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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마을 새마을9]'삼태성'을 발로 밟은 철령의 이씨 장군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월4일 10시44분    조회: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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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명(明)나라의 장령 이성량(李成梁)은 남다른 명을 타고 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삼태성'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하게 드러난다. 발을 씻겨주던 시종이 발바닥에 붉은 점이 박혀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어, 장군님의 발바닥에 붉은 점이 세 개 박혀 있는 데요."

  정말로 '삼태성(三台星)'을 발로 밟은 하늘의 무신(武神)이었을까… 이성량은 벼슬이 요동(遼東)의 총병(總兵)이요, 작위가 봉백(封伯)에 이르고 있었다. 무공이 하도 높아 명나라 2백 년 동안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태성'을 발견한 시종에게 느닷없이 액운이 떨어진다. 그가 무심코 땅바닥에 흘린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저의 발바닥에도 붉은 점이 있는데요, 7개나 돼요."

  발바닥에 붉은 점이 7개라니… 전설에 따르면 '북두칠성'을 밟고 있는 건 천자(天子)의 운이 아니던가. 예언을 늦게야 읽은 이성량은 미래의 이 천자를 죽여 버리려고 작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시종은 야음을 타서 도망했다. 미구에 그는 기진해서 숲에서 정신을 잃는데, 추격군이 숲에 불을 질렀다. 시종을 따라온 개가 개울에서 물을 묻힌 후 주인의 주위를 굴러 불을 껐다. 시종이 깨어났을 때 개는 죽고 추격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몸을 덮었으며, 이로 하여 시종은 추격군에 발각되지 않았다. 개와 까마귀가 훗날 만족에게 영물의 대상으로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전한다.

  정말로 '북두칠성을'을 발로 밟은 지상의 천자이었을까… 추격군에 벗어난 이 시종은 나중에 건주(建州) 여진(女眞)의 수령으로 되며, 종국적으로 동북 여진의 각 부락을 통일하고 나라 후금(後金)을 세운다. 청(淸)나라의 초대 황제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소설 같은 옛 이야기이다.

  그러나 '붉은 점'의 이야기는 민간에 유전하는 전설일 뿐이라고 이택면(李澤綿, 1961년 출생)이 거듭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막사에 있던 가정(家丁, 종)이라는 건 확실한데요."

  이성량과 누르하치의 악연도 실제로 있은 일이라는 것. 이성량은 원래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 누르하치를 인질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누르하치의 외조부는 물론 조부와 부친 모두 지휘사(指揮使) 등 건주 여진의 부족 두목이었다.

 

철령의 소툰 부근에 있는 이성량과 그 아들의 무덤, 신도의 석상 등은 새로 보수한 작품이다.

 

  '이성량과 그 가족'의 이야기에 중뿔나게 누르하치를 거드는 것 같다. 누르하치로 하여 '이성량과 그 가족'에게 나중에 액운이 떨어진다고 하면 대충 이해가 될 것 같다.

  이처럼 '이성량과 그 가족'을 이택면이 유달리 숙지하는 사연이 있다. 이택면은 이성량 가족의 시집 등 다수의 전문 서적과 극본을 집필, 출판한 작가이다. 그는 또 요녕성(遼寧省)사학회의 회원이고 그 보다 또 이성량의 14대손이다.

  요녕성 북부의 철령(鐵嶺) 시내에서 이택면을 찾아 만났다. 이성량의 후손들은 철령 동쪽의 소툰(小屯)에서 이씨의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었다. 철령은 '쇠의 고개'라는 이름처럼 금성철벽이라는 의미이다. 정작 '쇠의 고개'는 소툰이 소속했던 최진보향(催陣堡鄕)에 있다. 부근의 강기슭에 고구려의 대표적인 군사요새인 산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1-2 명나라의 명장 이성량의 의관총.

 

  소툰은 그 시기인 당(唐)나라 때의 지명이라는 이택면의 설명이다. 동정(東征)에서 당나라 군대가 둔병(屯兵)을 하면서 이곳에 작은 동네가 생겼다고 한다. 종당에는 둔병을 하던 군인은 사라지고 마을의 이름만 댕그랗게 남았다는 것이다.

