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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마을 새마을-3] 한왕(罕王)의 선봉관(先鋒官) 박씨와 그의 마을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7월20일 10시03분    조회: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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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박씨의 선조는 일찍 청나라 군대를 따라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섰다. 만주 8기(八旗)의 정백기(正白旗) 일원이었으며 또 선봉관을 담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참고로 정백기는 한왕(罕王) 누르하치가 처음으로 설립, 기(旗)에는 왕이 없었고 병사는 황제의 친병이었다.

  선봉관으로 선견부대의 장령은 험지에서 늘 앞장에 서야 했다. 실제 박씨의 선조는 전장에서 중상을 입은 적 있다고 박동립(朴東立, 80세) 옹이 가족의 전설을 전했다.

  "청나라가 북경에 도읍을 세운 후 선조님은 교구의 향하(香河)에 정착했다고 하지요."

  이때부터 박씨 족보의 첫 머리는 "대청조내무부정백기구갑화호(大淸朝內務部正白旗九甲花戶)"로 되어 후손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옹정(擁正, 1723~1735) 연간 박충문(朴忠文)과 그의 동생 박종문(朴宗文)이 10여명의 가족과 함께 당산(唐山) 동쪽 근교의 야리촌(冶里村)에 이주했다고 박동립 옹이 마을의 향토지에 저술하고 있었다.

당산 야리촌의 마을 입구, 여느 한족마을과 다름이 없는 풍경이다.

  박동립 옹과 그의 형 박동성(朴東成, 89세) 옹을 촌민의 안내로 만났다. 박동립 옹은 야리촌의 전 촌장이었고 박동성 옹은 마을 박씨의 최고의 연장자라고 했다.

  박씨네 두 형제는 야리촌에 정착한 박충문을 하나같이 일곱째 조부(七太爺)라고 부르고 있었다. 야리촌의 박씨는 모두 박충문의 후대이며 여덟째 조부인 박종문은 후손이 없다는 것이다.

  "그분들은 모두 여덟 형제였다고 전하는데요, 다른 여섯 형제는 산해관 북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박씨 가족에 구전하는데 따르면 박충문 형제의 선조는 요녕성(遼寧省) 지역에서 만주 8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여섯 형제가 실은 옛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는 설이 나올 법 한다. 요녕성의 일부 지역에는 박가구(朴家溝), 박보(朴堡) 등 옛 박씨 마을이 잔존한다. 마침 시기적으로 박충문 형제의 선조가 만주 8기에 편입되었던 그 무렵에 생긴 마을이다. 이런 박씨 마을의 선인은 대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의 조선인 포로로 구성되었으며 내무부 포의(包衣, 노복)로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하북성 여러 마을 박씨의 선조가 동일한지는 고증할 길 없다고 1990년대의 《하북성지(河北省志)》가 밝히고 있다. 아무튼 야리촌처럼 하북성의 여러 마을에 집거하거나 잡거하는 박씨의 선조는 모두 청나라 군대를 따라 산해관을 넘어섰다고 유전되고 있다.

  정작 다른 박씨의 마을이 하북성의 북부 지역에 여럿이나 있다는 사실은 1986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박동성 옹이 말하고 있었다.

  "지방 신문에서 승덕(承德) 당패진(党壩鎭)의 박가원(朴家院) 마을 이름을 읽고 그들에게 편지로 연락을 했지요."

  박가원은 또 부근 평천현(平泉縣) 칠구진(七溝鎭)의 마을 박장자(朴杖子)에 살고 있는 박씨와 함께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 두 마을의 박씨는 마을 이름이 달라도 동일한 선조를 삼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때 박동성 옹은 그들에게 대물림으로 전하는 돌림자를 받게 되었다. 이 돌림자는 차례로 "세문천준용/광수청점창/수준방걸서/경흥의옥상(世文天俊勇/廣修淸占昌/樹俊芳傑瑞/景興義玉祥)" 등 20자였다.

마을의 연장자 박동성 옹이 박씨 가족의 돌림자를 글로 적고 있다.

  정말로 박씨의 선조가 그의 후손에게 내린 천운이었을까, 박동성 옹은 박씨의 이 돌림자에서 그들의 뿌리가 실은 평천의 박씨 마을과 같다는 실오리 같은 단서를 찾았다.

