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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2]화북렬사릉원의 주문빈렬사기념비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2월28일 15시02분    조회: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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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

◈ 리 함

 

주문빈  /자료사진

근 20년전까지만도 조선족항일운동사 연구가로서의 모택동주석의 높은 긍정과 평가를 받은 1938년 봄 개란탄광대파업이 당년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로 부임된 조선족 주문빈에 의해 조직지도되였다는것을 알았지만 주문빈의 묘소가 하북성 석가장시 화북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는것을 잘 몰랐다. 1999년 5월 석가장에 갈 기회가 있었던 필자는 전국중점렬사기념건축물 보호단위인 시안의 화북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도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이어 중화대지에 일어선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기념비를 접하였다. 이 주인공의 이름은 주문빈, 뒤늦게야 주문빈의 사후행적을 알고 마음은 세차게 뛰고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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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렬사릉원의 전칭은 화북군구렬사릉원으로 알려진다. 하북성 성소재지인 석가장시 중산서로 2단 165번지에 자리잡은 이 렬사릉원의 유래는 당년의 주덕총사령과 이어진다.

1948년 5월, 진찰기해방구의 진찰기군구가 화북군구로 바뀌였다. 이해 가을 주덕총사령은 석가장을 시찰하다가 그때 시안의 “승리공원”을 수건하여 화북땅에서 쓰러진 렬사들을 기념하는 렬사릉원으로 할것을 제의하였다. 드디여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준공되여 1954년 8월 1일에 장중한 락성식을 가지였다. 화북군구렬사릉원은 건국초기 우리 나라에서 수건이 빠르고 규모가 크고 조형예술이 독특한 렬사릉원으로 정평이 났다.

화북렬사릉원은 총면적이 21만평방메터로 헤아려지고 남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릉원내에 들어서면 울울창창한 송백과 고목들이 래빈을 숙연한 기분속에 잠기게 한다. 렬사릉원 정문가에 다가서면 한어문으로 된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렬사릉원”이란 금빛글자가 선참 시야에 안겨든다.

정문에 들어서면 만명을 받아들일수 있다는 추모광장이 펼쳐지면서 세개 조로 된 대형 동조각상이 반겨준다. 동쪽의 한조는 총가목을 거머쥔 팔로군전사의 조각상이고 서쪽의 한조는 지뢰배설을 경계하는 남녀민병의 조각상일 때 광장중앙의 주체조각상은 전신무장한채 8.1군기를 추켜들고 앞을 주시하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사 3명으로 이루어졌다.

추모광장의 북쪽가에 명비당(铭碑堂)이 자리잡았다. 명비당은 이 렬사릉원의 중심기념건축물로서 300여명 렬사의 영명록(英名录)이 명비당 중앙에 모셔졌다. 당내 네면 벽에 새겨진 류소기, 주덕, 팽덕회, 서향전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쓴 글자비가 인상적이다. 이런 수령인물들 글자비는 혁명렬사들에 대한 높은 중시와 고도로 되는 평가를 보여준다.

렬사릉원에 안치된 렬사들의 묘소는 명비당의 뒤쪽가에 모셔졌다. 동서 두개 묘소구로 된 렬사묘군(烈士墓群)은 3개 중심비로 련결된 하나의 정체로서 렬사묘마다 규격이 대동소이한 화강암묘를 만들고 묘뒤에 한백옥(汉白玉)비를 세워주었다.

필자가 놀라마지 않은것은 이곳 렬사들의 묘소군체에서였다. 렬사묘소군체에는 317명 렬사들이 울울창창한 송백속에 안치되였는데 제일 앞자리 뚜렷한 위치에 우리 조선족을 빛내이는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의 묘소가 자리잡고있었다.

전혀 상상밖의 일이다. 그래서 필자가 받은 감동을 한두마디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20세기 30년대 후반의 주문빈은 당당한, 당년 기동항일근거지를 창설한 중공기동지위서기이고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주임, 중공기열변(冀热边)특위 조직부장으로서 렬사묘군체의 앞자리에 모실만도 하였다.

헌데 주문빈렬사는 1944년 10월 17일에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에서 희생되였는데 어찌하여 석가장에 묘소가 있을가, 충격적인 현실앞에서 궁금증은 갈수록 커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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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궁금증을 안은채 신형의 기념건축물인 렬사기념당에 들어섰다. 부지면적이 1400평방메터를 헤아리는 렬사기념당은 렬사릉원의 최북단에 자리잡았는데 기념당내 중간청은 진찰기혁명기념관으로서 풍부한 혁명렬사사진들과 혁명문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궁금증을 풀지 못한 필자는 렬사기념당에서 또 한번 놀랐다. 기념당 한쪽벽에는 “주문빈동지”라고 밝힌 가운데 렬사의 사진과 략력, 회고담을 적은 글, 당년의 투쟁모습을 반영하는 그림 두장이 설명문과 함께 꾸며져있었으니 말이다. 수백명을 헤아리는 렬사들속에서 기념당의 벽 한모퉁이씩 차지하면서 사진으로 소개된 렬사는 극히 소수인데 주문빈렬사가 그 소수인속에 들어있었으니 그때 받은 충격은 근 2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화북렬사릉원 기념당 벽 한모퉁이에 꾸며진 주문빈 관련 소개   /1999년 5월 현지촬영