  이름이 작은 동네이지 실은 큰 마을이다. 소툰에는 현재 2천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성량의 이씨 성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이성량의 항렬부터 "성(成)여(如)충(忠)조(祖)정(廷)/덕(德)경(景)문(文)광(光)영(永)/심(沈)유(有)사(士)택(澤)장(長)/고(高)거(擧)경(慶)운(雲)녹(祿)" 등 20자의 돌림자를 전하고 있었다. 이 돌림자는 이미 열일곱 번째 순서의 올릴 거(擧)자에 이르렀으며, 이를 위해 이씨들은 20년 전에 또 돌림자 10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즈음에 이씨 가족은 그들을 주도로 하는 '이성량연구회'를 발족, 이택면은 이 연구회의 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택면은 이성량의 후손들이 소툰에서 지키던 것은 옛 산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이씨는 선조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고조 이영(李英)부터 4대 선인(先人)들의 무덤은 모두 여기에 있었지요."

  4대 선인들은 새 무덤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신분촌(新墳村)에 가족무덤을 두고 있었다. 신분촌은 소툰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지난 10리 밖의 마을이다.

  이영의 5대손인 이성량 그리고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李如松), 이여백(李如柏)의 무덤은 따로 소툰 부근의 산기슭에 있었다. 참고로 이성량은 슬하에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 형제는 항간에 '이씨네 아홉 호장(虎將)'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성량 등의 무덤은 신분툰과 분간하기 위해 오랜 무덤이라는 의미의 노분(老墳)이라고 불린다. 무덤산은 용의 모양이며 이성량은 바로 용두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성량의 후손들도 사후 이곳에 무덤을 쓰는데, 화장을 한 후 안장한다고 한다. 무덤의 동서 방향 신도(神道)에는 돌사자, 돌양, 돌말, 돌사람 등 석상(石像)이 있었다. 요녕성의 북쪽 지역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명나라의 무덤 앞 석상 작품이다. 소툰의 노분은 시신이 없는 의관총(衣冠塚)이며, 이성량과 이여송의 진실한 무덤은 북경의 어느 곳엔가 있다고 전한다.

 

철령의 옛 명소 만화루의 일각, 옛 문헌에 사진으로 간신히 남아있다.

 

  "누르하치의 원수로 되었으니, 선산의 뫼가 북경에 그대로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요." 이택면이 어딘가 서글피 하는 말이다.

  누르하치가 철령을 공략한 후 이씨 가족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영의 둘째 손자 이춘무(李春茂)의 일파(一派)는 10남 6녀가 피살되었다. 이성량이 거처인 철령의 망화루(望花樓)도 이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망화루는 문의 윗부분에 매화 모양의 기석(奇石)을 넣은 명소이다. 시골의 소툰에 살던 이씨 후손들은 현성에 있던 이성량의 기타 자식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현성의 피비린 살육전을 피하고 선조의 무덤가에서 백성의 평범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누르하치가 천하를 빼앗기 위해 이씨 등 명문벌족의 영향력을 이용, 이성량의 가족에게 귀부(歸附)를 회유하며 관작을 내린 건 그 후의 이야기이다.

  이쯤하면 아무래도 이성량의 가계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성량의) 고조 이영은 조선으로부터 내부(內附)하였으며 대대로 철령위(鐵嶺衛)의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을 받아 마침내 거기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고 '명사․이성량전(明史․李成梁傳)'이 기술하고 있다. 강희 판본의 '이씨계보(李氏譜系)'는 또 이영의 다섯 선조인 이철근혜(李哲根橞), 이합산(李哈山), 이하파노(李厦覇努), 이바투리(李把圖理), 이응니(李膺尼)의 이름을 적고 있다. 계보의 순서가 산실(散失) 되어 그들의 세차(歲次)는 고증할 수 없다고 민국(民國, 1912~1949) 연간의 '철령현지(鐵嶺縣志)'는 밝힌다. 그리하여 "함부로 허망한 주석을 달지 못하며" 이영을 제1세로 열거한다는 것이다.

  강희 판본의 '이씨계보(李氏譜系)'는 소툰의 이씨 가문에 대대로 전승되었다. 괴뢰 만주국(滿洲國, 1932~1945) 시기 진본의 한부는 일본에 유실되었고 일부는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 소실되었으며 철령과 소툰에 각기 한부 잔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씨계보(李氏譜系)'를 판독했던 사학자 소노다 카즈키(園田一龜)는 소화(昭和) 13년(1940) '동양학보(東洋學報)'에 글을 게재하고 이씨가 여진인의 혈통일 가능성을 내놓았다.

  "다섯 선조의 이름이 중국인이나 조선인과 같지 않고 오히려 여진인과 더 비슷하다는 거였지요."

