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림기획련재-2] 수중의 사찰에서 울리는 천년의 옛 종소리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11월11일 14시15분    조회:170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숨어있었다고 전하는 보가산의 당왕동

   (흑룡강신문=하얼빈) 택시 기사는 우리 일행을 저수지 입구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입구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는데, 일부 사람은 그대로 들어가고 일부 사람은 입장권을 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누군가 한창 직원 모양의 아줌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잠깐이면 돼요. 저기 둑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나온다니까요."

  아줌마는 저수지 안쪽의 촌민이 아니면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저수지 둘레가 모두 풍경구라고 한다. 저수지 역시 '세외도원(世外桃園)'의 일경(一景)으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로 동정(東征)을 할 때 다녀갔던 옛 호수라고 해서 당왕호(唐王湖)라고 불리고 있었다. 둑에 잠깐 머물겠다고 고집하는 유람객은 실은 돈 몇 푼을 아끼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당왕호는 연운항(連雲港)의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 상거한 숙성(宿城)에 위치한다. 숙성은 이세민이 이 고장에 묵을 때 군사들이 단 하루 밤에 성과 해자를 만들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비록 당왕호 주변이 훗날 '세외도원'이라는 풍경구로 되었지만, 그때의 이세민은 이 멋진 경치를 구경할 여유가 별로 없은 듯하다. 당왕호의 남쪽 끝머리에 있는 산은 보가산(保駕山)이라고 불리는데, 이름 그대로 어가를 지킨 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세민이 이곳에서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사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장령 설인귀(薛仁貴)가 어가를 구해 곤경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해서 '보가(保駕)'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 산마루에는 또 이세민이 잠깐 몸을 숨겼다고 전하는 당왕동(唐王洞)과 궁중의 옥새를 감췄다고 하는 옥새동(玉璽洞)이 있으며 또 그가 말의 고삐를 비끌어 맨 나무라고 전하는 전마송(拴馬松)이 있다.


 

호수 서쪽기슭의 신라촌 유적지, 어귀에 세운 석상 돌하르방이 유표하다.

   산 어구의 돌계단은 양쪽의 가파른 벼랑 사이를 힘들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 가닥의 하늘이라는 의미의 이 '일선천(一線天)'은 산허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산의 여기저기에 널린 거대한 바위들은 마치 조물주가 떡 반죽을 하듯 제멋대로 짓이긴 듯 했다.

  그러나 해발 52m의 보가산을 명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궁색할 듯 했다. 이세민이 난중난세에 국보의 '옥새'를 묻어놓지 않았더라면 자칫 패쪽 하나 걸데 없는 조촐한 야산이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숙성의 다른 곳에도 그의 귀한 몸의 그림자를 비껴놓고 있었다. 당왕호의 동쪽에는 제왕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의 만수산(萬壽山)이 있다. 부근의 산에는 또 그때 군마를 가둔 골짜기라는 의미의 함마구(檻馬溝), 이세민을 쫓아왔던 연개소문의 이름자를 딴 소문항(蘇門項) 등 지명이 있다.


 

          법기사의 유물 일부가 이곳에 보존되고 있다. 건물의 주인은 법기사를 옛터에 재건하겠다고 발원한 비구니이다.

  사실상 '세외도원'의 숙성에는 일찍부터 인적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한나라 때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신선'의 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대륙 초기의 사찰인 법기사(法起寺)는 바로 당왕호의 기슭에 나타나고 있었다. 법기사는 '불법의 기원'이라는 의미에서 취한 이름으로, 이웃한 연운항 공망산(孔望山)의 마애석불과 더불어 불교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경로를 견증하고 있다.

  서토의 부처는 오지의 낙양에 "백마를 타고" 왔다면 동쪽의 연운항에는 "배를 타고" 왔던 것이다.

  숙성은 삼면이 산에 둘리고 바다를 끼고 있어서 선박이 닻을 내리고 급양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또 경치가 좋은 '세외도원'은 선원들이 숙박하는 거주지로 뛰어난다. 고구려를 정벌할 때 해륙 경로를 모두 이용했던 이세민이 이 고장에 나타나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때 고구려 군사에게 쫓겼던 이세민이 법기사에 들려 궁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발원(發願)을 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로부터 2백년 후 법기사에는 신라인이 나타나 향불을 피워 올렸던 것이다

 



법기사의 법사가 옛 돌사자의 출처 등을 소개하고 있다.

