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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3] 일엽편주를 타고 섬에 현신한 지장보살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11월30일 13시19분    조회: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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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바다에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섬이었다. 이름도 잇닿을 의미를 가진 연도(連島)이었다. 기실 연도는 바다 건너 육지와 한데 이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섬 동쪽과 서쪽의 산들이 서로 연접되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럴지라도 육지의 연운항(連云港)은 바다의 이 연도와 기어이 한데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연도와 뒤에 업고 있는 운대산(雲臺山)에서 각기 한 글자를 취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연운항과 연도를 이은 중국 최장의 언제.

사실상 연운항의 옛 이름은 해주(海州)였으며 20세기 30년대 부두를 만들면서 비로소 연운항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한 정씨 성의 택시기사는 또 연운항 부두가 있는 곳을 예전에는 응유문(鷹遊門)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움푹한 모양새가 바다를 향한 천문(天門)이 흡사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응유문은 연도의 옛 이름인 응유산(鷹遊山)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지방지 《운대산지(雲臺山志)》의 기록에 따르면 옛날 섬에는 정말로 매가 늘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고 한다.

  그때 섬에 매가 많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유람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연도에 강소성(江蘇省)의 으뜸으로 꼽히는 해수욕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도는 적어도 20년 전에는 사람들의 생활에 몹시 불편한 섬이었다. 육지와 지척에 있었지만 필경은 배를 타고 왕래해야 했다. 태풍이 불어치고 파도가 높을 때면 단수(斷水)의 위험까지 감내해야 했다.

  1993년, 섬과 뭍 사이에 언제가 생겨났다. 장장 6.7㎞의 이 언제를 만드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명나라 때의 옛 우물, 담수가 부족한 섬에서 아주 귀중한 우물이다.

 "그때 바닷가의 산 하나를 깎아서 바다를 메웠지요." 정씨는 그때 언제 공사에 동원되었던 민공(民工)이었다. 민공은 농민공의 약칭으로 중국 대륙의 특유한 어휘이다.

  이곳의 어부들이 그 산을 뭐라고 부르더라고 하면서 정씨는 잠깐 이맛살을 찡그렸다. 20년이나 지난 오랜 일이라서 기억에 가물가물 하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바닷가에서 산이 하나 사라지고 대신 바다에 언제가 하나 나타났던 것이다. 이 언제는 중국에서 제일 긴 언제로 알려져 있다. 위에는 왕복 2회선 도로가 자로 그은 듯 일매지게 쭉 뻗어있었다.

  실은 공사가 끝나던 그때 언제에는 1회선의 도로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지속적으로 언제를 보강하고 길을 밖으로 넓혔던 것이다. 언제의 남쪽에는 또 갯벌처럼 평탄한 땅이 펼쳐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정말이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상전벽해는' 동진(東晋) 시기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말인데, 동해가 여러 번이나 뽕나무 밭으로 변했다는 마고(麻姑)의 말에서 유래했다.

  부지중 언제 길 위에 농담을 한마디 떨어뜨렸다. "이것 봐, 갈홍은 진짜 '신선'이 돼서 이 언제를 미리 내다본 게 아닐까?"

  갈홍은 바로 이 강소성 일대의 사람으로, 동진 시기의 의학자이고 문학가이자 또 도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신선전》은 그가 《포박자(抱朴子)》와 더불어 후세에 남긴 대표적인 도교 저서이다.

  비록 '상전벽해'의 고사성구처럼 《신선전》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연도는 벌써 '신선의 세계'처럼 이름이 난 듯 했다. 섬 기슭에 이르기 바삐 인파로 복닥복닥 하는 분위기가 갯내음처럼 해풍에 물씬 풍겨왔다.

  연도에 인가가 들어선 것은 불과 수백 년 전의 명나라 때이다. 그때 연유산에는 처음으로 군사가 상주했다. 응유산은 천연적인 바다병풍으로 되고 있었고 또 응유문은 바닷길의 문호(門戶)로 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때 이곳에 군사를 주둔한 것은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서였다. 왜구는 그 무렵 중국 대륙의 연안과 반도에서 약탈을 일삼고 다니던 일본 해적을 이르는 말이다.