  "글자돌림을 보세요. 일곱째 조부 형제의 이름자에 있는 '문(文)'이 두 번째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비록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박동성 옹은 아직도 자못 흥분된 모습이었다. 이 20자 돌림자라면 야리촌의 박동성 옹도 돌림자를 전했던 박가원의 박준창(朴俊昌)과 같은 항렬의 10대손이 된다.

  야리촌의 박씨는 일곱째 조부 박충문을 시조로 삼은 후 5대손까지 글자돌림을 사용했다. 그러나 5대손의 이 다섯 글자의 글자돌림은 박가원에 전하는 20자 돌림자에 있지 않았다. 또 박가원의 박씨 역시 황제기 직접 통솔하던 친병이었지만 야리의 박씨와 달리 양황기(攘黃旗)라고 전하고 있었다. 박충문의 두 형제 이름자는 20자 돌림자의 글월 '문(文)'과 우연히 합치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글자돌림마저 5대 후 야리촌 박씨의 집안끼리 각각 만들어졌다고 박동성 옹이 말했다.

  그래서일까, 3백년 후 만난 야리촌과 박가원 두 마을의 박씨는 이때 족명(族名)도 서로 달랐다. 박가원의 박씨는 만족이었으며 야리촌의 박씨는 조선족으로 되고 있었다. 박동성 옹은 실은 야리촌의 박씨도 모두 만주 8기에 소속된 선조를 따라 시초에는 족명을 만족으로 썼다고 말했다. "일본이 중국을 강점하던 그 시기에는 또 한족이라고 밝혔지요. 만족이라고 말하면 그 무슨 피해를 입을 지 두려워서 노인들이 족명을 바꿨다고 합니다."

  1986년, 하북성에서 민족 족명을 확인할 때 야리촌의 박씨는 조선족으로 개명되었다.

  "우리의 원적(原籍)은 조선반도 신라의 조선족(인)이지요. 그때 비로소 진실한 족명을 찾은 거지요."

  박동립 옹은 신라의 옛(시조) 국왕의 성씨가 바로 그들의 박씨라는 걸 알고 있다고 거듭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야리촌의 박씨가 하북성 박씨 마을의 최초의 조선족 박씨는 아니었다. 일찍 공화국의 창립 초기, 청룡현(靑龍縣)의 박씨는 민족을 식별할 때 이미 조선족으로 인정되고 있었다고 《하북성지(河北省志)》가 전하고 있다.

  사실상 박씨의 선조가 야리촌으로 이주할 무렵 하북성 북부의 천진(天津)에서 거부로 있던 안기(安岐, 1683~?)는 그때부터 벌써 조선인(족) 신분으로 세간에 전하고 있었다. 안기는 소금 장사를 하여 돈을 모았으며 중국 최대의 서화 수장가로 되었다. 그가 수장했던 서화에는 '조선인', '안기의 인감' 등이 찍혀있어 그의 족명을 명백하게 알리고 있다. 유감스럽게 안기는 생애 후반에 가문이 기울면서 그의 후손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있다. 박씨처럼 조선반도 고유의 특이한 성씨가 아닌 연유라고 하겠다. 만일 안기의 후손이 존속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족명도 박씨처럼 조선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야리촌의 박씨는 정착한 후 지금까지 13대 존속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제일 높은 항렬의 박씨는 8대손이었다. 박동성 옹과 박동립 옹 형제는 그 뒤를 이은 9대손이었다. 야리촌에는 1천여 가구, 3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와중에 박씨 가족은 106가구, 413명이며 조선족 혈통의 인구는 기타 성씨의 며느리 등을 제외한 300여명이라고 박동립 옹이 밝혔다.

1980년대의 박동성 옹의 가족사진, 아내와 며느리를 제외하고 본인과 아들 그리고 손자손녀는 전부 조선족으로 되어 있다.

  "조선족이라고 예전에는 양점(糧店, 쌀가게)에서 달마다 인당 쌀 몇 근과 콩기름 한두 근을 더 배급했지요." 박동성 옹이 이렇게 동생 박동립 옹의 말을 곁들였다.

  1730년을 전후하여 박충문과 박종문 형제는 가족을 데리고 야리촌에 이주했다. 이에 앞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강희(康熙, 1662~1722) 연간 박씨는 관가의 아속(衙屬)과 말다툼을 벌리다가 부(府)의 행정장관인 지부(知府)를 파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느 가을날, 지부의 부인이 박씨 과수원을 노닐었다고 한다. 그는 황실의 특혜를 받는 박씨를 시샘, 노복을 시켜 일부러 과수를 훼손했다. 부인은 또 과수원의 주인인 박씨를 면전에서 모욕했다. 이 일은 나중에 강희 황제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황제의 유모가 바로 박씨 가문의 여인이었던 것. 이 유모 훗날 칙지에 의해 '봉성부인(奉聖夫人)'이라고 불린 모모한 인물이다. 결국 그 지부는 강희 황제에게 면직되어 일개 서민으로 되었다고 한다.

