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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80주기 맞은 단재 신채호 선생 조명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2월19일 00시32분    조회: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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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政權)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 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强盜政治), 곧 이족통치(異族統治)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단재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 역사학자로서 그 족적을 뚜렷이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년). 그가 1936년 2월 21일 차가운 이국의 감옥에서 홀로 생애를 마감한 지 올해로 꼭 80년을 맞는다.

단재 순국 80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0시 청주예술의전당 동상 앞에서 열린다.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와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주최하는 추모식은 애국선열에 대한 추모 묵념, 단재 선생 약력보고, 추모사, 추모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공연으로는 진혼무가 선보인다. 이날부터 오는 21일까지는 시민 추모 참배 기간으로 운영된다.

동양일보는 단재 선생 순국 80주기를 맞아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가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선생의 생애를 조명한다. <편집자>

 

●14세에 사서삼경 독파, ‘신동’이라던 소년

단재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 동구 어남동 도리미(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며 신숙주의 18세손이다.

3살 무렵, 그의 식구들은 산동 신씨들이 많이 모여 사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귀래리) 속칭 고두미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다. 가난한 형편이었으나 선생의 부모는 형 신재호 뿐 아니라 단재에게도 한문 공부를 시킬 정도로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다. 6살부터 그는 할아버지 신성우가 낙향해 새로 문을 연 서당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0세 때는 조부의 사숙에서 공부해 ‘자치통감’을 해독했으며 행시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한문 실력을 갖추게 된다.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으로도 소문이 났다.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단재는 당시 성균관 관장 이종원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게서 “나를 아는 자는 오직 군 한 사람뿐이다(知我者 惟君一人)”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언론을 통해 사상과 이론을 전파

19세가 되던 해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한다.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당시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했는데 이 부서에는 이상재·신흥우·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검거돼 투옥되기까지 했다.

이후 단재는 서울과 고향을 왕래하면서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22세가 되던 1901년 고향 근처인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 신규식·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강사로 활동하며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3년 뒤에는 신백우·신규식 등과 함께 향리에 가까운 묵정리에 산동학당을 설립하고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6월 일본의 간계로 ‘전국황무지개간허차약안’이 조인되자 성균관에서 조용은 등과 함께 ‘항일성토문’을 작성해 외부대신 이하영, 참장 헌영운 등의 매국 음모를 규탄했다.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된 그는 관례에 따라 사임하고 당시 ‘황성신문’ 사장이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의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해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다. 특히 그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언론계에서는 가장 먼저 신문 논설로 이를 소개하고 국민들이 널리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약 1년 6개월 정도 황성신문의 주필로 재직하면서 거의 단독으로 논설을 도맡아 집필했다.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일원이었으며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경제연구회 등 여러 단체에도 관여해 이들 기관지에 논설을 기고하고 토론이나 회의에 참여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겨 신문을 주요 무대로 시론과 사론을 집필하면서 국권 수호를 위한 민중계몽과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언론구국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했다. 역사가로서, 문학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조선상고사’, ‘꿈하늘’ 집필

1910년 4월 단재는 국치를 예감하고 신민회 서울 최종회의의 결의에 따라 망명길에 나섰다. 신민회 동지들의 중국 칭다오에서 만나자는 계획에 따라 안정복의 ‘동사강목’ 만을 들고 김지간과 국경을 넘어 신민회 회의가 열리는 칭다오로 간 것이다.

그해 7월 1주일 동안 진행된 칭다오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길림성 밀산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모든 독립운동의 기지를 이곳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단재는 이를 위해 밀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종호의 출자금과 여러 각처의 성금을 통해 농토도 마련하고 무관학교도 세우려던 이들의 노력은 이종호의 포기로 결국 실패하고 망명인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단재는 그 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교포신문인 ‘대양보’에 이어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 주필로 활동하게 된다. ‘권업신문’은 블라디보스톡과 여러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민들이 그들의 권익과 독립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순한글을 전용해 석판인쇄로 제작됐다.

