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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산에서 천불을 찾는 사람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9월4일 15시27분    조회: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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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산과 명인-제3편]

북경 김호림 기획 련재 

 


   (흑룡강신문=하얼빈)꽃이라고 하지만 차마 입에 올리기 민망하다. 하도 거북한 이름이라고 해서 한국은 '국가표준식물목록'을 작성할 때 '복주머니'라고 새롭게 명명했다고 한다. 기실 속명으로는 '개불알꽃'이라고 한다. 언제인가 박영진(朴永振)이 백두산 기슭의 화룡(和龍)에 식물 고찰차로 갔을 때 그곳 임장(林場)의 사람들은 또 '쇠불알꽃'이라고 부르더라고 한다.

  이 복주머니가 자생하고 있는 천불지산의 확실한 장소를 박영진은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복주머니는 고산지대에 자생하면서 생육조건이 까다로워 개체수가 아주 적다. 게다가 약용만 아니라 관상용에도 쓰일 수 있어 누군가 알면 단통에 거덜이 난다는 것이다. 북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이 꽃을 발견한 후 부근에 보초를 세워놓았을 정도라고 한다.

 

일명 개불알꽃의 흰복주머니가 천불지산의 풀속에 수줍게 피어있다.

 

  그런데 천불지산에는 개체가 아닌 군락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복주머니를 멸종위기의 희귀종이라고 하던 박영진의 말은 주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부풀린 것이었던가.

  "천불지산의 산줄기를 따라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데요, 백두산에 자주 다녀오지만 이처럼 많은 꽃을 한꺼번에 만난 적 없어요."

 

식물원에 재배한 황벽나무, 산속 계곡의 물기가 있는 비옥한 땅에서 자라며 약재와 천연염료로 쓰인다 .

 

  신화에 나오는 한 토막의 이야기를 방불케 한다. 이야기속의 비너스가 작심하고 천불지산에 그녀의 신발장을 챙긴 듯하다. 비너스는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인물로 영원한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어느 날 비너스는 지상에 내려갔다가 산언덕에서 양치기 소년과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자 한쪽 구두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부랴부랴 숲속으로 달아나는데, 이 예쁜 구두는 곧바로 한 송이의 예쁜 꽃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꽃은 침실에서 신는 여인의 슬리퍼와 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 꽃의 학명을 '비너스의 슬리퍼'(Venus's sleeper)라고 지었다고 한다. 미국은 '여인의 슬리퍼'라고 부르는데 '비너스의 잃어버린 슬리퍼'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식물원에 재배한 묘목의 기능 등을 약사에게 설명하고 있는 박영진.

 

  '슬리퍼'처럼 희귀한 식물은 천불지산에 또 하나 있다. 옛날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다고 하는 송이버섯이다. 송이버섯은 희귀수목인 적송(赤松)의 잔뿌리에 균근(菌根)을 형성하여 공생한다. 온도와 습도에 매우 민감하여 아직도 인공재배가 힘들다. 참고로 송이버섯의 군락지인 천불지산은 국가임업부와 환경보호부가 유일하게 비준하여 설립한 자연보호구로 되고 있다.

  신령스런 산에는 신령스런 기운이 흐른다. 천불(天佛)이 점지를 했다고 하는 이 명산에는 강과 골짜기마다 신령의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듯하다. 산에서 살아 숨을 쉬는 영물(靈物)은 자주 사람들의 시야에 날아들고 있었다. 산의 여기저기에 명물바위가 생기고 소나무가 어깨를 겯고 자란다. 꿩이 웬 농가의 마당에 뛰어들어 닭과 먹이를 다투는 진풍경은 산기슭의 마을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산지대 누운 잣송이의 식물원 이주사를 소개하고 있는 박영진.

 

  어느 날 박영진은 밤길을 걷다가 어마지두 기겁을 했다고 한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모자가 휙 날려가는 것 같았어요. 얼결에 만져보니 머리칼이 쫙 곤두선 겁니다."

