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심산 속 4군 밀영과 피어린 서정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5월14일 00시00분    조회:169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

1934년 10월, 밀산항일유격대와 항일구국유격군은 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때 제4군 소속 안순복 등 4군의 조선족동지들과 가족들은 밀산현 서대림자(西大林子)에 있다가 그곳에서 80리 떨어진 양강구(杨岗沟)에 자리잡고있었다. 그해 겨울에 안순복, 허현숙(许贤淑), 리동숙, 리범숙 등 녀전사들은 부대와 더불어 밀산을 떠나게 되면서 자기들의 사랑스러운 8명의 어린 아이를 양강구의 루경명(娄景明)과 당지 군중들에게 부양을 부탁하였다. 이를 본 군중들은 깊이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신들은 정말 녀영웅호걸들이요!”

1936년 2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고 황옥청이 군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안순복은 4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면서 부대를 따라 벌리(勃利), 부금(富锦)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6월과 7월 사이에 부금과 보청(宝清) 일대에 새로운 항일유격구가 개척되면서 보청현 리금위자(李金围子) 서남의 대엽자골(大叶子沟)에 4군의 밀영이 들어섰다.

4군 재봉대는 군부를 따라 대엽자골 밀영에 자리잡았다. 그 시절 4군 재봉대는 20여명 녀전사로 구성되였는데 밀산현 서대림자와 양강구를 거친 안순복, 허현숙, 리동숙, 리범숙 등 모두가 대엽자골 밀영에서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1936년 겨울에 항일련군 제4군 군부와 4군 장병들은 대엽자골 밀영에서 동기강습을 받았다. 재봉대원들도 동기강습의 한 부분이였다. 그들은 군사와 문화 등 지식을 보다 익히면서 ‘민족해방전쟁과 통일전선’, ‘무산계급혁명’ 등 문제를 가지고 학습하며 토론을 벌리였다. 그해 겨울의 강습을 거치면서 4군 재봉대는 물론 부대장병들의 정치와 군사, 문화 수준은 새로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7년 1월에 이르러 4군은 원래의 700명으로부터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과에는 황옥청은 물론 부대의 후방공급의 일익을 맡아나선 4군 재봉대 녀전사들의 숨은 노력도 크게 깃들어있었다.

허현숙의 남편 황옥청은 1936년 그해 제4군의 제1퇀을 거느리고 밀산, 벌리 등지에서 맹활동을 벌리였다. 1937년 음력설(2월 11일)을 앞둔 2월 초경에 황옥청은 소속 1퇀 3련의 30여명 기병대를 인솔하여 벌리로부터 보청의 대엽자골 4군 밀영에 들어섰다. 황옥청과 4군 녀전사인 안해 허현숙과의 만남이기도 하였다.

 

2

4군 밀영에 들어선 황옥청은 군장 리연평(李延平)에게 그간 군사활동을 회보하는 한편 설맞이 전리품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 군부와 밀영의 재봉대는 한결 생기를 띠였다. 군장 리연평과 황옥청은 보청과 부금간의 4군 교통선을 어떻게 다시 열 것인가를 토의하면서 황옥청이 내놓은, 지방의 방가대원(方家大院) 지주무장을 소멸할 방안을 짜고들었다.

방가라는 이 지주놈은 우리 항일련군의 활동을 백방으로 저애하면서 4군의 몇몇 동지들을 해친 일까지 있었다. 1937년 섣달그믐날인 2월 10일, 황옥청은 ‘일본토벌대’로 가장한 1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자태름름하게 방가대원에 들어섰고 총 한방 쏘지 않고 지주무장을 해제하여 버리였다. 많은 식량 등도 해결하여 4군 밀영은 그해 음력설을 즐거운 기분 속에서 쇠게 되였다. 잇달아 방가대원은 4군 부대가 부금에서 보청으로 가는 련락장소로 되였다.

1937년말에 이르러 일본침략자들은 일위군 5만여명의 병력을 긁어모아가지고 우쑤리강, 송화강, 흑룡강 하류의 삼강(三江)지구에 대해 전대미문의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소속 제4군과 제5군, 제7군, 제8군, 제10군 부대들은 반토벌전에 총궐기하여 일정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병력 등 여러 면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현실의 불리한 국면에서 벗어나며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과의 련계를 가지기 위하여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1938년 4월에 제4군과 제5군의 주력부대가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족 황옥청(黄玉清)은 제4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부 주임이였다. 그는 4군과 5군의 동지들과 함께 목단강지구의 5군 후방기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병력을 집중하여 서정(西征)을 다그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5월에 제4군과 제5군은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서정부대는 도합 680여명으로 구성되였다. 7월 2일에 서정부대는 제4군 군장 리연평(李延平)과 부군장 왕광우(王光宇)의 지휘하에서 목단강 연안의 삼도통(三道通)을 습격하였다. 이날 그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분주소를 까부시고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로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에는 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의 안해 허현숙이나 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 등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부대와 함께 풍찬로숙하면서 삼도통전투에 뛰여들었다. 평소엔 선전원, 봉사원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며 부대의 사기를 높이였다.

