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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산과 명인-제2편]5월의 마을에 피어난 마지막 감자꽃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7월24일 14시14분    조회: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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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김호림 특별기고 

두만강의 남쪽에서 보는 천불지산, 칠도구는 천불자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시초에 불린 마을의 이름은 원동(元東)이 아니었다. 원동은 본래 학교이름이었다. 1920년경 학교를 세울 때 원동학교라고 이름을 지었다. 학교의 이 이름을 따서 마을도 종국적으로 원동툰(屯)이라고 불렸다. 학교는 주변의 조선인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으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골짜기는 학교와 마을을 마치 가족처럼 한품에 감싸 안고 있었다. 원동의 토박이 황상룡(黃相龍)은 잔존한 어린 기억을 그렇게 또렷이 눈앞에 떠올리고 있었다.

  제가 어릴 때 노인들은 마을을 그냥 칠도구(七道溝)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조선인들)는 골짜기의 여기저기에 집을 짓고 살았지요.

    원동마을 즉 칠도구는 연길현(延吉縣, 지금의 용정시) 지신향(智新鄕) 소재지에서 거의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황상룡은 20대의 열혈나이를 시작하던 1963년에 칠도구를 떠났다. 원동마을이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에 남긴 것은 골짜기에 하얗게 피던 감자꽃이었다.

 

 

 
본인의 작품음악

  감자꽃이 하얗게 피고/산천어가 뛰노는 곳

  하늘아래 첫 동네가 나의 고향이라네

  고향아, 고향아 나의 고향아……

    노래 '나의 고향아'는 황상룡의 절절한 애정을 감자꽃처럼 하얗게 피우고 있었다. 황상룡은 독창곡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 급작스레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향이라는 이 이름을 떠올리자 금세 하얀 꽃이 머리를 꽉 채우더란다. 그가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음악편집으로 있던 1989년 무렵이었다.

 

 

 

 

  우리 마을의 산속에 무더기로 피어나는 게 감자꽃이었습니다. 산비탈은 온통 하얀 꽃이 만발했습니다. 골짜기를 타고 더 올라가는 겁니다. 산에는 노루가 뛰어다니고 물에는 산천어가 헤엄을 치고 다닙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면 정말 다른 세상 같았습니다.

  산에 들어서고 마을에 도착하면 금방 색깔이 달랐다. 고향의 추억은 산과 밭에 피어난 풀과 꽃으로 푸르고 하얗다. 감자꽃이 피어날 때면 감자는 열심히 뿌리에 열매를 만든다. 감자알이 차츰 굵어지고 주먹만큼 커진다. 사람들은 감자로 수제비를 만들었고 또 국수를 만들었다.

  언제인가부터 골짜기의 흙길에 자동차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원동의 감자국수가 산밖에 소문을 놓게 된 것. 지어 연변의 초대 주장 주덕해는 외지 손님을 접대할 때면 특식 1번으로 원동의 감자국수를 지목했다고 한다. 수레 길에 자동차가 달리면서 하늘에 먼지를 뽀얗게 날렸다. 그래도 자동차의 뒤로 조무래기들이 졸졸 뒤따랐다. 다리 아닌 바퀴가 돌고 풀이 아닌 기름을 먹는 차가 신기했다.

 

창작을 끝낸 후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황상룡.

 

  그래도 시골 마을에 사는 재미가 따로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늘 시냇물에 텀벙 발목을 담그고 손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다. 산천어도 그렇지만 '세치네(細川魚, 세천어의 변음)'도 산의 청정한 물에서 자라서 산천어처럼 맛이 좋았다. 흐르는 맑은 물에 고기 밸을 따고 나눠서 집으로 가져갔다. 원동의 30가구는 서로 형제이고 친척이었으며 사돈이었다. 황씨, 허씨, 이씨 등 몇몇 성씨뿐이었다. 거짓말 한마디 없이 어느 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는지 서로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저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장단을 잘 치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잔치 때 보면 작은 밥상을 공중에 휘익 하니 뿌리고 그걸 떨어뜨리면서 장단을 치는 데요… 동네 사람들의 혼을 쑥 뽑았습니다. 이때 노래를 장단과 함께 불렀는데요, 지금 보면 표현 독창이었습니다. 그러나 열 번 불러도 모를 심거나 김을 맬 때 부르는 '농부가' 하나 밖에 몰랐습니다.

