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5)-피눈물의 지팡살이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7월26일 00시00분    조회:82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 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농사가 제법 잘되기 만했다.

한창 재미 나게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난데없는 ‘다부살이(만족식두루마기를 입은 점산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서 웬 농사질이냐며 호통친다. 다 된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당장 떠나라고 을러메기도 한다. 주인없는 황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점산호들의 사지증서안에 든 땅이였던 것이다. 어떤 점산호들은 조선족 간민들이 자기 땅을 개척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다가 황지가 옥답으로 변한 다음 불현듯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자들은 계속 농사짓겠으면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하여 조선족 간민들은 자신이 일군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소작농으로 전락되여야 했다. 조선족 간민들의 개황에 대해 류병호선생은 <점산호와 포산호>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농촌녀인들이 함지에 점심밥을 담아 밭으로 나르고 귀가길에는 땔나무를 이고 돌아온다

“조선족 간민들의 개황방법을 보면 첫해의 가을 혹은 이듬해의 이른봄에 잡초와 관목들을 베여낸 후 괭이와 보습으로 갈아번지고 조를 심는데 첫해에는 밭고랑도 내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다. 이듬해부터 콩, 옥수수, 보리를 심었다. 이렇게 2-3년이 지나면 황지가 점차 옥답으로 되는데 이 사이에 겨울이면 도끼로 나무뿌리를 찍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 간민들을 당시 지방관청에서는 간민이라고 불렀고 한족과 만족들은 지호(地戶) 혹은 포산호(刨山戶) 즉 산을 뚜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점산호의 소작농으로 전락된 포산호들의 생활이란 중세기 장원주의 농노와 같았다.”

산골짜기에 단풍물 오르고 밭곡식이 여물어서 누렇게 익은 가을, 탈곡장에 높이 쌓은 낟가리를 바라보면서 봄내 여름내 손이 갈라터지게 일한 보람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날아든다. 무장한 졸개들을 거느린 다부살이가 탈곡장에 뛰여들어 마구잡이로 조선족 간민들이 지은 곡식을 우마차에 실어간다. 자기들의 요구에 만족되지 않으면 그 집 안해를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자식까지 빼앗아간다.

포산호들은 흔히 4헥타르의 토지를 소작 맡으면 점산호의 1헥타르의 밭을 무상으로 다루어주어야 했다. 또 해마다 10~20일간 점산호의 일을 무상으로 해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점산호를 위해 잡역을 해주어야 했다. 례컨대 음력설 전후이면 점산호의 마소들이 1년간 먹을 사료를 썰어주어야 하며 립추 전후이면 땔나무 50단을 하여 바쳐야 한다. 같은 글에서 류병호선생은 포산호들의 억울함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근채구의 점산호 손보산은 포산호들에게 매년 1헥타르의 감자를 심도록 하였는데 꼭 김 세벌을 매게 하고 가을이면 잘된 감자만 골라 자기의 국수방에 가져오게 하였다. 점산호들은 잘 다룬 옥답을 빼앗아 뢰물을 많이 바치는 다른 간민들에게 소작주고 옥답을 빼앗긴 간민에게는 다른 황지를 개척할 것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연자매로 식량을 찧고 있는 우리 민족 녀성들
빚 갚지 못해 처자 빼앗겨

옛날에 연변에서 땅없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 맡아 부치는 것을 ‘지팡살이’라고 했다. 지팡이란 한어를 잘 몰랐던 농민들이 지주가 차지하고 있는 ‘地方(띠팡)’을 지팡으로 잘못 부른 데서 생겨난 말인데 일부에서는 ‘地盘儿(띠팔)’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주민들이 입버릇처럼 외운 지팡이란 곧 토지를 비롯한 생산자료가 어느 한 지주에게 들어간 지방을 말한다. 례를 들면 쑹개네 지팡(宋家地方), 왕개 지팡(王家地方), 조개 지팡(趙家地方)같은 것들이다.”(박청산 김철수《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개간초기 조선족 농민들은 쌀도 농구도 없기에 지주에게서 쌀, 농구, 생활비를 빌어 땅을 부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런 것을 방청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쌀, 농구, 부림소, 생활용품을 대주면서 3년 동안 소작료를 안받는다 해놓고는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쓸어들고 상품경제가 점차 발전해가자 첫해부터 소작료를 내라고 했다. 첫해에 수확고의 20%, 이듬해에 30% 그 다음해에 40% 바치는데 거기에다 월리식까지 합하면 수확고의 70~80%를 바치는 셈이였다. 네번째해부터는 종자, 농구, 부림소 등을 자부담하면서 방청을 반작으로 넘어가게 한다. 반작은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는 걸 말한다.

