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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얏골의 비기(秘記)에 기록된 옛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9월30일 20시47분    조회: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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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꽃길은 동네 어귀의 철제 대문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방정현(方正縣)의 남북을 잇는 도로는 마을에 이른 후 갑자기 꽃의 이야기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어, 이 마을은 길마다 다 꽃이 피는 꽃길이네.” 기사 왕씨가 꽃잎처럼 길가에 탄성을 떨어뜨린다.

철제 대문에서 보는 서광촌의 일각.

  일행은 현성을 떠나 몇 십리를 달리면서 처음으로 꽃마을을 만나고 있었다. 동명(同名)의 서광촌(曙光村)은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여럿 되지만, 꽃의 마을로는 방정현의 이 서광촌이 유일하지 않을지 한다. 참고로 새벽의 동이 터오는 빛의 서광은 공화국 창건 직후 중국에서 나타난 특유한 지명으로 전국적으로 무려 199개나 된다는 통계가 있다.

마을의 꽃길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유승빈 촌장.

  이름처럼 방정현의 서광촌은 언제부터인가 꿈의 마을로 비추고 있었다. 논농사가 잘 되었고 이에 따라 촌민들의 공수(工値)가 유달리 높았다고 전한다. 공수는 작업량과 노동의 보수를 계산하는 임금점수이다.

  촌장 유승빈(柳胜彬, 1956년생)은 이 때문에 서광에 일부러 이사했다고 밝힌다. “공수가 1공(수)에) 2원 80전이었는데요, 다른 마을에서는 이에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서광촌 마을설립 80주년 기념축제의 일부.

  그때는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이 76전, 입쌀 한 근의 가격이 14전이던 1975년이었다. 시골에서는 정말 꿈과 같은 세상이었다. 유승빈의 부친은 이웃한 연수현(延壽縣)에서 서광촌에 매혹되어 백사불구하고 이주를 단행했다. 사실상 연수현도 흑룡강성에서는 벼농사로는 아주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 무렵 이홍규(李洪奎, 1960년 출생)는 초중을 졸업하고 있었다. 서광 마을에는 조선족학교가 있었다. 소학교가 있었고 중학교가 있었다. 한때는 지어 고중도 있었다. 서광촌의 학교가 남달리 유명한 것은 이주민과 연관이 있다고 이홍규가 말한다.

  “남천문(南天門)의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이주하면서 학교가 더 커졌지요. 학교의 김석일(金錫日) 선생님이 말씀하시던데요, 방정현조선족학교도 그 무렵 이민과 함께 옮겨왔다고 합니다.”

  김석일은 연변 태생으로 1950년대 말 하얼빈사범전문대를 졸업하고 당시 남천문에 있던 방정현조선족중학교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남천문은 이름처럼 하늘의 천계(天界)에 있는 고장은 아니다. 서광촌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방정현에서 조선족이 제일 많은 고장은 시초에 서광촌이 아닌 남천문이었다고 한다. 만선척식회사(滿鮮拓殖會社)의 개척단이 들어서면서 조선족은 한때 몇 천 가구나 되었다고 전한다.

3-2일본개척단 단원이 밭일을 하는 정경.

  먼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만선척식회사는 1936년 8월 조선에 설립된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植株式會社)가 만주국 지점으로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설립, 조선인 이민 사업을 전담한 괴뢰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의 국책회사이다. 만선척식회사에 의해 만주에 이주된 조선 농민의 숫자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25만 명이나 되었다.

  남천문은 마을기슭에 있는 송화강(松花江)의 물을 끌어들여 수전을 풀고 있었다. 워낙 중국인들이 대대손손 살던 땅이었다. 일본 식민지의 2등 국민인 조선인들이 3등 국민인 중국인들의 땅을 빼앗은 형국이 되고 있었다. 8.15 광복 후 조선인이 대거 귀국하면서 남천문의 일부 마을은 비다시피 되었고 논은 폐답이 되어 잡풀이 자랐다.

  1953년, 방정현은 요녕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선족 이민 307가구의 1,740명을 받아 각기 3개 구(區)의 20개 촌에 배치했다. 그 후에도 흑룡강성의 이민계획으로 산동성(山東省) 등 지역의 이민을 여러 번 받아들인다. 남천문에는 다시 조선족들이 대거 나타났고 마을이 또 한 번 일어났다.

  1960년대 초 대륙을 휩쓴 3년 재해 등 원인으로 남천문의 조선족들은 다시 대량 이주를 단행했다.