삼도통전투 이후 아군의 서정부대는 적들의 저지선을 돌파하면서 사도하자(四道河子)와 삼도하자(三道河子)를 지나고 로야령(老爷岭)을 넘으면서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300리 심산밀림을 헤치고 나갔다. 그 속에는 4군 재봉대 소속 녀전사들과 5군 부녀퇀의 녀전사들이 섞이였다.

 

3

7월 8일에 서정부대는 위하현(苇河县, 즉 珠河县, 후에 尚志县, 尚志市로 개칭) 경내에 들어서면서 단기적인 휴식정돈 시간을 가지였다. 12일 이른새벽에는 적들이 낌새를 챌 사이도 없이 위하현 동북쪽 루산진공격전투를 벌리여 일위군 14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경기관총 2정과 보총 100여자루, 탄알 1만여발 그리고 적잖은 식량 등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적들의 교량과 통신설비를 짓부시기도 하였다. 4군과 5군의 조선족녀전사들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

루산진진공전투에서 아군은 빛나는 승리를 얻었으나 적들이 계속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지꿎게 달려들어 제4군과 제5군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행동하게 되였다. 제4군의 녀전사들은 제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이때의 부녀퇀은 4군과 5군의 녀전사들을 합치여 20여명으로 구성되였다. 안순복과 허현숙, 리봉선 등의 첫 만남이고 어울림이였다.

허현숙의 남편인 제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도 4군의 일부 장병들과 더불어 5군 1사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런데 허현숙 관련 자료는 허현숙이 5군 1사 속에서 활동하고 황옥청이 다른 갈래 아군부대에서 행동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헤여져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연변인민출판사 출판(2015년 8월)으로 된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에 올린 허현숙 전기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하는 실수를 빚어냈다.

 

석별의 시각, 황옥청은 안해 허현숙의 두 손을 뜨거이 잡아주었다.

“나는 당신을 돌볼 수 없게 되였소. 매사에서 무척 조심하길 바라오. 우린 꼭 승리할 것이요. 우린 꼭 다시 만나게 될 것이요.”

그러는 남편을 두고 허현숙은 금방 한뜸한뜸 만들어낸 헝겊신 한컬레를 남편에게 맡기면서 평온스레 말하였다.

“시름 놓으세요. 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거예요. 당신도 항상 조심하세요.”

허현숙은 서정길에서 이렇게 남편 황옥청과 헤여졌다. 그들은 이 리별이 영원한 리별로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지금 보면 이는 분명 실수로서 5군 1사와 행동을 같이한 황옥청을 잘 모르고 빚어낸 오유적 기록이였다.

서란(舒兰), 오상(五常) 일대에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서정길이였다. 허현숙, 안순복 등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부대와 함께 오상현 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오상 경내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 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수십대의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1938년 7월 25일의 전투도 그러하였다. 이날 허현숙 소속 서정부대는 길동성위 서기이고 5군 정치부 주임인 송일부(宋一夫)와 4군 군장 리연평, 4군 부군장 왕광우 등의 지휘하에서 오상현 원보진(元宝镇) 부근의 집단부락 진공 전투를 벌리여 일부 식량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곳 집단부락 진공 전투는 상상외의 치렬한 전투여서 40여명의 장병들이 희생되는 피눈물의 결과를 가져왔다.

 

4

7월 29일, 서정부대는 일면파 남사진(一面坡南沙镇)을 야습(夜袭)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주야행군중 적들과의 조우전을 치르기도 하면서 탄약이 따르지 못하고 사상자가 늘어갔다. 극히 어려운 투쟁환경 속에서 서 정부대에서 떨어지는 사람과 도망현상도 없지 않았다. 더우기 서정부대의 주요 책임자인 송일부(宋一夫)도 공금을 가지고 달아나 그 영향이 아주 나빴지만 부대내의 녀전사들은 어느 하나도 부대를 떨어지지 않았다.