  종국적으로 이 사건은 박씨는 지부 등과 암투를 벌이게 된 듯하다. 미구에 박충문 형제는 부득불 도읍인 북경성을 떠나는데, 이는 원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박씨의 후세에 전하고 있었다.

기자를 배웅하는 박씨 형제, 앞 인물이 박동성 옹이며 뒷 인물이 박동립 옹이다.

  선조가 정착한 야리촌은 산을 등에 두고 강을 끼고 있으며 땅이 기름지다고 박동립 옹이 입 마르게 자랑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양식으로 쓰는 쌀이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양미장(糧米庄)'이라고 불렸다고 하지요."

  이에 따르면 야리촌의 이름은 실은 제철업이 아닌 쌀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씨의 시조 박충문 가족은 야리촌 부근에 수백 정보의 땅을 보유한 큰 지주였다. 비록 북경 교구의 향하처럼 벌판에 말을 달려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세우지 못했지만, 해가 저물기 전에 길을 다우치려면 박씨네 땅에 있는 우도(牛道)를 재촉해야 했다고 항간에서 전하고 있었다. 야리촌 주변의 "남해연(南海沿)과 북해투(北海套), 주장자(周庄子), 대석교(大石橋), 장업장(張業庄)"의 땅은 전부 박씨 가족의 소유였다고 전한다.

  "일곱째 조부님은 또 해마다 향하에 가서 소유지의 곡물을 챙겨 왔다고 합니다."

  잠깐, 향하로 가는 옛 역마 길에는 고려포(高麗浦)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연행록(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을이다. 당산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는데 야리촌과 불과 50리 정도 상거한다. 그곳은 "병자호란 후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끼리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라고 《열하일기》는 전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하일기》의 저자는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으로 역시 박씨 성이다. 박지원의 기록에 따르면 "산해관 동쪽 천여 리에 걸쳐 논이라곤 없더니 홀로 이 땅에만 벼를 심고 있으며 떡과 엿은 본국 조선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역마 길 부근의 국도에 있는 고려촌 촌민위원회 청사.

  연행록에 특별히 고려포가 등장하는 것은 사행단(使行團)마다 이곳에 숙박을 했기 때문이다. 고려포에는 '고려역참'이 있었는데 "본채에 기둥이 다섯 개요, 동서 곁채에 기둥이 열 개"였으며 또 "사당 한 채, 관공서 한 채"가 있었다고 《풍윤현지(淸•豊潤縣志》가 전하고 있다. 기실 고려포는 명(明)나라 융경(隆慶, 1567~1572) 연간에 벌써 '고려포보(高麗浦堡)'로 정식 명명했다. 이에 앞서 당(唐)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동정(東征)할 때 연도에 역참과 점포를 두었으며 고려포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지명 유래를 조사했던 풍윤현의 관원 왕덕성(王德成) 씨의 말에 따르면 당나라 조정이 이곳에 구역을 정하고 고구려인이 사용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당산 근처의 박씨 선조가 고려포거나 고려포의 사행단과 왕래를 했다는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박동립 옹과 박동성 옹도 이 이야기가 나오자 하나처럼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당산 부근의 마을이라서 이름을 자주 들었지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처음인데요."

  미상불 조선족이라는 족명도 이처럼 박씨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야리촌의 박씨는 언어는 물론 민족문화나 민속, 생활습관이 현지의 한족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다만 박씨 동성은 결혼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이 있을 뿐이었다.

  1791년 사행단에 나섰던 남연(南燕) 김정중(金正中)이 그의 《연행록》의 글줄에 남긴 애달픈 감회가 가슴에 물큰 젖어 오른다.

"…아아, 너희 조상들이 포로로 잡혀 이곳으로 들어온 환란이 없었던들 너희의 관대(冠帶)도 내내 우리들 일행과 같았을 것이다. 한번 잡혀온 뒤로부터는 후손이 전부 호인(胡人)의 말이요, 얼굴이니 슬프다. 그러나 한 마을을 이뤄 옛 나라의 이름을 잃지 않았으니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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