  이에 앞서 영유산에 나타났던 일본인은 기실 해적이 아닌 사절과 구법승이었다. 당나라 때 대륙과 일본의 내왕은 아주 빈번했으며, 견당사(遣唐使)와 구법승은 당나라로 왕래하던 도중 해주의 영유산을 경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도의 많은 구법승들도 영유산에 들려서 장안으로 향발했다. 와중에 신라의 구법승 자장(慈藏, 590~658)은 귀국한 후 신라 제일의 사찰 황룡사(黃龍寺)에 9층 불탑을 세우는데, 다섯 번째 층을 '영유(鷹遊)'라고 명명한다. 일각에서는 매가 백제 왕실의 상징이라면서 이때의 '영유'를 백제의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들이 하나 같이 모두 영유산에 나타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에서 시작된 해상 실크로드는 지중해의 동해안까지 이르렀으며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잇던 2천 년 전의 바닷길이었다.

산중턱의 금성선사, 백미터의 낭하와 정자가 특이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손오공(孫悟空)은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원숭이의 이름인데, 삼장(三藏) 법사의 수제자가 되어 천축국(天竺國, 인도)으로 불경을 가지러 간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玄奘, 602~664)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명나라 때의 신괴(神怪)소설이다.

  손오공이 괴석에서 태어나 원숭이들의 왕으로 등극했다고 하는 전설의 화과산(花果山)은 바로 연운항의 도심 부근에 위치한다.

  현장, 즉 손오공이 보좌하던 삼장 법사의 실제 모델도 화과산과 인연이 깊다. 동진 시기의 신괴소설 《수신기(搜神記)》는 동해 진광예(陳光蕊)의 세 아들이 천(天), 지(地), 수(水) 삼계를 관장했다고 서술한다. 도교는 천, 지, 수를 삼원(三元)이라고 이르는데, 동해 일대의 1,600년 전 옛 삼원궁(三元宮)은 화과산에 나타난다. 《서유기》에서 현장도 진광예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현장은 삼원궁이 있는 화과산과 떨어뜨릴 수 없는 혈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유기〉의 저자는 왜서 삼장 법사를 바닷길로 떠나보내지 않았을까요?" 일행 중 누군가 이런 물음을 던져왔다.

  솔직히 누구라도 머리를 갸우뚱할 대목이었다. 더구나 《서유기》의 저자 오승은(吳承恩, 1510~1582)은 회안(淮安)의 태생으로, 이웃한 영유산이 옛 바닷길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모를 리 만무하다.

  그럴지라도 영유문이 해상 실크로드의 대문으로 되는 데는 아무런 손색이 없다. 오늘날 영유문은 이름 그대로 문을 활짝 열고 억톤 물동량의 거대한 항구 연운항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종국적으로 영유산에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은 신라의 구법승 김교각(金喬覺, 697~794)이다. 김교각은 훗날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평가를 받는 고승이다. 이 신분이야말로 유독 그가 영유산에서 소문을 타고 있는 이유가 아닐지 한다.

 

금성선사에 모신 지장보살,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성인 김교각을 모신 사찰이라는 의미의 '금선선사(金聖禪寺)'는 소마만(蘇馬灣)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사 양쪽의 백미터의 긴 낭하가 산중턱의 수풀에 별유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마만은 섬 북남 쪽의 작은 만으로, 명나라가 멸망된 후 옛 대신 소경(蘇京)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며 말을 길렀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때 그 시절 소경이 기르던 말은 더는 소마만에 나타나지 않고 말이 물을 마시던 옛 우물만 홀로 산기슭에 남아 옛날의 감미롭던 물맛을 되새기고 있었다.

  금선선사로 향한 산길은 옛 우물 부근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돌층계를 따라 선사에 오르니 금세 푸른 바다가 시야에 넘실넘실 달려오고 있었다. 옛날 김교각도 이곳에 서서 멀리 반도의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김교각은 이곳을 지날 때 속명이 중경(重慶)이었으며 구화산에서 출가한 후 비로소 교각(喬覺)이라는 이 법명을 얻고 나중에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현지에서는 김교각이 해주에 상륙한 후 다시 배를 타고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불교의 영산(靈山) 구화산에 갔으며 이때 영유산의 진해사에 들렸다고 전하고 있다.