1913년 봄 단재는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북만주를 거쳐 중국 관내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해 8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해 신규식이 운영하던 동제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규식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단재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교육기관이었다.

1914년 단재는 중국 망명 중 역사 의식의 대전환을 맞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윤세용·윤세복 형제 초청으로 그들이 서간도 환인현에 창설한 동창학교(東昌學校)의 교사로 활동했을 때였다. 그는 윤세복·신백우·김사·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가는 대여행을 했다.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여행은 이후 단재에게 대고구려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귀중한 경험을 준다.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단재는 1915년 이회영의 권유로 베이징으로 이동, 역사 연구를 계속하고 집필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이곳에서 약 4년간 체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조직의 활동이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역사 연구와 문학 창작에 몰두한다. 그 결과물이 중편소설 ‘꿈하늘’이다. 단재는 이 기간 동안 대종교(大倧敎) 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후일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했다.

 

●독립운동시기 최고 명문 ‘조선혁명선언’ 작성

그는 38세 되던 해 7월 박은식, 신규식, 윤세복 등 14명과 함께 임시정부수립을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했다.

1919년 2월에는 만주에서 대한의군부가 주동이 돼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9명 중 한 사람으로 동참했다. 3·1운동 이후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이동해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헸다. 임시의정원에서 단재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선임됐다. 그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사건을 이유로 이승만의 국무총리 및 대통령 선임에 적극 반대했다. 뜻이 관철되지 않자 의정원 의원과 전원의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한다.

임시정부와 맞섰던 신대한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 임시의정원과 결별한 단재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베이징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이곳에서 박용만, 신숙 등 임시정부 반대세력과 합작해 군사통일운동을 일으켜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군사단체의 통합과 혈전의 독립전쟁을 강조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강력히 추진했다.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해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돼 활동했으며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多勿團)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다물단은 우당 이회영의 조카인 이규준이 몇몇 동지들과 만든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단재는 이 다물단의 조직과 선언문을 작성에 도움을 줬다.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한 단재는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관하는 의열단은 단재의 운동정신에도 부합하는 단체여서 단재는 흔쾌히 6400여 자에 이르는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된다.

1924년 4월 베이징에서 처음 결성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무정부주의 운동에 관심을 나타냈다. 단재가 관여했던 통일전선체 신간회 운동이 무산되자 단재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경도된다. 1927년 난징에서 아시아 9개국 대표가 모여 수립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대회의 결의에 의해 실천운동에도 가담, 무정부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결국 택한 방법은 외국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이 위폐를 교환하려 했으나 발각돼 타이베이 지룽 우편국에서 체포된다. 이른바 ‘외국위체변조사건’으로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해 단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죄수번호 411번을 달고 뤼순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해방을 보지 못한 채 하늘로 떠나다.

단재는 감옥에서 독방 생활을 하여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독서를 했다. 노역을 나가면 잠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보거나 메모를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면회 오는 친지나 동지들을 통해 감옥에서 단재가 쓴 원고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재중국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남화통신’을 통해 민족전선의 필요성과 결성 방법 등을 집중적으로 선전했는데 1936년 11월 간행된 것에는 단재가 ‘민족전선을 위하여’와 ‘혁명동포에게’라는 유작시가 실린 것도 이러한 경로를 통한 것이었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이 악화된 단재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한다.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에서 병보석 출감을 통지했고 친지들이 친일 인사를 보증인으로 가출옥을 제의했으나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2월 23일 뤼순형무소 화장장에서 화장된 그의 유해는 다롄을 출발해 다음날인 24일 서울역에 도착한다. 안재홍, 정인보, 홍계초, 원세훈, 신석우, 여운형, 권동진 등 각계 인사가 마중 나와 조문했다. 다시 조치원으로 기차로 이동하고, 택시로 한밤중에야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신백우 집에 도착했다.

생전 그는 “내가 만일 죽으면 시체가 왜놈 발 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해 묘소를 쓰기로 결정한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옛 집터에 암장된다.

<정리/조아라>
동양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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