등허리를 내리쬐는 무서운 땡볕 아래에서 잔뼈도 굳지 않은 애숭이 머슴애가 후치를 끈다. 이마로는 비지땀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마구 쏟아진다. 후치대를 잡은 아비의 목에서도 겨불내가 난다. 이것은 당시 조선족 농민의 풍경이다.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조선족 농민들에게 있어서 부림소 한마리 갖춘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여 소가 메여야 할 쟁기를 흔히 사람이 메지 않으면 안되였다. 뼈가 물러나게 살이 떨어지게 한해농사를 지어놓았으나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여러 명목의 가렴잡세까지 바치고 나면 다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듬해 봄이 되기도전에 쌀독이 비게 되여 조선족 농민들은 지주에게서 높은 리률로 쌀을 꾸어다 호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곡물반환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봄에 곡물 1되를 꾸어주고 가을에 3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봄이면 지주들은 시장가격보다 비싼 값으로 꾸어준다. 그러나 가을이면 폭락한 값으로 6배에 해당한 곡물을 받아들인다. 례하면 봄에 량식 한되 값이 1원이라면 한되에 1.5원으로 꾸어주는데 가을이면 량식값이 0.5원으로 폭락했으나 의연히 봄의 가격으로 받는다. 그러니 봄에 1되 꾸어온 량식이 가을에 6되 되는 것이다.

이외에 점산호들은 고리대로 지호들의 고혈을 짜냈다. 리자는 보통 5푼이고 높을 때에는 10푼짜리도 있었다. 정한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처자를 빼앗기기도 했다. 빚을 못 갚은 농민들의 아들딸들은 지주집에 꼴머슴, 부엌데기로 들어가야 했다.

“덕신향 장동촌 하촌의 최대동은 점산호의 고리대를 갚지 못하여 하마트면 고환을 잘리울 번하였다.”(김희《장동촌을 개척한 사람들》)

 
이주초기 연변 조선인농민들의 소시장(룡정)
 

가렴잡세와‘동양척식회사’의 착취

“조선족 농민들은 지방관청으로부터도 온갖 수탈을 당했습니다. 동북의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괴이한 세금을 바쳤는 데 문턱세, 인두세 같은 것이 그런 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조선족 농민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 없다고 한다.

조선족 농민들은 교육비, 순경비, 보위단비 등 지방세를 바쳐야 하는외에 사묘, 도로, 교량수축비 같은 촌세를 바쳤으며 억울하게도 문턱세, 인두세, 고용세, 양우세(养牛稅), 굴뚝세, 입적비 초대비, 땔나무세, 해산세 등을 바쳐야 했다. 문턱세라는 것은 관청에 불리워간 조선족들이 관청의 대문에 들어설 때 바치는 세금이다. 소로 농사를 짓는다고 소세를 바쳐야 했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받는다고 고용세를 바쳐야 했다. 이외에도 호세(戶稅)라는 것도 있었는데 주둔군의 생활비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량식, 닭, 닭알, 땔나무, 술, 담배, 잡화의 비용을 모두 호세로 각 호에 분담시켰다.

