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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김원봉 옆에 이런 분들이...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8월16일 15시24분    조회: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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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번째 광복절이다. 여느 해와 다르게 각 방송사 별로 풍성한 광복절 특집이 마련되었다. 그 중에서도 KBS는 공영방송답게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그 중 15일 방영된 <특집 다큐 -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의 상징이었던 '의사(醫師)'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숙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의사(義士)'된 선열들의 삶을 조명했다.  

사천 나창헌, 연변 박서양, 몽골 이태준, 하얼빈 김중화, 북경 이자해 등 1945년까지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156명에 이른다. 그 중 포상을 받은 사람은 불과 67명.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은 독립 운동의 숨은 주역, '전문직 종사자 의사'로써 독립 운동에 참여한 그들을 환기시킨다. 

이정희 시민기자
오마이뉴스


일제 강점기 경성 의전이나 세브란스 의전이라면 어땠을까?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가던 곳이었을 곳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영화 <동주>에서도 간도에서 연세 의전 문학부에 가는 두 청년을 그곳 친지들이 얼마나 축하해 주었던가. 하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그저 환자를 고치는 의술만을 편하게 펼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KBS 특집 다큐-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 KBS


몽골에서도 뜨거웠던 독립의지, 이태준

청년 이태준은 1907년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했던 1907년은 군대 해산이 있던 시기, 즉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 가던 시기였다. 2년 뒤,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에 전 세계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그 격동의 시절 의대생인 이태준의 운명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위태로운 국운에 고뇌하는 젊은 의학도를 알아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형제였던 세브란스 의전 1회 선배였던 김필순 선생을 소개하셨을 테고, 최남선이 만든 청년 학우회에 기꺼이 입회하게 하셨을 것이다.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비밀 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신민회는 국권 회복운동을 벌이던 중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국내에서는 활동하기 힘들게 된 신민회의 인사들은 대거 망명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이태준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한 혐의를 받고, 그 역시 망명의 길에 나서게 됐다.

단동을 경과하여, 중국에서 가장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남경으로 옮겨간 이태준 선생. 그는 그곳에서 해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취직하여 힘겨운 망명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 3인 중 한 명으로 파견됐던 김규식 선생과 함께 '독립'에 대비할 '무관학교'를 만들기로 뜻을 모아 몽골로 향했다. 

1914년 말도 설고, 땅도 설은 몽골의 후레에 도착했지만,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무관학교는 자금과 현지 사정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래서 동의지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여 마지막 몽골 왕이었던 복드 칸의 어의로 활약하며 공을 세운 외국인들에게 주는 에르테닌 오치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몽골 현지에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탑 앞에 이태준 기념 공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낯선 몽골에서도 이태준 선생은 독립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의사를 하면서 번 돈으로 김규식 선생에게 2000원의 여비를 제공하는 등 독립 운동을 하는 인사들의 숙소와 교통편, 자금원으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또한 영화 <암살> 속 속사포 캐릭터의 본 인물로 추측되는 당신의 운전사였던 폭파 전문가 마자르를 소개하는 등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에 가입해 활약했다.  

그는 또 한인 사회당의 비밀당원이 되어, 자금 마련에 힘썼다. 레닌이 상해 임시정부에 준 12만 불의 금괴를 2400km를 거쳐 안전하게 수송한 선생은 8만 루블을 김립 선생에게 전하고, 다시 4만 루블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일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몽골 점령 러시아 백위파에게 발각되어 가솔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1921년 선생의 나이 불과 38세 때였다. 

ⓒ KBS


블라디보스토크에 번쩍, 상해에 번쩍... 곽병규 선생

이태준 선생이 먼 몽골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과 달리, 곽병규 선생은 천수를 누렸지만 정작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가족들조차 몰랐다. 평양 숭실중을 나와 이태준 선생에 이어 3회에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한 선생은 역시나 독립 운동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청년 곽병규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건 블라디보스토크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당시 1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신한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이곳에 살던 한인들과 유학생들이 조국에 '문화공연'을 하러 왔는데 이 해삼위 음악단장이 바로 곽병규였다. 