8월에 이르러 서정부대가 오상현 충하(冲河, 오늘의 오상시 충하진)지구에 이르렀을 때 4군의 서정부대는 100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8월 15일에 아군은 충하 부근의 한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부 식량을 얻었지만 적들의 추격을 받았다. 치렬한 전투 가운데서 4군 1사 2퇀 퇀장 마국신(马国臣) 등 64명이 불행히 포로가 되고 부대는 엉망이 되였다. 4군의 1사 사장 곡성산(曲成山)은 적들에게 붙잡혀 변절하고 말았다.

이날 전투에서 허현숙도 한창 적들과 싸우고 있을 때 한 녀전사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허현숙은 결사적으로 그 녀전사를 구출하다가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여 오상현 일본수비대감옥에 끌려갔다. 오늘의 충하진은 오상현소재지에서 동남으로 72킬로메터 떨어진 곳이다.

일본수비대 감옥에서 적들은 허현숙에게 부대의 행동부서를 대라고 미쳐 날뛰였다. 허현숙은 적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갖은 악형으로도 항일련군의 이 녀전사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나중에 악착하기 그지 없는 적들은 허현숙을 끌어내다가 무참히 살해하였다. 허현숙은 자기의 희생으로 한 공산당원, 한 항일련군 녀전사의 숭고한 맹세를 실천하였다.

