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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되어 평생 나라를 지키다, 김충선(金忠善)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6일 09시59분    조회: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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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이순신 장군 처럼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도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이번 편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장수 '김충선'의 이야기다.

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かとうきよまさ · 加藤清正)의 우선봉장으로 참전하였으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통해 조선에 귀화하였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적을 물리치며 누차 큰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나라를 위해 66세까지 전장에 나가 싸웠다. 선조에게 친히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까지 올라 그 공을 인정받았다.

김충선,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했다. 왜군들은 명나라로 가는 길이니 길을 내달라 했고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중화의 본가를 치겠다는데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응할 리 없었다. 당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とよとみひでよし · 豊臣秀吉)는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대륙 침략전쟁을 명했다. 동아시아 전체의 맹주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뎃포(てっぽう)'(중국에서는 '조총'이라고 부름) 신무기를 앞세운 3천여 명의 왜군은 거침없이 몰려들었고, 칼과 창을 내세운 조선군은 신무기를 당해낼 수 없어 부산진은 함락되었다. 침략자들의 선봉에는 조총부대의 대장, 사야가(沙也可)가 있었다. 그런데 부산진 함락 후 그 공포의 인물은 몇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얼마 후, 한 과묵한 장수의 명령 아래 이번에는 조선군이 조총을 들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공세에 왜군은 당황했다.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몰고나가 왜적이 점령한 18개 지역의 성을 탈환했다. 훗날 사람들은 말없이 조선군을 이끌던 장수, 베일에 싸였던 그 인물이 바로 홀연히 사라졌던 스물두 살, 일본의 사무라이 사야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이름이 김충선이라는 것 역시 밝혀졌다.
일본인 사야가, 그의 행적
당시 사야가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 사야가 가문도 일본에서 사라졌다. 그의 글이 실린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도 사야가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나와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사야가의 과거를 복원하려 나섰다. 그 결과 두 인물로 좁혀졌다. 스즈키 마고이치 또는 하라다 노부타네, 이들은 임진왜란 출전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인물들이다.
김충선의 시문집 <모하당문집>. 1798년(정조 22) 6대손 한조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842년(헌종 8) 중간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스즈키 마고이치라는 주장은 사야가가 조총 전문가였다는 단서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쏘는 철포부대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와카야마(わかやま · 和歌山) 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부대가 전국적으로 위력을 떨쳤는데 그 조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초토화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히데요시의 지배에 반발하는 영주와 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이카 부대의 대장이 스즈키 마고이치, 바로 사야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는 출정 이후 행방불명됐다.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주장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인연이 드러난다. 일본의 전통가문인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강압적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인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 예속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토 기요마사를 원수로 여겼을 것이고,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임진왜란을 명분없는 전쟁으로 보았다. 그리고 왜군들이 무고한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을 보고 큰 회의를 느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사야가는 전쟁중에 본인의 목숨보다 부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늙은 부모를 등에 업고 도망치는 조선인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5백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조선인 편에 선다.

조선에 귀화해서 싸우겠다는 적장의 편지를 받은 병마절도사 박진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사야가는 왜군들에게서 가져온 조총으로 조선군을 훈련시켜 조총부대를 만들었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관군을 격려하면서 한편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의병들을 끌어들여 부대를 새롭게 훈련시켰다. 초총의 사용법뿐 아니라 조총과 화약의 제조기술을 전수했다.
김충선이 쓰던 조총 /김영훈 기자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듬해 조선군이 왜군의 조총을 모방해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일본의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의 군사들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졌다. 거기에는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항왜(항복한 왜인)의 역할이 컸다. 김충선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40명이 넘는 항왜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사야가는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곳곳에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로 일본군을 놀라게 했다. 경상도의 의병들과 힘을 합쳐 경주의 이견대 선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과거 자신을 지휘했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군대를 섬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사야가가 있었다. 사야가가 이끄는 군사들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연달아 승전보를 전해오자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다.


1598년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사야가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내렸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로운 이름은 '김충선'.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는 의미를 담아 김씨 성을 주었고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본관을 김해(金海)로 하였다.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加)에 모래(沙)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착상한 선조의 기발한 작명이었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 하여 충선(忠善)이라 하였다. (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승정원일기>는 젊은 장수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담력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공손하고 삼간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며 살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서른 살의 김충선은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녹촌(오늘날의 대구 달성국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했다. 임진왜란 후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김충선은 1603년부터 10년 동안 자원하여 북방의 국경을 지켰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이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했던 항왜 자손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군사를 모아 후금의 군대에 맞서 적군 50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우의 대의도 끝났구나" 대성통곡하며 다시 녹촌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그에게 오늘날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헌대부를 하사했다. 평안히 살라며 논밭도 내려주었지만 그는 백성 된 도리를 했을 뿐이라며 사양하고 평생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조선에 온 지 50년이 흐른 72세에, 제2의 고향인 조선땅에 묻혔다.
 
