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잊힌 독립투사들(상)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9월9일 07시46분    조회:309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1> 광복 70년…잊힌 독립투사들(상)'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북한 정권 수립 초기의 주석단.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의 모습이 보인다. 맨 왼쪽이 김두봉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대원장 이선근 박사가 6·25 당시 평양에서 수집한 사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한글학자인 주시경의 수제자
-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넘어가
- 항일전투 치르면서도 한글연구
- '깁더 조선말본' 등 사전 편찬

- 해방조국 돌아와 북한정권 합류
- 요직 거치며 지내다가 숙청당해
- 북에선 '반동' 남에선 '빨갱이'로
- 남북 모두 기피하는 인물로 전락

- 기장읍 동부리 죽성천 변 생가터
- 기림비석 하나없는 밭으로 방치

태항산(太行山)은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을 가르는 험준한 산맥이다. 이곳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투쟁 자취가 선연하다. 1941년 여름, 김두봉(金枓奉)은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화북 팔로군(八路軍)의 본거지인 태항산으로 들어가 우리 땅을 강점한 일본군과 맞서 피터지게 싸웠다. 그 용맹함이 호랑이 같았다 하여 그에겐 '태항산 호랑이'란 별명이 붙었다. 천신만고 끝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북한 정권에 합류해 요직을 지냈으나, 1958년 김일성 1인 독재화를 비판한 '종파사건'에 연루돼 숙청당한다. 고령을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지만, 오지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다는 설만 있다. 이로부터 김두봉의 존재는 지워졌고 '태항산 호랑이'도 전설이 되었다. 호랑이 같은 기상으로 깁고 다듬은 한글 연구 업적도 고스란히 묻힌 채.

그가 태어나 자란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고향땅을 적시며 흐르는 죽성천은 그를 기억할까. 광복 70년을 맞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망향가를 불러줄 이도, 초혼제를 치를 이도 모두 사라졌음에랴.

■같은 말을 쓰는 남북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김두봉의 생가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 죽성천 변이다. 향토사학자 공태도 씨가 생가터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창희 대기자
백연(白淵) 김두봉이 뛰어난 한글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말 지킴이 외솔 최현배를 불러오면 그를 기억할까. 이들은 똑같이 주시경 문하생이었다. 다섯 살이 많은 김두봉은 수제자, 최현배는 애제자로 불렸다. 울산 출신인 최현배는 기장 출신인 김두봉과 유달리 친했다. 한힌샘(크고 맑은 샘) 주시경은 언어가 민족의 얼과 혼이라고 가르쳤다. 스승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들 제자에게 스며들었다. 크고 맑은 샘(한힌샘)에서 흰 연못(백연)이 나왔고 외따로 선 소나무(외솔)가 생긴 셈이다. 그 수원지에서 눈뫼 허웅이 컸다. 허웅은 부산 동래고 출신의 세계적 언어학자다.

해방 직후 김두봉은 평양을 선택했고 바로 북한 언어정책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주시경이 기틀을 놓고 조선어학회가 계승한 형태주의 원칙인 신철자법 즉, 기본적으로 한글로만 언어생활을 영위하고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는 정책이 북한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에 반해 최현배는 서울을 선택하고 조선어학회를 재건해 남한 언어정책의 토대를 구축한다. 해방 후 주시경 학파가 주도한 한글운동의 핵심은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추구, 어휘 형태소의 기본형을 고정해 표기하는 형태주의 문법으로 정리된다. 그후 남한과 북한의 한글정책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글 가로쓰기라는 근간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남 북한이 같은 언어 정책을 갖게 된 것은 주시경 문하 두 한글학자의 역할이 컸음이다. 남과 북의 그 많은 기념일 중 유일하게 같은 명칭을 쓰는 날이 '한글날'이라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지난달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의 목함지뢰 폭발사건을 둘러싸고 전운이 잔뜩 감돌았다. 남북 당국간 '2+2 회담'을 통해 8·25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남북이 통했고, 통할 수 있다는데 국민들은 안도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오랜 분단 상황에서 남 북한의 말이 다르고 뜻이 통하지 않아 통역을 써야 한다고 가정하면 아찔해진다. 남 북한 간의 이질화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같은 말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통일 인프라라 할 수 있다. 김두봉의 존재를 떠올리는 이유다.