황옥청은 안해의 희생으로 인한 모진 슬픔을 이겨냈다. 부대의 거듭되는 손실도 그를 거꾸러뜨리지 못하였다. 1938년 10월, 황옥청은 사태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5군 1사와 함께 림구 조령(刁翎)일대에 돌아와 5군의 후방기지를 찾았다. 후에 그는 중공길동성위 위원, 항일련군 제2로군 총정치부 주임 중책을 짊어지고 적들과 싸우다가 1940년 2월 20일에 보청현 태평구의 석회가마(石灰窑)가 있는 곳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허현숙과 황옥청의 작은 아들 황동순(黄东淳)은 아버지 소속부대인 항일련군 제4군에서 꼬마교통원으로 활약하다가 1939년 겨울 밀산현 합달하(合达河)에서 왜놈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우소웅(于绍雄) 주필로, 흑룡강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동북항일련군장령전》(2009년 10월 출판) 황옥청 전기에서는 허현숙과 그의 작은 아들이 오상현 충하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되였다고 쓰고 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옛 고창 구자 예술 탐고기 원래 변방 동포의 생활화를 묘사하기 위해 4월 중순에 적화에 도착해 다시 투루판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신강에 이르러 특히 고고창 유적이 있는 투루판 경내의 삼보에 도착하여 위대한 자연이 나에게 준 흥분과 여기저기 산재한 고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고창, 차사, 구자 등지의...
  • 2020-11-30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6](김춘선편5) 우리 조선족사연구를 체계화시키려면 인물전이나 혁명투쟁사, 청년운동사, 부녀사, 근거지사 등등 전업성 연구가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하나로 묶은 《통사》의 출간도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국내에서 큰 민족들인 만족, 몽골족 등...
  • 2020-11-30
  • ▨ 한건립 한건행 3년 자연재해가 갓 지난 설날이니 가능하게1962년 음력설 기간이였을 것이다. 이왕과 마찬가지로 염보항(阎宝航)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고소)께서는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그들의 집(북경 서편문 국무원 숙소)에 청해 함께 설을 쇠였다. 매년 이맘때는 우리가 가장 즐거운 날이였다. 큰아버지네 집은 따뜻...
  • 2020-11-26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5](김춘선편4)     조선족력사연구에서 론문, 저작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론문이나 저작을 더 훌륭하게 완성하려면 이들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집대성한 사료집이 있어야 한다. 나의 지도교수인 박창욱교수도 이 방면에 대...
  • 2020-11-21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4](김춘선편3)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제대로 리해하려면 우선 우리 민족이 조선반도로부터 어떻게 중국에 이주해왔고 중국에 이주한 이후에 어떻게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였는가를 준확히 알아야만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조선사도 ...
  • 2020-11-16
  •   10월 26일, 대련 금산배호텔 2층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1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번 행사는 대련안중근연구회가 주최하고 대련조선족문학회의 협조, 대련금보신구조선족 문화예술촉진위원회의 주관하에 이루어졌...
  • 2020-10-28
  • 올해는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먼저 아래 기념사를 보자 ↓↓↓ "라성교 렬사의 국제주의 정신은 조선인민과 영원히 함께하리라" 이는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있었던  김일성이 지난 세기 50년대 친필로 쓴 기념사다. 기념사에서 언급한  라성교 렬...
  • 2020-10-26
  • 10월 22일, 중앙과 성당위 및 주당위의 통일포치에 따라 연변군대간부휴양소는 7명의 항미원조 로전사들을 위해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기념메달 발급식을 개최했다.   현장에서 항미원조 로전사 대표들은 름름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위에서 보내온 깊은 배려...
  • 2020-10-23
  •  9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을 앞두고 항미원조기념관이 재개관 기념식을 갖고 20일부터 정식 개방했다.     단동시 압록강변에 위치한 항미원조기념관은 중국인민의 항미원조전쟁과 항미원조력사운동을 전...
  • 2020-09-22
  • 길림성문물고고학연구소에 따르면 고고학자들은 연길시 소영진 하룡촌 서쪽에서 조기 철기시대 유적지를 발견하고 10여곳의 집터를 발굴, 각종 유물 500여점이 출토되였다. 전문가들은 이 유적지의 발굴은 길림성 동부 두만강류역의 조기 주민들의 생산생활 양식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으며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부...
  • 2020-09-14
  • 가옥매 흑룡강성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 '중국 침략 일본군 세균전쟁 력사기록테마전’가동의식에 참석       지난 3일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5주년을 맞아 ‘일본 세균전 력사기록 테마전’이 731부대 전시관에서 있었다. 731부대 대원자료, ‘류수명...
  • 2020-09-07
  • 8월 21일 료녕 항일명장 송릉각 유물기증식이 환인만족자치현 동북항일의용군기념관에서 진행됐다.   기증식에서 항일의용군 명장 송릉각의 아들 송금춘(현 동북대학 현대기계공정과 자동화학원 부원장, 교수, 박사생도사)은&...
  • 2020-08-24
  • 두 달 넘게 폭우로 큰 고통을 겪은 중국에 또다시 큰 비가 내렸다. 지난 18일 발생한 홍수로만 이재민 26만 명이 발생했고, 침수된 지역도 부지기수다. 중국 정부는 군 120여만 명을 투입해 무너진 둑을 쌓는 등 추가 피해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러산대불에 물이 차오르는 모습. ⓒ...
  • 2020-08-23
  • 1988년 8월 1일, 락성된 목단강시 목단강반의 강빈공원에 세워진 팔녀투강기념군상. (2017년 7월 31일 현지촬영) 1 지난해 2019년 9월 15일과 9월 22일, 내 고향 연변 연길시에서 동녕현 로흑산특별지부 서기 리경천(李擎天,1896ㅡ1941) 렬사의 친손녀와 친손자들인 리은화씨와 리근강씨 취재기회를 가지였다. 취재 가운데...
  • 2020-08-17
  • "8.1"건군절을 앞둔 7월 28일, 소년항일투사 윤영희렬사를 기리는 기념행사가 화룡시에서 있었다. 화룡시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의 주최로 펼쳐진 이번 행사는 를 주제로 화룡시 문화가 문성사회구역에서 열렸다. 리퇴직 간부, 퇴역군인 로전사, 가두 사업일군, 중소학교 학생들과 주민대표, 연길로인뢰봉반 대표 ...
  • 2020-07-30
  • 최음파 작곡으로 된 는 말 그대로 중앙혁명근거지 군민들과 전국인민들을 혁명의 승리에로 부르는 힘차고 기세높은 진군의 노래, 불멸의 노래였다.    쏘베트 2차대회 기간 수차의 공연들에서 최음파를 망라한 전체 공연배우들과 직공들은 모두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연기를 보였고 하나로 되는 배합을 보이였다...
  • 2020-07-14
  • 위기일발의 시각 적을 막아나선 ‘조선퇀’ 170여명 장병 목숨 바쳐 적진에 붉은기를 격변시대 1946년 새해 첫날, 연변행정독찰전원공사 전원 관선정은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관선정은 신년사에서 “인민정권의 령도하에 광범한 군중을 단합시켜 신생의 정권을 보위하고 공고히 하여야 한다. 일만 잔여세력...
  • 2020-05-07
  • 15만원탈취사건 기념비 앞에서. 1920년 1월 4일 저녁, 국내외를 진감한 사건이 중국 동북의 자그마한 동네였던 룡정경내(현재 룡정시 지신진 승지촌)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름하여 ‘15만원탈취사건’이다. 중국의 풍부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는 중요한 철로인 길회선(연길-회령)철도 부설 자금을 탈취하여 항일...
  • 2020-01-07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