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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전 파리에선 한국인 최승희의 모자가 대유행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25일 09시20분    조회: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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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눈]105년전 오늘 태어난, 이 땅의 최고무용가…피카소도 김일성도 팬이었던 여인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1938년 12월17일 파리에서 두 번째 큰 극장인 살르 플레엘에서 한국인 무용가라고 당당히 밝히며 한국 무용을 선보인 최승희는 “일본 뿐만 아니라 동양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격찬(주간잡지 ‘시그널’)을 받는다. 그녀의 초립동춤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공연이 있은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서 여인들이 초립동 모자를 쓰고 다녔다. 당시 프랑스의 모자 디자이너인 생 시프가 최승희 모자를 패션에 도입해 유행시켰다고 한다. 이후 브뤼셀, 로마, 헤이그 등 유럽순회 공연을 마친 뒤 다시 파리의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을 때 객석에는 피카소, 장 콕토, 로망 롤랑도 앉아있었다. 신문 ‘피가로’는 “그녀의 보살춤은 선이 환상적이었다”고 말하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승희의 보살춤


피카소와 장 콕토가 지켜본 '최승희 보살춤' 

세계2차대전이 터지자 최승희는 마침 뉴욕 브로드웨이의 공연 의뢰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센트제임스극장 공연에서는 작가 존 스타인벡과 배우 찰리 채플린도 구경하러 왔다. 공연을 본 배우 로버트 테일러는 그녀의 춤에 반해서 영화 출연을 의뢰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이 무렵 유럽, 미, 중남미를 돌면서 150회 정도의 공연을 하여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잡는다.

그 어렵던 시대에 그녀는 어떻게 세상을 사로잡는 춤꾼이 되었을까.

최승희는 1911년 11월24일(105년전 오늘) 경성에서 양반집의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후 토지를 몰수당하는 바람에 집안이 가난해졌지만 숙명여학교에서 전교2등을 하여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26년 3월 운명이 찾아왔다. 일본 신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이 경성 공연을 하러온 것이다. 최승희는 그의 춤에 매료되어 방송국에 다니는 오빠 최승일이 연결해줘서 이시이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자질을 파악한 이시이는 일본에 데려간다. 하루 11시간씩 연습을 강행한 뒤 그해 6월에 도쿄의 호가쿠에서 첫 무대를 갖는다. 당시 한 신문은 “일본 무용계에 별이 나타났다”고 호평했다. 그녀는 당시 일본내 미인 순위 4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에 온 최승희는 다이쇼 천왕의 장례행렬이 있을 때 전철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는데 그녀는 머리를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스승 이시이가 말했다. “승희야, 일본 천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보통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예를 표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 말에 그녀는 곧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일본 천황 장례때 머리 안 숙인 그녀 

스승이 실명한 뒤 최승희는 귀국한다. 경성 공회당에서 신무용 발표회를 가졌으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31년 와세대 대학 러시아 문학과를 다니는 사회주의자 안필승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안씨는 만주사변 이후 시위를 벌인 혐의로 경찰에 투옥되었다. 남편 때문에 최승희는 일본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스승이 힘을 써서 도일해 그의 무용연구소 2층에서 아이를 낳는다. 안필승은 이시이의 이름(漠)을 따서 안막으로 이름을 바꾼다. 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무용발표회를 할 때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보고 경탄을 했다. 영화 출연 제안도 들어왔는데 히데미 감독의 ‘반도의 무희’에 주연을 맡았고 넉달간 상영됐다.

36년 10월 종로 명월관에는 손기정의 마라톤 세계 제패를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몽양 여운형과 고하 송진우 등 정치가들도 있었고 최승희도 와 있었다. 몽양은 손기정과 최승희 앞에서 “자네들이야 말로 조선을 빛내고 있는 애국자들”이라고 칭찬한다. 몽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마해송 등과 함께 최승희 후원회의 발기인이기도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 후원회 발기인 

37년 11월 최승희는 뉴욕 브로드웨이 길드극장(요즘의 버지니아극장)에서 공연을 할 계획이었으나 포스터에 ‘일본인 댄서’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재미동포의 항의를 받아, 미국 무대에 서는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1년간 뉴욕 빈민촌 할렘가에서 살면서 그림모델을 하며 기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파리로 들어간 것이었다. 유럽에서 그녀는 대성공을 거둔다. 



40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최승희를 군부대 위문공연단으로 동원했다. 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이겨서 돌아오라’ 따위의 군가를 불러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최승희의 창의성은 꿈틀거렸다. 그녀는 중국에서 1500년 전 북위시대에 지어진 석굴사원에서 5만1천개의 부처 조각상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불상의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무용으로 표현해낸다.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석굴암의 벽조’는 마치 수만 부처가 환생을 한 듯 아름다운 선과 움직임과 표정이 살아났다. 그 유적을 가지고 있는 중국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예술적 승화였다. 43년 제국극장에는 건물 세 바퀴를 돌 정도로 인파가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안막은 바로 중국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평양에 갔다. 최승희는 이듬해인 46년에 인천항으로 가는 배를 타고(박정희도 이 배를 타고 있었다) 남쪽으로 온다. 그녀는 춤을 추기 위해서는 남편보다 자유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을까. 그러나 오자마자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명단의 도마에 오른다. 그녀는 당시 어느 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빼앗으려 할 때 나는 민족의 정신을 북돋우려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조선의 딸로 걸어온 나의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론은 들끓었다.

대동강변에 최승희 무용실 차려준 북한 김일성 

그해 7월 그녀는 도망치듯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다. 그때 김일성을 만나게 되는데 만나자마자 그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동무, 살러왔소? 다니러왔소?” 



최승희는 살러왔다고 말했고, 김일성은 대동강변에 요정이던 동일관 자리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와 문화선전부 부부장에 오르지만 59년 정권 내부의 대대적 숙청 때에 강제노동형을 받고 사라진다. 67년 최승희 일가가 연금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86년 영화감독 신상옥은 ‘최승희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가다가 잡혔다는 얘길 들었다“고 말했다. 2003년 11월 북한의 조선중앙TV는 무용가 최승희가 1969년 8월8일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생사 여부조차 불투명하던 당대 최고 예술가의 최후를 우린 34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된 셈이다. 

한 방송사의 다큐 프로그램은 최승희의 마지막 육성노래를 공개했다. 

“고향 그리워라 
춤추는 이 밤에 
달빛도 처량해 
가이없는 하늘 
노래 부르며 길을 가네”  

세계가 열광한 이 땅의 천재무용가 최승희. 이 땅에선 식민지와 이념의 질곡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실체 없는 전설’로 떠돌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위인’급 인물들이 그녀의 무대 객석에 앉아 감동하고 지나간, 역사상 최고의 ‘한류’를 지금쯤은 다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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