  농부 일생 무한이로다, 춘경추수 연연(年年)이로다. 어럴럴 상사디여…

  언제인가부터 시골의 이 마을에는 감자꽃 하나가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 꽃에는 아버지가 꿈꾸는 미래의 구도(求道)가 배어 있었다. 아들이 중학교를 다닐 때 공사(향) 마을에 유숙하면서 늘 집 생각을 할까봐 아버지는 선뜻 원동을 떠나 이사를 했고 미구에 아들이 용정 시내의 민영 예술학교에 입학하자 또 미련 없이 지신에서 살던 집을 팔아버렸다. 지신의 이 집은 단돈 50원에 팔렸는데, 거기에서 18원 10전을 내어 아들이 오매에도 그리는 바이올린을 샀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로 황상룡은 나중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에서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했습니다. 이때 연변예술학교는 3년 동안 더 모집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뉘 감자농사를 하면서 세월을 지내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어느 날 대대판공실(辦公室, 사무위원회)에 들렸다가 신문을 읽었는데요, 예술학교 학생모집광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5월이라 시와 때가 되니 황량하던 산에 감자꽃이 피고 또 열매가 맺히고 있는 듯 했다.

  황상룡은 다짜고짜 연길행을 단행했다. 22살이 되던 1963년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는 그토록 즐기는 음악공부와 영영 담을 쌓을 것 같았다. 3년 만의 학생모집이라서 연길에는 응시생들이 구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연길이나 용정뿐만 아니었다. 동북 3성에서 응시생들이 모여왔다. 그때부터 5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황성룡은 그의 시험 번호를 어제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267번이었다.

  시험관은 무슨 노래를 부르겠냐 하고 물어왔습니다. 노래를 즐겼고 노래를 입에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노래를 부르는 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또 어릴 때부터 샘물처럼 청아하기로 소문난 목소리였고요. 노래를 시작하니 반주를 하고 있던 시험관이 대뜸 저쪽 시험관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더군요. 1차 시험을 잘 통과하니 2차는 대충 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3차까지 시험을 보았습니다.

  예술인들과 함께 있는 황상룡(가운데).

  최종적으로 39명이 입학, 와중에 성악반에 10명이 입학했다. 황상룡은 힘들게 얻은 이 기회를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학교에서 종일 노래를 훈련하느라고 목을 백여 번은 상했다. 한 달이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 노래 열정은 졸업을 해서 연변가무단 성악배우로 된 후에도 조금도 식지 않았다.

  마침내 천불(天佛)이 나타난 용정의 그 산처럼 천문(天門)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황상룡의 노래가 드디어 전파에 떴다. 천부적으로 목소리가 좋은 그의 노래는 금방 방송으로 인기를 탔다. 나중에 30수 정도의 노래를 불러 방송에 올릴 수 있었다.

  생애의 첫 작곡은 38살 때 역에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날 신문을 읽으면서 발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가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당의 빛발을 안고 삽니다'라는 가사였다. 가사는 구도가 좋았고 재미있게 엮어져서 흥이 났다. 금방 곡이 떠올랐다.

  피아노를 치지 않는데도 도레미쏘가 그냥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노래를 너무 즐기다 보니 아직 곡을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작곡은 누가 배워주거나 시켜준 건 아닙니다.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가락을 음부(音符)로 적고 싶었습니다.

  부랴부랴 가사 위에 음부를 적었다. 기이하게도 가사 글자 숫자와 딱 맞아떨어졌다. 기차고 뭐고 그냥 연변가무단에 달려갔다. 참 듣기 좋은 노래구려. 정말 당신이 썼소? 다들 찬탄을 했다. 노래는 1980년 연변 음력설야회에 등장했다. 금방 인기곡으로 소문을 놓았고 중앙방송에 전파를 탔다.