  대륙에 나타난 신라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정부 중심의 교섭 때문이었으나 차츰 민간교류가 늘어나면서 계층이 다양해졌다. 와중에는 유학생과 구법승이 있었고 해상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아랍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대륙과 신라, 일본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해안 일대에는 남쪽으로는 복건성(福建省)의 천주(泉州), 북쪽으로는 산동성(山東省)의 등주(登州)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촌락을 이뤄 살고 있었다.

  숙성은 신라의 선대가 대륙을 오고갈 때 경유하는 고장이었다. 이에 따라 신라인들이 숙성에 끼리끼리 찾아 들었다. 신라인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당왕호 기슭에는 신라촌이 나타났다. 그들은 혹자 운수업에 종사했고 혹자 농업에 종사했으며 혹자 식염 생산에 종사했다. 일부는 아예 해주(海州, 연운항의 옛 이름)에 입적했고 현지인과 통혼했다.

  "신라인들은 여기서도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바다에 들어갔을까요?" 일행 중 누군가 엉뚱한 물음을 던져왔다.

  하긴 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시대부터 반도의 사람들은 김을 식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명나라의 의서 《본초강목(本草綱目)》도 신라인들이 깊은 바다에서 김을 채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솔직히 그런 흔적은 꼬물치도 찾을 수 없었다. 필경은 이세민처럼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신라인들은 현지에 지명 하나 남기지 않고 있었다. 호수 기슭에는 돌하르방이 신라촌 옛터를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제주도민을 수호한다고 하는 이 석신(石神)은 10여 년 전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마을 옛터를 지키고 있었다.

  해신(海神) 장보고(張保皐)는 이 신라촌에서 그의 출세의 첫 걸음을 뗐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경 반도 끝머리의 청해진(淸海鎭)을 무대로 동중국해를 누볐던 '무역의 왕'이다. 당왕호 부근의 장가루(張家樓)는 그가 최초에 수하의 뱃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
 

일본 나라현 법기사에 있는 삼중탑, 일본의 제일 오랜 삼중탑이다.

  장보고의 뛰어난 통솔능력은 당왕호에서 벌써 나타난다. 신라촌 옛터의 안내판에는 그가 이곳에 신라소를 세웠다고 적혀있다. 신라소(新羅所)는 당나라의 통제 아래에서 신라 마을의 신라인들을 자치적으로 관리하던 자치기관이었다. 본래 구당(勾當) 신라소라고 했는데 장(長)으로 압아(押衙)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촌보(村保)와 판두(板頭)를 두었다.

  그때 장보고가 식탁에 반도의 토종음식인 김을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사찰의 향불 연기는 마을에 감돌고 있었으며 그의 저택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고찰 법기사는 바로 신라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찰은 이역 땅에서 생활하던 신라인들이 힘든 몸과 마음을 기대던 곳이었다. 신라인들의 촌락과 신라사(新羅寺)는 늘 그림자처럼 가지런히 나타난다. 복건성 천주의 신라촌에 신라사가 있었고, 산동성 일조(日照)의 신라촌에 신라사가 있었다. 나중에 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은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동성 문등현(文登縣)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세우려 하자 이를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천년 후 "배를 타고 온" 법기사의 부처는 폭탄에 의해 훼손되는 법난(法難)을 당한다. 1930년대 말 일본군의 폭격기가 다른 곳을 폭격한 후 남은 폭탄을 전부 이곳에 던졌던 것이다.

  "어릴 때 물가에서 놀면서 사찰의 유적을 자주 보았지요." 산기슭에서 차밭을 정리하던 유씨 성의 촌민은 이렇게 그의 '경력담'을 이야기했다.

  그때 사찰 옛터에는 담의 흔적과 건물 유적 그리고 기와조각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고 한다. 돌로 만든 사자와 의자, 연꽃을 새긴 난간 등도 적지 않았다. 1960년대 초 당왕호에 땜을 건설하면서 옛터는 수중으로 사라진다.

  유씨는 땜 언저리의 작은 둔덕 부근에 법기사가 있었다고 알려준다. 물 건너 저쪽의 사찰 옛터를 보고 섰노라니 한숨이 빗방울처럼 우울하게 떨어진다.