진해사에 주지승은 없고 여신도 한명이 불사를 보고 있었다.

금성선사의 안내판에는 그때 김교각이 지었다고 하는 게문(偈文)이 적혀 있었다.

  "樓禪九華一葉航來루선구화 일엽항래

  千五百年普受鎭海천오백년 보수진해"

  정말로 게문의 단어와 일치한 이름의 고찰 진해사(鎭海寺)가 영유산에 있었다. 게문에 나오는 '보수(普受)' 역시 진해사의 옛 주지승(住持僧)의 이름 그대로이다. 또 남쪽 산기슭의 만은 진해사의 이름을 빌어 '묘전만(廟前灣)'이라고 불리는데, 풍랑이 일지 않아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좋은 자리로 지금은 부두가 들어서있다.

  그러고 보면 김교각이 묘전만에 배를 정박하고 진해사에 잠깐 들려서 주지승 보수와 더불어 찻잔을 기울였을 법 한다.

  그러나 고문(古文)에 능한 정우락(경북대학 국문학 교수)씨는 게문의 '普受'와 '鎭海'를 인명이나 지명의 명사로 해석하는 게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普受'와 '鎭海'는 "널리 바다를 진압하였다"는 것으로 섬에 사찰을 지어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게문은 성인(聖人) 김교각을 불루선궁(佛樓禪宮)의 구화산에서 일엽편주로 모셔내려 영유산 진해사의 본전에 모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로 진해사는 옛날에 지장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진해사의 하원(下院)인 금성선사 역시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었다.

  더구나 게문의 해석 여하를 떠나 진해사는 1,500년이 아닌 250년 전의 사찰이다. 게문의 저자는 김교각이 아닌 후세의 문인으로, 게문은 사찰의 역사를 분식(粉飾)하기 위한 위작(僞作)이라는 게 중론(衆論)이다.

진해사 뒤의 땜에 경번이 나붓기고 있다.

영유산에 승려가 나타난 것은 청나라 강희(康熙) 49년(1710)이다. 이때 승려 은산(隱山)이 이곳에 초가를 짓고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숙성(宿城) 법기사(法起寺)가 승려 보수(普受)를 이곳에 보냈다. 보수는 나중에 은산으로부터 의발(衣鉢)을 물려받았다. 보수는 "부지런히 수행하고 계율이 적절, 엄했으며"건륭(乾隆) 17년(1761) 백간 낭하의 사찰을 세웠다고 《가경해주직이주지(嘉慶海州直隶州志)》가 기록하고 있다. 금성선사는 옛 진해사의 건축양식을 본 따고 있으며 옛 사찰의 모습을 기억에 비끌어 매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보수는 "자체로 자재(資財)를 모으고 탁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사찰건축의 불사(佛事)는 한낱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일설에 보수가 땔나무를 하던 중 산속에서 보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진해사가 개관할 때 해주의 지주(知州)가 친림했으며 숙성 법기사의 주지승이 내림했고 또 주변 지역의 고승이 운집했다고 한다. 옛 진해사는 항일전쟁 시기 전화(戰火)에 의해 훼손되었다. 현재 영유산의 서남쪽 비탈에는 '진해사'의 이름을 달고 있는 작은 불교장소가 있을 따름이다.

  아쉽게도 '진해사'의 주지승은 사찰에 현신하고 있지 않았다. 본전에서 예배를 올리고 있던 여신도는 그가 폐관 수행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선생님도 불공을 드리세요. 여기 부처님은 옛날부터 아주 영험했다고 하지요."

  여신도의 말은 진짜로 거짓이 아닌 듯 했다. 진해사의 영험함은 바야흐로 영유산에 새 사찰로 나타나고 있었다. 현재 진해사는 재건 기획안과 도로 건설이 모두 마무리된 상태라고 한다. 고찰의 옛 진신(眞身)은 인제 영유산에 다시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뒤의 이야기이지만, '진해사'의 바로 뒤쪽 골짜기에서 수십 개의 불탑이 둑에 늘어서서 댐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에 신비한 불교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멀리 앞바다의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언제는 마치 하늘 아래에 하나의 거대한 감탄부호를 찍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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