  이홍규는 은사 김석일이 그때 그 일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외우더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3년 재해 때 배가 너무 고파 혼났다고 하시던데요. 서광대대(大隊, 촌)에 온 후 비로소 배고픔이라는 걸 모르게 되었다고 해요”

  그 무렵 한귀택(韓貴澤, 1928년 출생)은 이주가 아닌 하방(下放)으로 서광대대에 내려갔고 또 생산대(生産隊, 촌민소조) 대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하방은 중국말 어휘로 간부, 인텔리가 공장이나 농촌에 가서 기층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한귀택은 일찍 왜정시대(倭政時代) 일본의 사도(師道) 전문대학에서 공부했던 고급 인텔리였다. 이 경력 때문에 문화대혁명 때는 여러 번 투쟁을 받아야 했고 또 이 경력 때문에 학교의 일어교원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가 평반(平反), 즉 재평가를 받아 공직에서 회복된 건 오랜 훗날의 이야기이다.

  이홍규의 가족은 이보다 앞서 1950년대 초 벌써 서광대대에서 살고 있었다. 부친 이두섭(李斗燮, 1925년 출생)은 이웃한 태평산툰(太平山屯)에 살다가 땅이 넓고 물이 좋은 서광 마을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사한 첫해에 논을 세 정보 풀었는데 그때 벌써 풍작을 거뒀다고 한다. 부근의 조선인(족)들이 기어이 서광으로 줄레줄레 찾아온 원인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앞뒤가 잘못 된 것 같다. 서광대대는 1961년 설립되었으며 광명과 서광 등 3개 소대로 나뉘고 있었다. 기실 이홍규의 가족이 이사를 하던 그때는 마을 이름이 아직 동트는 서광이 아니었다.

2000년 터밭의 오얏나무 아래에서 손녀와 외손녀와 함께 있는 이두섭.

  이홍규는 원체 오얏골이라는 의미의 이화툰(李花屯)이라고 불렸다고 말한다. “마을에 오얏나무가 많이 자랐습니다. 우리 집의 뜰에도 오얏나무가 두 그루 자라고 있었지요.”

  오얏은 옛날의 이름으로 학명은 ‘자도(紫桃)’이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오얏은 고려시대 서운관(書雲觀)의 비기(秘記)에 기록되고 있는 열매이다. 책에는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 고려왕이 크게 걱정하여 한양의 삼각산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면 오얏나무를 베기 위해 벌리사(伐李史)를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와 함께 번리(樊里)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훗날 서울 강북구에 번동(樊洞)의 지명유래가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방정현 오얏골은 조선을 개국한 이씨가 ‘도읍’을 한 게 아니다. 1936년 윤기술(尹基術) 등 조선인 농부 여덟 가구가 이곳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다고 한다. 그들이 어떻게 되어 조선반도에서 대륙 흑토의 이 오지까지 흘러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세대의 이민이 모두 이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두섭처럼 가세(家勢)가 기울어서 부득불 두만강을 건넜을까… 이씨는 강원도 춘천군에서 살았으며 전주 이씨의 덕양군파에 속하는 양반가문이었다고 전한다. 이두섭의 큰형은 1939년 먼저 태평산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선인 농부들이 세운 ‘도읍지’에는 뒤미처 일본인들이 들이닥쳤다. 1940년 초, 일본 나가노겐(長野縣), 시노가와(信農川)에서 진출한 일본 만주개척단은 남쪽의 연수현(延壽縣) 중화진(中和鎭) 태평툰(太平屯) 부근으로부터 방정현 이화툰까지 제1호툰, 제2호툰의 순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화툰 부근에는 개척단의 본부가 있었다고 한다. 《방정인민혁명투쟁사》(2005)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방정현에 도합 1,291가구의 4,828명에 달하는 6개의 개척단을 보냈다. ‘만주개척단’은 일본 군부측의 설법이지 실은 인구성장으로 ‘실력의 배식(培植)’ 즉 만주의 전적인 통치를 실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야기가 또 다른 데로 잘못 흘렀다. 1943년, 양주하(亮珠河)의 상류에 보를 쌓으면서 이화툰은 강 이름처럼 진주가 나는 곳으로 되었다. 마을은 벼농사의 좋은 고장으로 소문을 놓는다. 뒷이야기이지만, 1969년 서광의 쌀은 북경까지 상경하여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들의 밥상에 오르는 영예를 지닌다.

  “다른 마을에서 한 근에 1원 50전 할 때 우리 쌀은 2원 20전이나 했습니다.” 유승빈이 자랑하듯 하는 말이다.