  인간의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분명 호랑이가 지척에 있은 것이라고 마을의 노인이 훗날 박영진에게 귀띔을 했다. 호랑이는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천불지산에 둥지로 틀고 있었다.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늘 강기슭의 한왕산(汗王山)을 가로타고 있었다. 한왕은 읍락의 수장이나 군왕을 이르던 북방 민족의 말이다. 한왕산에 호랑이가 산의 왕으로 군림했던가.

  "한왕산에는 호랑이가 다니던 길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병사처럼 행진 노선이 따로 있은 거지요." 라고 하면서 박영진은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한왕산의 근처에 인가가 나타난 것은 1940년대였다. 산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은 마을은 방위를 밝혀서 조동촌(朝東村)이라고 작명했다. 밤중에 호랑이를 만나던 그날 박영진은 조동촌을 지나고 있었다.

  박영진은 한왕산 서쪽의 대동골(大洞溝)에 살고 있었다. 이 대동골은 현재로서는 골짜기의 이름으로만 집단기억에 잔존한다. 박씨 가족은 1960년대 중반 대동골에 이주했다. 대동골은 재물이 넉넉하다는 의미의 마을 '부유촌(富裕村)'과 한데 잇닿아 있었다. 부유촌은 공사(公社, 향) 소재지인데, 워낙은 '소보치'라고 불리던 고장이다. '소보치'는 재나 두엄을 담는 그런 삼태기를 이르는 함경도 방언이다. 시초부터 사람들은 '소보치'에 곡물을 가득 담고 '부유'하길 빌고 있었을까.

  나중에 박영진의 '소보치'에 담긴 것은 논과 밭의 벼나 조나 아니었다. 콘쓰레(崑石列)의 산에 있던 나무와 풀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담고 있었다.

 

식물원의 여러 색상 꽃의 진달래 앞에 서있는 박영진. 진달래는 인공재배가 아주 어려운 낙엽관목으로 알려지고 있다.

 

  "식물 이름은 마을을 떠나던 그때 5백여 개를 알게 되었는데요, 거의 다 야생 약용 식물이었습니다."

  콘쓰레는 대동골의 막바지에 있는데, 쓰러질 듯 기운 모양의 '쓰레하다'는 우리말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큰 쓰레의 산이라는 것. 또 경상도 방언인 '쓰레(써레)'에서 생성된 지명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화제의 '개불알꽃'은 바로 이 콘쓰레에 군락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집집마다 신주처럼 애지중지 모시던 책이 있었다. 보서(寶書) '모택동선집'이었다. 의약서적인 '연변중초약'의 첫 페이지도 위인의 어록(語錄)이 도배되고 있었다.

  어록 뒤에는 약용 식물의 사진과 설명이 수풀처럼 책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때는 실용적인 전문서적이나 문학서적은 천불지산의 산삼처럼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더구나 대동골은 용정 시내와 150리나 떨어진 벽촌이라서 이 '연변중초약'은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린 은혜로운 보물을 방불케 했다.

  약재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 있는 부친이 어디선가 '연변중초약'을 얻어왔다. 박영진은 틈만 나면 이 책을 뒤적거렸다. 산과 들의 나무와 풀이 책에 사진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비탈에 흔하던 엉겅퀴가 간질환을 치료할 때 쓰는 좋은 약이라니… 무심히 만났던 나무와 풀은 거개 약용 가치가 있었다.

  4천권 인쇄, 가격 1.90위안, 64절의 소프트커버 1130면… '연변중초약'은 박영진에게 약의 향기와 세계를 펼쳐주고 있었다.

  몇 년 후 박영진은 대학 입학원서에 농업대학을 기입했다. 그는 길림농업대학 농학학부를 다니면서 작물의 생산과 유전, 육종, 관리의 기본 이론과 지식, 기능을 배웠다. 작물은 곡식이나 채소 등의 재배 식물을 말한다. 연변농업과학원에 배치된 후 박영진은 장장 10년을 벼와 씨름을 했다.

