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인 돈된다”… 아이-여자까지 새끼줄로 목 묶어 끌고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9월11일 10시11분    조회:155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0> 
10화: 조선인 노예사냥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나고야성 일대를 묘사한 ‘히젠나고야성도병풍(肥前名護屋城圖屛風·나고야성박물관 소장)’ 그림(왼쪽)과 현재의 나고야성 일대(오른쪽). 왜군들의 조선 침략 사령부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牛馬)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행태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때였다. 

조선은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이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으로 사람 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특히 사람 장사는 최고의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이었다. 전쟁 이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 가 평생토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전쟁 도시인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은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조선인 노예들의 고혈로 흥청거린 군사도시  

130여 개의 다이묘 진영들이 들어서 있던 나고야 성터. 사가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기자는 지난주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의 나고야성(아이치 현의 나고야성과 구별해 히젠나고야성이라고도 함)을 찾았다. 가라쓰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인 ‘당(唐)’으로 가는 ‘나루(津)’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대륙을 오가는 항구였다.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해로로 278km 남짓이다. 왜군의 출병 거점지이자 전선 사령부인 나고야성이 세워진 배경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불과 5개월 만에 이 성을 완성했다. 면적은 약 17만 m². 히데요시가 평생의 역작으로 지은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크기였다. 그는 전쟁 초기에 나고야성 천수각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렸다. 성 주변의 반경 3km 내는 일본 각지에서 차출된 다이묘(大名·영주)들의 진영으로 북적거렸다. 다이묘들은 이곳에서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치러 가고, 이곳으로 귀환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20만 병력이 나고야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 터에는 성벽과 토루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나고야성에서 나고야포(만)로 이어지는 바다까지의 들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인구 10만을 넘어서는 군사도시가 형성됐다. 조선에서 비참한 살육과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황금다실(黃金茶室)에서 금으로 된 찻잔에 따른 차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 성내에서는 일본 전통의 가면극 노(能)와 노래 렌가(連歌)가 공연되는 등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까지 개입한 국제 노예거래 

16세기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 선교사, 일본인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담은 ‘남만병풍(南蠻屛風)’.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 데는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했다.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부러 현지에 인매선(人買船·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이다.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돼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이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돈이 되는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나의 세계 일주기’)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그림 속 모델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등 여러 이설도 있다). 

동포를 상대로 총칼을 들어야했던 조선 청년들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끌려간 민간인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사로잡힘을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군은 피로인을 병력 보충용으로도 이용했다. 주로 남자아이나 젊은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모국의 군사들과 싸울 정예병으로 길러졌다.  

“임진·계사(壬辰·癸巳·1592-1593년)에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가 돼 정용(情勇)하고 강한(强悍)하기가 본시 일본군보다 나은데, 정유(丁酉·1597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 온 자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본국(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적고 적국(일본)으로 도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남자로서 전후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月峯海上錄’)

1597년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탐정(探偵)한 사명대사는 “가토의 진영에 15∼16세 되는 나이 젊고 정예한 자는 조선 사람으로 군세가 종전에 온 적과는 다르다”고 하며 “일본 대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정유재란 시기에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 이성현(李聖賢·우계이씨 족보에는 慶寶로 표기)의 경우다. 이성현은 당시 7세의 나이에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후 그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로 개명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리노이에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조선이씨(朝鮮李氏)로 불리면서 이복남의 혈통을 이어갔다.(‘羽溪李氏 族譜’)