기념당에 이어 700여명 선렬들의 골회를 모신 기념당 동쪽의 렬사골회안치실과 서쪽의 렬사유상실(遗像室), 기념당앞 광장 동서량측에 일어선 원 홍5군단 군단장 동진당과 홍5군 부총지휘 조박생렬사의 기념비정(纪念碑亭)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필자는 주문빈렬사에 대한 추적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화북렬사릉원은 굉장하면서도 숙연함을 주는 렬사릉원이였다. 추모광장, 명비당, 렬사묘군체, 렬사기념당, 동진당기념정, 조박생기념정, 국제주의전사들인 베쮼의사릉묘, 커디화의사릉묘, 애드화박사기념비, 빠수의사기념비 등으로 이루어진 이곳 렬사릉원은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로세대 혁명가들이 선후로 릉원을 시찰하고 친필제사를 쓰시여 렬사릉원의 품위가 한결 오르고있었다.

1999년 그때까지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화북렬사릉원을 찾는 사람들이 70여만명에 달하고 100여개 국가와 지구에서 온 외빈들이 렬사릉원을 첨앙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우리 조선족의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도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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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 찾은 주문빈 렬사묘소와 행적에 필자는 진한 흥분과 궁금증을 어이할수 없었다. 그래서 배알을 마치고 렬사릉원 선전교양과를 찾았다. 동승의(董胜义)라고 부르는 중년연구일군이 필자가 연변서 왔다는데 흥취를 가지며 하북성 애국주의교양기지 자료총서의 하나로 된 《화북렬사릉원》이란 책자를 내주었다. 1996년 9월, 하북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이 책자에는 화북군구렬사릉원 소개와 함께 18명 혁명렬사의 략력이 서술되였는데 주문빈렬사도 그 18명 가운데의 한 사람이였다. 주문빈략력에는 앞부분이 이렇게 씌여졌다.

주문빈(1908-1944), 원명 김성호, 조선 평안북도 사람, 1914년에 부친을 따라 통현에 이주한후 중국국적에 가입, 1916년 통현 로하소학교에서 공부, 1922년 로하중학교에 입학, 이 기간에 둘째형 김영호의 영향밑에서 사상이 진보하고 마레주의 기본원리를 학습하기 시작하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후 백색공포하에서도 개인안위를 돌보지 않고 계속 당의 비밀활동을 견지. 선후 5~6명의 당원을 발전시키고 중공로하중학지부를 건립. 지부서기를 맡음. 1928년에 로하중학을 졸업한후 당조직의 배치대로 당의 비밀사업에 나섬.

수건된후 화북렬사릉원내 주문빈 동상  /자료사진

주문빈렬사의 조선에서의 이주와 통현에서의 중소학교시절 략력이다. 연변서 알고있는 렬사의 사적과 시간상 어울렸다. 다만 략력이여서 상세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았을뿐이였다. 내가 이 점을 환기시키자 동선생은 략력에서 좀더 알고있지만 자기들은 당신들 조선족연구가들처럼 그렇게 상세하고도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족연구가들을 찾고싶었는데 잘되였다면서 서로간 련계를 바랐다.

통현이라 함은 북경시 통현을 가리킨다. 오늘의 북경에서 동으로 약 20키로메터를 가게 되면 그제날의 사립로하중학교 옛자리인데 현재는 통현제1중학교로 통한다. 1927년에 통현에서의 첫 중국공산당지부가 이 학교에서 조직되였는데 그 조직자는 다름아닌 조선족 김성호(즉 주문빈)와 그의 형님 김영호였다. 필자가 통현로하중학교 당지부는 통현에서의 첫 중공조직일뿐만아니라 통현일대 혁명활동의 중심이였다고 강조하자 그는 전적인 동감이였다.

그날은 1999년 5월 8일이다. 필자는 그날 동선생과 오랜 지기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주문빈렬사의 생애를 돌이켜보고 궁금증도 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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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가을, 김성호는 화북렬사릉원의 략력이 보여주는것처럼 당조직의 파견으로 북경시 지하당기관에서 비밀사업에 종사하면서 연경대학과 보인대학의 중공당원들을 지도하게 된다. 1933년에는 료녕성 무순탄광으로, 1936년에는 당산에 파견되여 중공당산시위 공위서기(工委书记)를 맡아본다. 이때의 김성호는 언녕 주문빈으로 탈바꿈했다. 개란광산지구의 당산, 조각장 등지는 그의 지도범위였다.