당시 이러한 '조국 방문 문화 행사'는 그저 공연이 아니었다. 고국에 살 수 없어 먼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는 동포 학생들의 공연은, 삼일 운동 이후 그 어떠한 정치적 행사도 불허한 일제 강점기 하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일하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집회'였다. 그래서 일제는 이 집회를 불을 켜고 감시했다. 그런 감시의 눈길을 피해가며 해외 동포들과 고국의 국민들은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어우러져 눈물을 흘리고 '한 민족으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유선영 지음, <식민지 트라우마> 중에서)

곽병규 선생의 활약은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임정의 외부 활동이었던 간호부 양성소 교수였던 곽병규는 1920년 상해에선 대한 적십자사 의사로 활약했고, 1927년 사리원에서는 경산병원과 유치원을 개업했다. 그러다 사리원 신간회 회장으로 체포당한다. 그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은 선생은 1930년대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다. 

곽 선생의 딸은 아버지를 '의술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봉사'라는 신념을 가르친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때문에 의사의 자녀들이었음에도 어렵게 살아야 했다고. '불의의 악을 극복하고 전진하라'는 아버님의 숨겨졌던 유지는 뒤늦게 아버님의 활동을 알게 된 딸의 노력으로 2011년에야 비로소 국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던 손에 들진 폭탄, 나창헌 

여기 또 한 명의 의사가 있다. 아니 의사이기보다 열사인 나창헌 선생이다. 경성의전 2학년이던 24살에 3.1 운동을 겪은 선생은 당일 1차 시위에 참여한 후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연행됐다.  미결수로 서대문 감옥에 갇혀 온갖 심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입원하게 된 선생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탈출, 대동단에 가입하여 의친왕 이강 망명 작전에서 '경호'의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알게 된 일제에 의해 작전은 실패한다.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1919년 11월 8일 종로 경찰서 앞에서 200여 명의 동지 및 군중들과 '독립 만세' 운동 거사를 일으킨다. 일제는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그런 일제를 피해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상태에서 재판부는 3년 형을 구형했다. 험난했던 망명 과정, 선생의 부인은 망명 과정에서 발톱이 몽땅 빠졌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상해 독일 병원에서 의술을 다시 배운 선생은 세움 병원을 세워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임정의 재정을 돕는 한편, 임시 정부 의정원에서 두루 요직을 맡으며 활약한다. 하지만 점점 더 독립의 가능성이 멀어져만 가고, 임정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온건한 투쟁 방식 대신 일제에 직접적 손실은 물론 민족의 자긍심들 독려하기 위해 암살-파괴 등 투쟁 방식의 변화를 꾀한다. 직접 폭탄을 제조하는가 하면, 1926년 상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에 주모자로 참여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더는 선생을 상해에 머무를 수 없게 만들고, 다시 중경으로 발길을 돌린 선생은 그곳에서 만현의원을 개업하여 독립 운동을 돕던 도중 약관 40세의 나이에 위암에 걸려 순국한다. 

의사인 열사들의 운동은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특수성을 가진다. 의사들은 병원 개원을 '자금 지원'과 '인적 교류의 통로, 혹은 교두보'로 승화시키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중경, 몽골 등 지역을 막론하고 넘나들며 독립의 기치를 드높였다. 의사라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의사든 그 누구든 독립 앞에서는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세 분 선생의 행적은 기록한다. 

하지만, 2011년에야 비로소 딸에 의해 알려진 곽병규 선생, 우리보다 몽골 사람들이 더 기억하는 이태준 선생, 그리고 1993년에야 유해가 발굴되어 환국한 지 57년 만에 건국훈장을 받게 된 나창헌 선생처럼, 국가와 역사의 보답은 여전히 미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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