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천은 1895년 안휘성 수현의 한 로동자 가정에서 태여났다. 14살때부터 선후하여 남경, 상해에서 일하였고 1924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원 팽간신을 알게 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고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25년 8월, 팽간신 등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호녕철도 로동자협진회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얼마 뒤 중공 오송기계공장 특별지부가 설립되면서 손진천이 특별지부 서기로 선출되였다.
북벌군의 상해 진공에 배합하기 위해 중공중앙은 상해에서 로동자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926년 10월, 손진천은 당의 요구에 따라 오송기계공장 로동자무장을 거느리고 호녕철도를 차단하고 북양군벌의 군수물자 보급선을 파괴하여 상해 로동자 제1차 무장봉기를 위해 조건을 마련했다. 1927년 3월, 손진천은 오송기계공장 로동자들을 거느리고 대파업을 진행하였고 상해 로동자 제3차 무장봉기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3월 28일, 손진천은 호녕, 호항용 철도 총공회의 위원장으로 당선되였다.
4.12반혁명정변 이후 손진천은 무한, 구강, 상해 등지를 분주히 오가면서 전국철도총공회를 대표해 강소, 절강, 안휘, 강서 등 성의 망명한 동지들을 접대하고 배치하였으며 비밀리에 각지의 철도공회와 당조직을 정돈, 회복하였다.
중국공산당 8.7회의 후 손진천은 남경에 파견되여 중공남경시위 서기를 임직했다. 극히 위험한 백색테로 속에서 그는 당조직 정돈사업을 시작하였고 8.7회의 정신을 전달했으며 군중을 발동, 조직하여 지하투쟁을 견지하고 무장폭동을 준비했다.
1928년 7월, 손진천은 반역자의 밀고로 신분이 드러나 체포되였다. 감옥에서 국민당 군경과 특무들이 높은 벼슬과 봉록으로 유혹하고 혹독한 고문을 들이대면서 당의 기밀과 남경 지하 공산당원들의 명단을 내놓으라 핍박하였지만 손진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손진천은 온몸이 상처투성이 되게 고문을 당하여 생명이 위독했으나 적들에게 “죽이겠으면 죽여라. 나 하나를 죽이면 열 사람이 나설 것이고 나 같은 사람 열을 죽이면 백 사람이 나설 것이다. 너희들은 천만명의 혁명자들을 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1928년 10월 6일, 손진천은 우화대로 가는 길에 계속 국제가를 불렀고 “중국공산당 만세!”를 높이 웨쳤다. 그는 남경 우화대에서 영용하게 희생되였는데 그때 나이는 33살밖에 안되였다.
“나의 마음속 큰아버지는 떳떳한 영웅이다. 그는 1928년에 우화대에서 희생되였다. 당에 대한 그의 신앙과 충성은 우리 온 가족의 영광스러운 본보기이다.” 손진천 렬사의 조카인 80세 고령의 손이지 로인은 “청년일대들은 오늘의 이 행복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기하고 오늘날의 이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렬사들의 청춘과 생명을 잊지 말며 렬사들의 정신이 대대손손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손이지 로인은 47살 때부터 남경시 우화대구실험소학교에서 과외보도원으로 있으면서 38년 동안 어린이들과 우화대 참배자들에게 렬사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해마다 청명절이면 그는 어린이들을 데리고 우화대에 가서 성묘하느라 바삐 보낸다. 렬사기념비 앞에서 사람들은 동질 명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우에는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은 늘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고 새겨져있다.
신화통신/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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