1938년 3월 16일에 주문빈은 선참 조각장탄광대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림서탄광과 당가장탄광, 당산탄광, 마가구탄광에서도 파업투쟁에 궐기하니 탄광로동자들의 파업은 5개 탄광 로동자들의 총파업으로 번져갔다.

수건된후 렬사기념당내 주문빈 관련 사진들과 소개를 참관하고있는 학생들 /자료사진

개란광무국 산하 상기 5개 탄광의 동맹총파업은 50일간이나 지속되다가 로동자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총파업의 승리는 개란 5개 탄광 로동자들의 단결전투의 성과로서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이기도 한 주문빈의 탁월한 조직재능과 기여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국혁명사에서 빛나는 한획을 긋는 수만명 탄광로동자들의 개란대파업을 조선동지 주문빈이 직접 발기하고 지도했다는것은 특히 대서특서할만한 일이다. 이에 필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개란대파업의 소식이 중공중앙 화북군을 통해 모택동주석께 전해지고 모택동주석은 “참 잘 령도했습니다. 로동계급의 각성이 높습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하자 동선생은 머리를 끄떡이면서 주문빈렬사를 통해 조선족의 헌신투쟁정신을 알게 되였다면서 주문빈렬사는 화북렬사릉원에 모셔진 주요지도자의 한분이라고 열을 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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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화제는 주문빈렬사의 발자취를 따라 기동땅으로 옮겨갔다. 개란 5개 탄광 동맹총파업후 주문빈은 선후로 중공기동지위 서기 겸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 주임, 중공기열변구특위 조직부장 등 중책을 짊어지고 기동이란 이 광활한 천지에서 줄기찬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던 1944년 10월 16일, 기열변구특위는 하북성 풍윤현 장장자(张庄子)에서 해당 감조감식회의를 하다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위군(日伪军)놈들에게 포위되였다. 이날밤 회의참가자들인 풍윤, 란현, 천안현의 간부들이 주문빈의 지휘하에 소부대로 나뉘여 남쪽의 리장자쪽으로 전이했으나 이튿날 이른새벽에 또 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리장자이북 가까이 양가포에서 주문빈과 그의 일행은 재차 우세한 적들과 맞다들었다.

우리 전사들이 적들과 피어린 혈전을 벌릴 때 특위기관은 주문빈의 지휘하에 적의 포위를 헤치며 결사적인 전투를 벌리였다. 한편 주문빈은 리도와 함께 전사들의 후퇴를 엄호하며 한개 고지를 차지하고 적 66명이나 쏘아죽인 쾌거를 이룩하였다. 허나 그 찰나 주문빈은 적탄에 머리를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날은 1944년 10월 17일, 희생될 때 주문빈의 나이는 만 36세, 희생지점은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杨家铺)!

시초 화북렬사릉원에서 주문빈묘소를 알게 된후 궁금증은 점차 풀리였으니 주문빈은 희생된후 당조직과 동지들에 의해 풍운현 양가포 전모산아래 한 소나무곁에 묻히였다. 그러나 주문빈은 화북대지의 주요한 당지도자였다. 그래서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석가장시 원 승리공원에 준공된후 주문빈렬사의 묘소는 석가장시 화북군구렬사릉원에 모셔졌던것이다. 벌써 반세기나 되는 력사속의 이장이였다.

화북렬사릉원 정문가에 세워진 안내비에서 필자 /1999년 5월 현지촬영

필자는 동선생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의 배웅밑에 렬사릉원 추모광장에 다시 나섰다. 나의 시야에는 1996년 5월 이후 렬사릉원내에 새로 일떠섰다는 웅장한 렬사기념비가 안겨들었다. 렬사기념비를 바라보면서 필자가 감회에 젖어들자 동선생은 1996년 이후 릉원내에는 또 혁명문물청, 영시청(影视厅)이 새로 일떠서고 명비당도 새롭게 수선되였다고 열정스레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옹근 10년이 지난 2009년 8월 15일, 하북성과 산서성 접경지대에 위치한 태항산항일근거지 전면답사차 석가장에 들려 화북렬사릉원을 다시 찾아보았다. 헌데 화북렬사릉원은 입구내와 주변을 대대적으로 수건하는중이여서 제대로 되는 현지답사를 할수가 없었다. 그후 새롭게 변모한 화북렬사릉원을 다시 찾아보지 못하였다.

했으나 세인들앞에 참신한 모습으로 떠오른 화북렬사릉원, 렬사릉원내의 주문빈기념비는 해방직후 1954년에 광동성 광주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세워진 중조인민혈의정과 더불어 중화대지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기념비였다. 2017년 1월 18일 재정리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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