  마을에 안착하면 선민(先民)들은 무엇보다 꼭 서당을 세웠다. “논을 팔고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백의겨레이다. 마을이 서면 잇따라 학교가 섰고, 학당에 글소리가 울리면서 뒤미처 마을이 커졌다.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이화툰에는 벌써 소학교가 생겼다. 학교는 공화국이 창건된 1949년 무렵 동네방네 이름난 학교로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미구에 이화툰도 방정현에서 제일 큰 조선족 마을로 거듭난다.

  “우리 가족은 조선인이 집거하는 마을에서 살면서 공부도 시키려고 이화툰에 이주했다고 합니다.”

  김창수(金昌洙, 1933년 출생)는 1950년 일부러 이화툰으로 이삿짐을 챙겼다. 조선족이 모여 있는 마을에서 살고 싶었고 또 자식들에게 우리말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 김제열(金濟烈)은 9.18 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 방정 현성에 이주, 방정의 흔치 않는 초기 조선인 이민의 한 사람이다.

  김씨의 고향이 평안북도 박천군이라면 이씨는 강원도 춘천군이었고 한씨는 또 경기도 수원이었다. 이화툰에는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조선반도 여러 도의 사람들이 집대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화툰은 서광대대로 개명하던 1961년에는 210가구의 1,260명 인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선족 인구가 많은 만큼 교육열이 높았다. 1964년, 서광에 방정현 조선족중학교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은 이유가 있었다. 1970년대에는 소학교와 초중을 이어 고중까지 생겼다. 종국적으로 마을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근무한 교원 96명, 배출한 대학생 126명의 경이로운 성적표를 올린다. 와중에 이홍규의 오누이는 1978년 둘이 함께 대학에 입학하는 뉴스를 만들었다.

  “우리 서광촌은 방정현에 소문을 놓은 ‘대학생마을’이지요.” 유승빈의 어조에는 촌민과 촌장으로서의 긍지가 듬뿍 담겨있었다.

  2016년 추석, 서광촌은 마을설립 80년 축제를 개최했다. 방방방곡에서 많은 사람들의 고향을 찾아왔다. 와중에는 신문사의 사장, 작가협회의 회장, 유명한 학자와 기업인이 있었다. 말 그대로 서광촌의 하늘가에는 동이 트고 또 구중천에는 꽃노을이 비끼고 있었다.

  하필이면 서광촌의 시원으로 되는 그 오얏나무는 문득 사라지고 있었다. 1980년대 마을에서 느닷없이 생긴 이상한 현상이었다. 정말로 사람이 떠나면 그가 심은 나무도 함께 죽는 걸지 모른다. 아무튼 오얏골의 주인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있었고 웬 일인지 오얏도 옛 종적을 잃고 있었다.

여가를 즐기고 있는 서광의 노인들.

  하긴 그럴 법 한다. 그 무렵인 1982년 중국에서는 일명 ‘도거리’라고 하는 가정연대책임제(家庭聯産承包制)가 실시되고 있었다. 뒤이어 도시화와 한국 붐이 일어났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떠나고 있었다. 사람이 줄어들면서 방정의 조선족마을 7개는 최종적으로 4개로 줄어들었다. 마을이 줄어들면서 미구에 학교가 소실되었고, 학교가 소실되면서 결국 마을을 이루던 하나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서광촌의 학교는 유승빈이 제6대 촌장으로 되던 1990년을 전후하여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으며 미구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을에 호적상으로는 아직도 320가구 살고 있는데요, 모두 조선족들입니다.”

  그러나 마을의 인구는 오히려 859명으로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고 유승빈이 밝힌다. 분가(分家) 등으로 가구 호적이 늘어났을 따름이란다. 그나마 실제 살고 있는 사람은 120명 정도이며 또 거개 노인들이었다.

  서광촌은 방정현의 전형적인 논 고장이지만 현재 농사를 짓은 50가구 전부가 다른 지역의 한족이라고 한다.

  “우리 마을에 노인아파트(老人公寓)를 지으려고 합니다. 마을의 촌민들의 노후생활에 편하도록 만들려구요.”

  방정의 ‘민족노인아파트’는 유승빈이 열고 있는 제일 큰 꿈이었다. 민족적으로 깨끗하고 문명한 백의겨레의 성품은 서광에 이 프로젝트를 심는데 알맞다는 것. 더구나 물 좋고 땅 좋으며 공기 좋은 서광은 노인들의 꿈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꽃의 마을은 바로 서광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화단에 피어난 꽃의 향연은 80년 역사의 마을에 꽃의 이름 모를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정작 오얏나무의 옛 이야기는 읽기 힘든 비기(秘記)로 멀어지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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