옛날 신선이 살았다고 전하는 선인옥.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마을의 옛 촌민센터에 '법기사 유적지의 유물전시관'이 있었다. 촌민센터는 현재 암자 모양으로 꾸며진 상태로, 여승 한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여승은 '법기사'의 복원을 발원하고 있었는데, 그 연기(緣起) 때문에 건물 안팎에 사찰의 유물을 적지 않게 소장하고 있었다.

  "이건 일부인데요, 괜찮은 유물은 민가에 많이 널려 있어요."

  여승의 말에 따르면 연꽃무늬 등을 넣은 일부 석조물은 농가의 장식품으로 되고 있다. 어느 농가의 뜰에 놓여 있는 돌의 걸상도 실은 법기사에 있던 유물이라고 한다.

  정작 사찰 문어귀를 지키고 있던 돌사자는 '법기사'에 있었다. 뒷이야기이지만, 이 신설한 '법기사'는 당왕호 동쪽의 산 너머 '숙성풍경구'에 나타나고 있었다. '법기사'는 2006년부터 거액을 들여 재건, 현재는 거의 완공되어 그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제 날 "회해(淮海)의 으뜸가는 사찰"이라고 불리던 위용을 재현하고 있는 듯 했다. 회해는 옛날 강소성(江蘇省)과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안휘성(安徽省)의 인접지역을 이르던 지명이다.

  그러나 이런 유물들은 모두 숙성 법기사의 제일가는 보물이 아니었다. 사찰의 3대 가보는 실은 사찰의 역사를 대변하는 한나라 때의 기와와 불경 《패엽경(貝葉經)》 그리고 유구국(琉球國)의 관리가 증송한 구리향로라고 법기사의 각범(覺凡) 법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아쉽지만요, 이 보물들은 지금 우리 사찰에 있지 않습니다."

 

  각범 법사의 말에 따르면 한나라 때의 기와는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잃어졌고 《패엽경》은 산동의 제남(濟南)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구리향로는 연운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법기사에 보관된 것은 일부 석조물과 불사(佛事)에 쓰이던 그릇뿐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유물은 거의 없었는데, 돌사자도 다리에 보기 흉한 '상처'가 있었다.



호수 동쪽의 풍경구에 신설한 법기사.

  어쩌면 '법기사'는 속절없는 세월에 잠기고 현지에는 이름만 달랑 남긴 셈이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다가 또 해상 항로의 요로의 시발점이자 육로의 종착역인 숙성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녀가는 승려와 신도들이 줄을 지었다. 숙성 현지에서는 향을 태운다는 의미의 지명 '소향하(燒香河)'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널리 불리고 있었다. 한때는 서역의 고승도 이곳에 와서 경전을 번역하고 포교(布敎)를 했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각범 법사가 기억에 담고 있는 승려는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 794~864) 대사였다. 그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법기사에 족적을 남겼던 것. 이게 별다른 인연으로 되었는지 몰라도 엔닌 대사는 나중에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중국 구법순례를 완성한다.

  "법기사에서 수학(修學)한 일본 구법승들이 도대체 얼마 되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럴지라도 각범 법사는 일본에도 동명의 고찰 '법기사'가 있다고 하면서 대륙의 이 '법기사'와 이어진 천년의 불연(佛緣)에 감탄을 연발했다.

  일행은 숙성을 떠나기 앞서 만수산 중턱의 '선인옥(仙人屋)'에 잠깐 들렸다. 말 그대로 신라촌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이었다. 암석의 동굴에는 조물주가 빚어 만든 문과 창문, 탁자가 있었다. 이 동굴은 '동해의 일경(一景)'이라고 자랑한다. 옛날 누구인가 이곳에서 수련하여 신선으로 되었다고 하니 그럴 법 한다.

  정말이지 신라인들은 이 '신선의 집'에서 성도(聖道)를 얻으려고 수행하고 있던 '신선'을 보았을까…

  그러나 신라인의 말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스치는 것은 산속의 바람에 속삭이는 나뭇잎 소리뿐이었다. 불현듯 산기슭의 당왕호에서 신라인들을 잠에서 깨우던 사찰의 종소리가 천년 기억의 수면을 헤가르며 떠오를 듯 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08
결과가 없습니다.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