그리고 군대가 촌락을 경유할 때 촌민들이 무상으로 식사와 잡비를 제공하여야 하고 관리와 경찰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쓰는 비용도 촌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가련한 조선족 농민들이 당하는 설음은 이것 뿐이 아니였다. 그들은 악착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압박과 착취도 받아야 했다. 1918년 일제의‘동양척식회사’ 에서는 조선족 농민들의 토지계약서를 저당 잡히고는 대부하는 방법으로 대를 이어 개척해놓은 땅을 앗아갔으며 그 땅에서 40-50%의 소작료를 받아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의 해설사이다. 이 대형다큐멘터리에서 하마탕주민 오준섭(80세)로인과의 인터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이 논밭 5헥타르 다룬다면 문패에다 한헥타르당 얼마를 바치라는 것을 써붙여놓습니다. 세금이 어찌나 높은 지 혀를 찰 정도였지요. 세금을 못내는 경우엔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가장집물을 빼앗거나 부셔놓군 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연변대학 황룡국교수와의 인터뷰도 있다.

“연변의 토지를 점하기 위하여 일제는 연변에다 ‘동양척식회사’ 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구제한다는 명의로 농민들에게 대부금을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토지대금, 밭갈이소값, 농기구값, 량식값 등이 망라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민들은 그 규정에 따라 밭을 사가지고 토지계약서를 ‘동양척식회사’ 에 바쳐야 했습니다. 규정에는 리자와 본전을 다 물면 토지계약서도 돌려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리자가 어찌나 높은 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도 리자를 다 갚은 사람이 없었답니다.”