  그때부터 황상룡은 늘 작곡을 했으며 작사, 작곡을 함께 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즐겨 읽고 글을 즐겨 쓰던 이 문학도는 마침내 곬을 찾아 쌓였던 에너지를 분출했다. 작사, 작곡 작품은 연이어 음악 간행물에 입선되고 방송에 채용되었다. 미구에 황상룡은 가수라는 이름보다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85년, 황상룡은 연길시방송국 음악편집으로 전근했고 뒤미처 1987년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으로 되었다. 황상룡의 종합적인 음악재능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방송프로그램 제작을 하면서 또 '대중음악무대', '라디오노래방'을 신설, 많은 신인가수를 발굴하고 육성했다. 한편 황상룡은 노래 '연길의 밤이여', '조국과 고향은 하나라네', '손자사랑, 손녀사랑' 등을 직접 불러 가수로서의 재능을 인증 받았다. 음악창작에도 확실한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장백의 폭포수야', '사랑의 옛집', '인생살이' 등 작품은 음악팬들과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2000년 황상룡은 음반을 내던 그 무렵까지 황상룡은 수백수의 애창곡을 작사, 작곡했다. 그의 70돐 생일을 계기로 2012년에 가진 기념음악회, 2015년에 연변텔레비젼 방송 홀에서 열린 개인가요작품음악회는 그의 음악일생의 최고의 작품이었다.

 

가수인 황상룡은 또 작곡가이며 작사도 한다.

 

  여든을 바라보는 황상룡은 노래의 그 언덕길에 오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얼마 전에는 가요 '어머니의 눈물'로 국가상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구나 노래의 세상에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황상룡은 지금도 늘 피아노 앞에 앉고 노래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부터 그와 같은 사람을 위해 노래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이나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노래교실을 찾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때 연변에서 노래방을 찾으면 남녀노소 모두 다 부르던 노래가 하나 있었다. 그때 모두 다 열광을 떠나 발광적이다시피 불렀다고 한다. 모두 다 그 노래에 미친 것 같았다. 노래 제목은 '모두 다 갔다'였다. 2000년 무렵 연변에 있은 진실한 이야기이다.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한 주인이 바로 황상룡이다.

  그때 외국 나들이가 연변을 들썽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만나지 못하면 한국이나 러시아에 갔다고 했습니다. 열에 한둘은 외국으로 갔고 또 돈을 벌겠다고 불법체류를 했습니다. 기차를 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를 알고 아들과 며느리를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못살 때를 만났다고 이렇게 가는가, 인제 가면 우리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기차역은 온통 눈물 바다였지요.

  그때 그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황상룡은 노래에 담았다. 연변의 사람들은 함께 모이면 이 노래를 불렀고 술을 마시면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로 이국타향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친지, 지인들을 그리었고 외롭게 지내고 있는 자신과 자식을 한탄했다.

  아내도 갔다 남편도 갔다/삼촌도 갔다 모두 다 갔다

  한국에 갔다 일본에 갔다/미국에 갔다 러시아에 갔다

  잘 살아보겠다고 모두 다 갔다/눈물로 헤어져서 모두 다 갔다

  산다는 게 뭐길래 산산이 부서져/그리움에 지쳐가며 살아야 하나

  오붓하게 모여서 살 날 언제면 올까/손꼽아 기다려 본다네.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흥겨운 리듬을 타고 있다. 기실 우리민족은 비극의 극치를 늘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기뻐도 노래를 부르고 슬퍼도 노래를 부른다. 흥겨운 그 가락은 부를수록 마음에 숨긴 그 슬픔을 한결 아프게 긁어 올린다. 노래 '모두 다 갔다'가 더구나 연변에 널리 전해진 원인이 아닐지 한다.

  극은 서로 통한다는데요, 우리는 도대체 한(恨)의 민족일까요, 아니면 흥(興)의 민족일까요?

  그러나 한때 그가 살았던 옛 고향의 원동마을에는 더는 한과 흥을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조선족들은 외국 나들이가 생기면서 나왔고 한족들도 임장(林場)이 서면서 모두 골짜기 밖의 벌로 이사했다. 모두 다 갔다. 고향의 그 마을에 하얗게 피어나던 감자꽃이 새삼 그립다면서 황상룡은 또 노래처럼 감자꽃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아, 해마다 5월이면 감자꽃이 다시 산골짜기의 그 옛 마을에 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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