■한글연구와 항일 투쟁

   
  김두봉이 쓴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의 비문. 숫자 대신 'ㄱㄴㄷ…'을 썼다.
골샌님과 혁명가. 김두봉은 생전에 맞닿기 어려운 두 가지 역할을 감당했다. 좋은 세월을 만났더라면 그는 탁월한 골샌님(샌님티가 몸에 밴 사람)으로 살았을 테고 역사도 그를 후하게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 치하와 남북 분단이란 역사의 격랑은 김두봉을 풍운아로 만들었다. 김두봉은 이질적인 가치를 융화하지 못하고 북한에서 숙청되고 남한에서 잊혀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자취를 더듬는 일은 이 땅에서는 아직도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있다. 분단 조국의 비극이다.

김두봉은 1889년 2월 16일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민족의식을 몸에 새겼다.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다. 청년이 되면서 신학문에 눈을 떠 1908년 단신으로 상경하여 기호학교와 배재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1913년 주시경의 수제자가 되어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스승이 병사하자 뜻을 이어 1916년 세로쓰기 '조선말본'을 내놓았다. 1919년 3·1 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그는 국내에 머물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망명 후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도 그는 한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1922년 그가 펴낸 '깁더 조선말본'은 한글연구의 알토란같은 결실이다. '깁더'란 '깁고 더한다'는 뜻으로 요즘말로 '수정증보판'쯤 된다.하지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 일제의 팽창정책에 맞서 그는 '호랑이'가 되어야 했다.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대군을 상대로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었던 호가장 전투는 독립 투쟁사의 명장면이다. 이 전투에서 그의 벗이자 의열단의 최초 조직자였던 밀양 출신 윤세주가 죽었고, '최후의 분대장'을 썼던 작가 김학철은 다리를 잃었다. 김두봉은 김구도 이승만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선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은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말없는 죽성천

김두봉은 화물선에 몸을 숨겨 망명길에 오를 때도, 해방 후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조국으로 돌아올 때도 '조선말 사전' 원고 뭉치를 끼고 있었다고 한다. 한 손엔 총, 한 손엔 우리말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1924년 1월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가 별세하자 상하이에 있던 동포들이 돈을 모아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문을 김두봉이 썼다.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단기 4222년 3월 19일) 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대한민국 6년 1월) 최준례 묻엄(무덤) 남편 김구 세움'. 1, 2, 3 숫자 대신 'ㄱ,ㄴ,ㄷ… ㅈ,ㅊ'을 쓴 것은 지독한 우리말 사랑의 발로다.

역사학자 이청원은 1946년 4월 '조선인민보'에 실은 '김두봉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김두봉은 전투적 정열의 지도자라기보다 오히려 학자형의 냉정한 의지의 지도자다. 금일 조선의 지도자들 중에서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존경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분이 김두봉일 것이다."

당시 양쪽에서 모두 존경과 기대를 하던 김두봉은 지금은 남과 북 모두에게 기피인물이 돼 버렸다. 그 개인뿐 아니라 민족의 아픔이다. 그가 북한 정권에 흡수됐다고 해서 그가 남긴 항일무장투쟁과 우리말에 대한 애정까지 폄훼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그는 주시경 문하의 최현배와 함께 남북한 언어 분단을 막아낸 학자가 아닌가.

김두봉이 태어난 기장읍 동부리 87번지는 죽성천 변의 한갓진 밭뙈기로 변해 있다. 기장의 향토사학자 공태도(82) 선생이 이곳을 안내했다.

"아무 것도 없어. 생가터란 곳도 지번을 떼보고야 알았어요. 친척이나 인척도 없지 아마. 좌파 딱지가 그만큼 무서웠던 게지.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것과 한글 연구자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어요.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공태도 선생이 쓴 '기장의 독립운동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를 보면 김두봉의 가문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줄을 섰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김약수(金若水)는 김두봉의 6촌 동생이고, 신간회와 의열단에서 활동한 항일 운동가 박문희(朴文熺)·박문호(朴文昊)·박차정(朴次貞)은 김약수와 5촌 조카이니 이들과도 한 집안이다. 박차정과 결혼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은 그의 조카사위다. 또한 박차정의 작은 아버지인 항일 운동가 박일형(朴日馨)은 사돈이다. 이외에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도엽·김규엽 형제, 김시엽·김주엽 형제도 5촌 조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 전력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김두봉의 생가터 옆에는 동해남부선 철길이 지나고 죽성천이 흐른다. 맑아진 죽성천에 오리떼가 한가하게 놀고 있다. 죽성천의 물은 동해로 빠져 북한 땅을 적실 것이다. 포효를 잃어버린 독립운동의 호랑이, 남북 언어분단을 막은 한글학자…. 종이배에라도 '태항산 호랑이'를 실어 죽성천을 통해 동해 큰 바다로 보내줄 순 없을까.

국제신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5
결과가 없습니다.
‹처음  이전 7 8 9 10 11 1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