일본 아사히신문 출판국장과 아사히학생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1998년 작고) 씨가 바로 리노이에 가문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찾던 그는 1982년 한국을 찾아 선조들의 사적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에 이용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만에 떠 있던 조선 침략 전선들을 내려다보던 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오른쪽). 왜군들은 조선인을 납치해 히젠나고야성,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와 노예로 팔거나 노비로 부렸다(왼쪽).
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주로 투입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1617년 경상도겸사복(慶尙道兼司僕) 정신도가 피로인 전이생(全以生)의 서한을 소개하는 상소문에서는 “전이생과 같은 처지로 사쓰마(薩摩)에 잡혀 있는 피로인이 3만700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산 지 장차 24년이 되어간다”(‘광해군일기(정초본)’)고 기록되어 있다. 전이생이 밝힌 숫자가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한 지역에만도 3만 명이 넘는 피로인이 있다는 기록은 당시 피랍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피로인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수는 공식적으로 5000∼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가 적은 이유는 일본 측의 비협조, 조선 조정의 어정쩡한 피로인 대우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피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죄인처럼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천민 출신은 돌아온 뒤에도 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귀환한 양반들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자체를 절의(節義)를 잃은 것으로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기자는 나고야 성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봤다. 멀리 만을 낀 바다가 펼쳐졌다. 7주갑(周甲·1갑은 60년으로 420년) 전 조선에서 침탈해온 노예들과 재물을 깔고 앉아 흥청거렸을 도시는 들판으로 변해 한가로워 보였고, 잔잔한 바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나고야 성터에 있는 나고야성박물관은 공식 안내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잘못된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고한 양민의 코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듯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포획해 노예로 팔아넘긴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극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한 표현이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본 내 몇 안 되는 전시 기관 중 한 곳이다. 