영웅과 역적 사이,  
인도주의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충선의 존재

조선인 김충선, 일본인 사야가. 두 이름은 모두 일본 역사에서 지워졌다. 일본의 입장에서 사야가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이자 반역자, 매국노 였다. 일제 사학자들은 김충선이 조선이 만든 허구 인물이라고 했다. 지워진 이름이 복원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김충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녹동서원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김충선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에는 동시에 한국과 일본이 교과서에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를 실었다. 2012년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옆에 '한일 우호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본 관광객이 대구에 가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녹동서원 한·일 우호관' 조감도 /조선 DB
 

김충선, 더 몰랐던 이야기

조선시대 '항왜'들의 활약
김충선은 권율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 왜군의 목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의 군수품을 탈취해 왔으며, 더군다나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100여명을 귀순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조선 정부의 왜군에 대한 귀화 및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 같은 항왜들의 공훈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위에서 본 사야가의 언급내용이 기록된 11월 22일(기유)자에도 "항왜 손시로(孫時老)가 전투에서 역전하다가 탄환을 맞아 생명이 위태로우니 별도로 시상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 왜적의 머리 12급과 빼앗은 잡물은 항왜들이 모두 스스로 가지고 올라가기를 원하므로, 요구대로 줘서 올려 보낸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어 항왜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참고=한국콘텐츠진흥원)
 

마음 속으론 슬픔 안고, 후손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묻어난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술회가·述懷歌)"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南風有感)…"

그같은 설움 탓에 오히려 후손에게 더더욱 고향 이야기를 삼갔을 거란 추측이 많다. 장남 경원(敬元)은 아버지 행장에서 "매양 선대의 제삿날을 당하면 종일 눈물을 흘리시고 남풍이 불면 의대를 풀고 남을 향해 길게 한숨지어 탄식하고 때로 눈물지으셨다"고 적었다. 또 "형제 8인중 가장 끝이라 남들이 형제가 많음을 보면 눈물을 흘려 부러워하셨다"고 했다. 

김충선이 되고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떨치지 못한 그는 술회가를 이렇게 끝맺는다. "국가에 불충(不忠)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 하나뿐인가 하노라"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충선, 전 생(生)을 바친 호국(護國)

 

김충선, 후대의 이야기

후손 김상보 종친회장

"한반도에서 일본인 시조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것이다. 후손은 11개 파로 7500명쯤 된다. 김치열 전 내무장관도 우리 문중이다."

최보식 기자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에서 소개된 김상보(68) 종친회장은 김충선의 12세손이다. 한일 우호관 건립을 추진해왔던 김상보 씨는 "한일 양국이 이제 갈등과 증오의 역사를 씻고 새로운 우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선조 김충선과 한일 우호관이라는 건물이 양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일본 입장에서 김충선은 '역적' '매국노'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는 질문에 "1997년 일본 NHK는 '출병에 대의(大義) 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 돌린 사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무사의 의로운 결단,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거부한 인도주의자, 일본의 양심 등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 김충선은 특히 일본 쪽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대구 달성 우록리 마을
녹동서원, 한·일우호관, 신도비, 유적비…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안쪽으로 김충선을 시조로 한 '사성(賜姓) 김씨' 집성촌이 있다. 마을 입구에 황금색 복고양이 상(像)과 함께 '한일우호관'이 서있다. 문을 연 지 4년이 됐다.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 일본 정계와 학계 인사들의 필수 방문코스다.

 


녹동서원
1789년(정조 13)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하였던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885년 다시 지었고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사당인 녹동사(鹿洞祠)와 향양문, 유적비, 신도비 등이 있으며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

- 위치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
- 문의 : 053-767-5770 / http://culture.dalseong.daegu.kr

조선일보

대구시와 '모하당 기념사업회'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옆에 건립한 모하당 김충선 기념관인 충절관 /이재우 기자
 
김충선의 무덤.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소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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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산강 유역 드넓은 평야를 다스린 5세기 말 6세기 초 마한 토착세력의 지도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정촌고분의 피장자는 40대 여성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발굴된 인골을 분석해 복원한 얼굴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영산강 유역 다시벌(평야)을 다스리던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지도자는 ...
  • 20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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