  이름은 물론이고 지리나 역사적 특성을 보아도 압록강의 오른쪽 기슭에서 살던 여진인이라는 것이다. 이택면은 한발 더 나아가 이영의 선조가 조선에서 살던 여진인의 두목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씨의 선조 이름에서 나오는 바투(把圖)는 여진어로 장군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성량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 민국연간의 철령의 지방문헌.

 

  어쩌면 무게의 추는 이택면이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 했다. 1993년 철령현의 어느 촌락에서 이씨 가문의 초본(抄本) 족보가 발견되었다. 강희 판본의 '이씨계보'보다 이른 족보였다. 이 족보에 따르면 이영은 이응니(鷹你,膺尼와 같은 의미)의 아들이며 천호(千戶, 무관직무)를 세습했다. 이 무렵 또 이영의 장손이자 이성량의 조부인 이춘미(李春美)의 무덤이 신분촌에서 도굴되었다. 이때 발견된 가정(嘉靖) 34년(1555)의 묘지명은 선조 이응니가 도강하여 철령에서 살았다고 기술한다. 또 선적(先籍)은 조선국의 독로강(禿魯江)이라고 밝혔다. 독로강은 장자강(將子江)의 옛 지명으로 강계를 흘러지나 압록강과 합류한다. 고려는 일찍 강계에 여진의 촌락이라는 의미의 만호포(滿戶浦)를 설립하고 군대를 배치했다. 이영의 선조가 지역민으로 군이나 지방의 장관을 담임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2 지방문헌은 이성량의 선조가 조선의 후예라는 게 분명하다고 기록한다.

 

  뒷이야기이지만, 이에 반론을 제기한 연변의 언어학자가 있었다. "옛날에는 이성계(李成桂)도 한때 여진인의 말로 이름을 지어 불렀는데요."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한 조선의 제1대 왕이다. 한때 이성계는 여진인의 말로 '어린이 장군'이라는 의미의 '아지바토(阿智巴托)'로 불렸다고 어사(語史)가 기록한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咸鏡道) 영흥(永興)은 고려 말까지 여진인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여진인의 말로 작명하고 또 여진인이 살던 지역에 있었다고 해서 꼭 여진인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고조 이영의 이름은 성주(星州) 이씨 등의 옛 족보에 나타난다.

  아무튼 족보나 사서의 기록은 모두 이씨의 선조가 조선에서 도강했다는데 이의가 없는 듯하다.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나라 원군을 인솔하여 조선에 파병되는데, 이때 조선의 군신에게 그의 선조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사정을 여러 번이나 언급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 나라(조선) 사람이다. 5대조(6대조의 오기인 듯―저자 주)가 죄를 지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선조가) 갖고 온 활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성량의 14대손 이택면이 도서관에서 옛 문헌을 찾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또 그의 선조가 독로강(獨魯江,禿魯江과 같은 뜻)의 사람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 장수들을 선무사(宣撫祠)와 무열사(武烈祠)에 모시고 이여송의 후손 이원(李源)을 관리로 발탁했다. 이여송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명나라가 멸망한 후 조선으로 이주하여 농서(隴西) 이씨의 증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농서 이씨는 성주 이씨와 뿌리를 같이한다.

  사실 이택면이 말하고 있는 그들의 종파(宗派)의 이름도 이씨의 본관이라고 하는 성주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성량의 후손이라고 하거나 철령 이씨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한국의 현존하는 이씨의 본관은 100본 정도이며 대륙에서 밝혀진 이씨의 종파(宗派)는 5천 예(例,개) 정도 된다. 이씨는 세계적으로 단일 성씨의 제일 많은 인구수를 자랑한다. 그럴지라도 철령 이씨는 한국의 이씨 세계(世系)에 존재하지 않으며 중국의 이씨 종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성량의 후손들은 반도나 대륙이나 할 것 없이 특이한 이씨를 새롭게 열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철령의 이씨는 족명(族名)이 대륙에서 한족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철령 이씨는 조선이나 조선족 하면 대개 시조가 조선국에서 건너왔으며 시조의 본관이 성주라는 통설의 그 내용에 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택면은 저자에게 책 한권을 선물했다. 그가 얼마 전에 발간한 소설이었다. 책 이름은 "고구려의 옛 꿈(高句麗遺夢)"이었다. 고구려를 제재로 삼은 중국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사실상 대륙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엮은 '철령 이씨'가 바로 소설 같은 옛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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