동아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08
  • 2019년 경북 경산 소월리에서 출토된 사람 모양 도기 항아리(위). 문화재청은 2019년 발굴된 경북 경산 소월리 출토 ‘사람 얼굴 모양 도기’를 활용한 이모티콘 24종을 최근 공개했다. / 문화재청 제공 ‘무표정인 듯, 심각한 듯, 말하는 듯…. 어찌 보면 뾰로통한 듯, 잔뜩 화난 듯….&rsquo...
  • 2023-02-01
  •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6년 12월의 어느 날, 남한산성에서 급보가 날아듭니다.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짐붙이는 생각지도 말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청풍(淸風)으로 가시오." 발신인은 병자호란 당시 고위 관리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있던 남편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수신인은 그의 아내 남평 조씨(南...
  • 2023-01-11
  • ㆍ휴전선 판문점에서 정북 쪽으로 불과 13㎞ 떨어진 곳에 위치 ㆍ연암은 황해도 금천 연암협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황해북도 장풍군 장풍읍 소속 조선 최고의 기행문 는 황해도의 깊은 산골 ‘연암협’에서 태어났다. 동네 앞에 ‘제비바위(연암·燕巖)’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산골짜기 마...
  • 2022-09-12
  • 청자수집가 주재윤 셀라돈 대표 주재윤(43) ㈜셀라돈 대표는 소년 시절부터 옛것을 좋아했다. 전통을 잃어가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를 지키려다 ‘청자(靑瓷)’의 매력에 깊이 빠졌다. 한때 고고학자가 되길 바랐던 그의 꿈은 영롱한 빛깔로 녹아 청자에 스며들었다. 그는 “도자기는 인연이 있어야 만날 수...
  • 2022-06-15
  • [사이언스카페] 네이처에 투르크어·몽골어·일본어 포함하는 트랜스유라시아어 기원 발표 트랜스유라시아어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지도. 한국어(분홍색)와 일본어(짙은 황색), 투르크어(노란색), 몽골어(연회색), 퉁구스어(진회색) 등 트랜스유라시 어족 언어들이 9000년 전 중국 요하(붉은색)에서 조상 언어...
  • 2021-11-11
  • ‘국새 대군주보’ 등 4점 조선초기 음식조리서 '수운잡방'등 3점도[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2019년 미국에서 환수한 19세기 ‘국새 대군주보’를 보물로 지정했다. 또 1946년 일본에서 환수한 대한제국기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
  • 2021-08-24
  • 한국학중앙연구원, 3만8천여 자료 대공개 1884년 부터 21년간, 한국음악 알리기도[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구한말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기록한 3869여건의 문서가 국민에게 공개된다. 알렌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우)은 이 문서들을 DB로 구...
  • 2021-08-10
  •   길지 찾아 거듭한 이장 풍수에 빠진 어리석음일까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12번의 이장 끝에 경남 하동 화개장터 맞은편 산에 정착한 김종회 전 의원의 증조부모 묘. /김두규 교수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이 든다. 그러나 “도에 관심 있으세요?&rdquo...
  • 2021-07-18
  • 불과 한 세기 반 전만 해도 서양에선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온갖 나라와 교역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과연 한반도는 고대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을 이어준 실크로드와 단절된 채 우물 안 개...
  • 2021-06-11
  • 이순신 장군은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난중일기》를 정독하고 난 뒤에도 장군에 관한 여러 기록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들을 접하게 됐죠. 전쟁이라는 크고도 끔찍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그때야 비로소 보였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문장들은...
  • 2020-09-23
  • 화재 원인 조사중…인명피해는 없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 호성전에서 불이나 20여분 만에 꺼졌다. 이 불로 호성전이 모두 탔다.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연합뉴스20일 오전 1시10분께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 호성전에서 불이 나 20여분 만에 꺼졌다. 이 불로 호성전(45.15㎡)이 모두 탔다. 호성...
  • 2020-08-20
  • [픽댓]히스토리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1년 5개월간 교제한 연인과 결혼 준비를 밟아가던 중 여성의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할아버지는 남성에게 본관을 물었고, 경주 김씨라는 대답을 듣자 버럭 화를 내면서 ‘우리는 서경 정씨라서 혼...
  • 2020-08-10
  • 히스토리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본인인가, 일본의 침략에 희생된 '성녀'인가 명성왕후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뜨거운 인물 중 하나입니다. 18일 막을 연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왕후를 둘러싼 구한말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다룬 작품인데,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명성왕후의...
  • 2020-07-27
  • ‘이순신 장군이 관노(官奴)와 동침했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이후 한 네티즌이 ‘이순신 장군도 관노와 잠자리를 했다’고 주장한 뒤 ‘시청 공무원을 조선시대 노비에 견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4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의 ...
  • 2020-07-20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한 김덕령 장군에게는 왜적과의 싸움 외에도 유명한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장인이 도망간 노비들을 잡으러 갔다가 살해됐다는 사연을 듣고는 신혼 첫날밤 홀로 쇠방망이를 들고 노비들의 은신처로 찾아가 복수를 합니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장모에게 가져다줬으니, ...
  • 2020-06-29
  •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 숙종의 카리스마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숙종으로 변신했던 배우 유아인(왼쪽)과 숙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불에 탄 초상화의 부분. “원자는 적통을 이은 대군입니다. 원자를 살려놓으신다면 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게 ...
  • 2020-05-09
  • [처용가] 역신이 아내 옆에 누운 모습 본 처용, 도망치지 않고 춤과 노래로 몰아내 이후 신라서 역병 막는 곡으로 불려 집단 노래 중 가장 오래 된 '구지가' 가야 백성들 구지봉서 노래 부르니 하늘서 황금알 내려와 수로왕 탄생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가운데, 이 위기를 이...
  • 2020-03-24
  • 개성 현화사에 있었던 석등. 현화사는 고려 현종의 ‘불우한 부모’를 추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석등이 반출돼 1911년 일본인 골동품상인 곤도가 조선총독부에 팔아넘긴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북한 땅 개성에 현화사라는 절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물(제139호)인 7층석탑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 2019-10-29
  • 전 신사임당 필 조충도.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여류예술가로서 조선 사대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폐쇄적인 조선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여류예술가도 있다. 바로 율곡 이이(1536~1584)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이다.  고전은 여성을 차별하던 조선 선비들...
  • 2019-10-12
  • 영산강 유역 드넓은 평야를 다스린 5세기 말 6세기 초 마한 토착세력의 지도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정촌고분의 피장자는 40대 여성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발굴된 인골을 분석해 복원한 얼굴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영산강 유역 다시벌(평야)을 다스리던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지도자는 ...
  • 2019-10-10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