리 남매를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어준게다."

  1988년 9월, 일본국의 영주권을 취득하고 경옥이 한집식구는 일본 후꾸시마껜(福岛县)에 정착하였다. 2012년 중국정부는 리경옥에게 중국거민신분증을 발급하였다. 리경옥은 지금까지도 중국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를 향수하고 있다.

  리경옥은 전쟁난리를 겪으면서 멀고 먼 700리 길(밀산으로부터 해림까지)의 간고한 로정에 발자국마다 피눈물의 흔적을 남기고 구사일생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얼마나 불행중 다행인가! 토비가 창궐하고 사회질서가 란장판이며 인심이 불안하고 공포에 떠는 험악한 나날에 째지게 가난한 조선족 농민가정이 한 일본전쟁고아를 부양하고 보호한것은 심령이 얼마나 아름답고 인정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리경옥의 생명은 참말로 리씨집에서 준것이므로 그 은혜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그녀는 모교인 신안진조선족소학과 중학교의 은사들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녀는 한 일본전쟁고아에게 일자리를 배치하고 막대한 영예를 안겨준 중국정부에 감사드린다! 중국공민대우를 해주는 중국정부에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리경옥 구술, 해림시 "조선족지" 편집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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