지주와 지방관청 그리고 일제의 압박착취는 조선족 농민들의 명줄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9
  • 편집자의 말 :   본지는 올해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5돐을 경축하면서 2년반 동안 련재했던 항일전문연구가 리광인 선생의 을 이어 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저 한다. 본편은 당년 가렬처절했던 남만의 항일무장싸움터에서 피흘려 싸운 조선족 당공작일군들과 장병들의 영웅형상을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체계적으로 부...
  • 2022-03-09
  • 리계순(녀) 동지는 1914년 11월에 길림성 화룡현 덕신사 금곡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리계순동지(자료사진) 리계순은 14살에 이 마을의 사립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늘쌍 학교에서 조직하는 문예대에 참가하여 반일투쟁을 선전하였으며 아동단을 조직하여 마을에서 보초를 서주었다...
  • 2022-01-04
  • 저명한 항일혁명가들인 김순경의 오빠 김문철과 도개손     중국혁명속 조선족혁명사를 펼치면 지난세기 30년대 북경과 상해 공청단북평시위, 공청단중앙과 공청단강소성위, 할빈 공청단만주성위에서 활동한 저명한 항일녀성혁명가 김순경(金顺卿, 1913ㅡ1936)이 떠오른다. ...
  • 2021-06-25
  • 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과 남편 한별 (1)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에서 장인촌 남쪽 옛 도대구 마을에 꾸린 ‘홍색장인강주체화랑’. (사진 양성지 제공)   1 1981년 6월 2일자 《연변일보》 3면에는 라는 1400자 정도의 짤막한 전기 한편이 실리였다. 필자가 정리하는 ‘청사에 길이 빛날 조선...
  • 2021-04-06
  • 1909년 10월 26일 아침, 안중근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맘속으로 이 날의 거사를 두고 다시 한번 맹세했다. 잠시 후 안중근은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벗고 검은색 모직품 신사복을 갈아입었다. 신사복 우에는 반코트를 걸치고 머리에는 납작한 모자를 썼다. 그리고는 권총을 손으로 매만지더니 수건으로 닦고 또 닦는다. 브...
  • 2020-10-26
  • 박수환 등 항일렬사의 발자취를 찾아. 지난 90년대 초반 연변력사연구소와 중국조선족사학회에서 조직한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현지답사 사진. (1991년 5월 29일 현지촬영) 1 모두가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항일련군 2군 6사의 녀전사들 가운데는 박수환(朴寿环,1909ㅡ1938)이라고 부르는 한 재봉대원이 있었다. 박수환 녀...
  • 2020-07-20
  • 반병률 교수, 최 장군 딸 증언 거쳐 최초 공개 1922년 극동민족대회 영상에서 최운산 추정 모습도 발견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이 레닌에게서 선물 받은 권총을 차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반병률 교수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일제강점기 독립군 부대 ...
  • 2019-12-30
  • 억울한 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조선족항일전사들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꼬박 3년 4개월 동안 동만의 공산당과 공청단 및 혁명대오내에서는 조선인 당원간부와 항일전사들만을 타격한 억울한 사건이 빚어졌다. 일제와 총칼을 맞대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조선인전사들...
  • 2019-05-17
  • 대중적인 무장탈취투쟁 활발히 벌려 조선인 민중들 유격대건립에 앞장서 화룡현유격대 1931년 겨울부터 동만 각지에서는 항일유격대의 건립사업을 다그쳤다. 화룡현항일유격대의 건설사업도 1931년 ‘추수투쟁’과 1932년 ‘춘황투쟁’에서부터 시작되였다. 1930년 ‘붉은 5월 투쟁’후 중공...
  • 2019-04-24
  • 애국사병 나라 주권 위하여 일본인 사살 왕덕림구국군 군사 일으켜 대일작전 펼쳐 애국사병의 정당행위 ‘9.18’사변 후 동북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전민항전의 호소와 전국인민들의 거세찬 항일물결의 추동 밑에 자발적인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다. 1931년 12월 7일, 안도현 명월구에 주둔하고 있던 길림성방...
  • 2019-04-19
  • 용감하고 지혜롭게 일제의 무장을 탈취하고 토배기병기공장서 자체로 ‘연길폭탄’ 제조 명월구회의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공산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 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 후 공산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
  • 2019-04-17
  • 농민들 지주의 낟가리 허물어 ‘감조감식’실현 지주들의 창고문 열어 소작농들의 봄량식 해결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관동군은 심양의 북대영을 공격하고 동북을 침략하는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9.18’사변이 발생한 이튿날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 길흥은 한간이며 길림부사령관공서 참모...
  • 2019-04-10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1군―사급 이상 장령 류용국(劉用国, 1910—1933):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당위원회 서기 1910년에 출생하였고 중공만주성위에서 사업하였으며 1932년 11월 중공반석중심현위로 전근되였다. 12월, 중공반석중심현위 제2차 확대회의에서 현당위 위원이 되였으며 현당위 군...
  • 2018-11-26
  • 주동적으로 타격하면서 토벌계획 혼란시켜, 서부전선 전투부담 경감 아군의 철수 엄호 동부전선의 반일부대 “경신년 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진행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서부전선인 청산리전역만 말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벌에 의해 반일부대주력은 연길현과 화룡...
  • 2018-11-01
  • 날랜 용사들 적들의 수송대 엄습 변절자에 의해 거사 물거품으로 원쑤를 갚자면 손에 무장을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핀 나즈막한 언덕 아래에 15만원 탈취 거사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룡정에서 10리 쯤 떨어진 동량리어구이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夺取十五万元事件遗址’ 라고 새겨져있었다. 륙도하가 눈앞에서 ...
  • 2018-09-13
  •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무장단체들 무장투쟁 료원의 불길로 타올라   용감한 반일부대 장병들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3.13'운동의 경험교훈이였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외교독립론'이거나 부패정부의 힘을 빈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것을 피...
  • 2018-09-05
  • 중국조선인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 1920년대 룡정시거리와 시장 명동의 5대 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이 이곳 땅을 차지하고 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는 비둘기바위로 불리웠다고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 사이...
  • 2018-08-22
  • 서전서숙 옛터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구석에 두아름 되는 비술나무 한그루가 름름히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 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는데 패쪽에는 이런 패문이 씌여져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
  • 2018-08-16
  •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 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농사가 제법 잘되기 만했다. 한창 재미 나게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난데없는...
  • 2018-07-26
  • 장백산‘정계비’ 청나라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淸一統志)》를 편찬하여 청나라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물론 청나라—조선 변계가 두만강, 압록강이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 데다가 인가까지 없어 그 분계가 명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두 강 상류에서 조선사람들이 청...
  • 2018-07-26
‹처음  이전 1 2 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