  천불지산은 고향의 사랑을 심어주었고 또 생명의 싹을 내리게 했다. 생명의 기운은 천불지산의 어디에나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산에 오르면 박영진은 나무의 마음을 읽고 싶었고 풀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연변중초약'은 늘 그의 머리에 떠올라 벼처럼 씨앗을 내리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박영진은 도서관을 찾아 식물자료를 습득하고 산에 올라 실물을 관찰했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이런저런 식물을 하나둘 날라 내려왔다. 미구에 농업과학원의 뜰에는 장백산의 식물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밭에 초본식물인 삽주, 우엉, 취, 고사리가 겨끔내기로 자랐고 목본식물인 진달래가 피었으며 황벽(黃檗)이 소소리 자랐다. 백두산의 노란 만병초도 용정에 내려와 곱게 자랐다. 이산저산의 무려 5백 종의 식물이 한데 모여 작은 '식물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발견한 식물은 선후로 중국 식물사진베이스(植物圖像庫)에 140여개나 기록되었다.

  애지중지한 식물원이었지만 '산불'이 종종 일어났다. 언제인가 박영진은 우랄초(烏拉草) 한 포기를 옮겨 심고 주변에 일부러 쇠줄로 줄까지 둥그렇게 쳤다. 우랄초는 방한용 신발을 만드는 천연 재료로 인삼과 검은담비와 더불어 동북의 삼보(三寶)로 불린다. 어느 날 기음을 매던 인부는 식물원에 하필이면 잡풀을 기르는가 하면서 몽땅 뽑아버렸다. 또 식탐을 내서 근처의 아줌마들이 식용 식물을 나물로 캐어 바구니에 담아갔다. 만병초는 관상용이 되면서 누군가 화분채로 들고 갔다.

  산불은 식물대에서 일어나는 통제하기 어려운 화재이다. 예전에 천불지산에도 느닷없이 하늘의 불이 내린 적 있다. 벼락이 내려서 산에 불이 일어났고 풀과 나무를 태웠다. 어찌 보면 산의 이름처럼 천불(天佛)이 화전민들에게 점지한 길조(吉兆)였다. 땅을 태워 밭을 경작하던 화전민들이 아니던가.

  "지금도 천불지산에 산불이 확 일어났으면 좋겠는데요."

  박영진이 무심결에 일행에게 흘린 말이다. 그렇다면 박영진도 산에 화경(火耕)을 하고 천불지산에 새 식물원을 세울 심산(心算)이던가.

  천불지산에 식물과 동물이 번성하는 것은 천혜의 독특한 환경과 생태 때문이다. 그러나 산림이 무성하다고 해서 언제나 동식물이 번성하는 건 아니라고 박영진은 역설한다. 꺽다리의 나무들이 우쭐거리니 난쟁이의 식물이 죽어나고 있었다. 일부 난초는 나무의 그늘에 묻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림방화(護林防火)'를 지침으로 삼고 있는데요, 그게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천불지산도 일정 시일이 지나면 불이 나서 수풀이 교체되어야 한다는 게 박영진의 지론이다.

  그의 말처럼 산불이 일어난 후 생물의 다양성이 더 풍부해지는 현상이 있다. 자연적인 산불은 일종의 '간벌(間伐)'을 하며, 처음부터 다시 수풀이 자라나면서 다양한 종의 수풀이 생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 또 나무에 집중되었던 영양분도 토양으로 돌아가서 땅의 비옥도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서부의 국립공원은 산불이 일어나도 일정 수준까지 놔두는 방침을 지킨다. 호주의 환경보호국은 아예 서부지역에 3~5년마다 일부러 체계적인 통제 아래 인위적으로 산불을 내기까지 한다.

  연변농업과학원에도 자의든 타의든 '산불'이 일어나고 새로운 식물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혁개방 후 많은 연구소가 새로 등장했다. 미구에 박영진은 장백산경제작물개발연구소로 근무부서를 옮겼다. 이 연구소는 그가 약용 식물을 비롯하여 경제작물을 개발, 연구하면서 새롭게 생긴 부문이다. 한낱 취미로 시작한 일은 연구원 나아가 주급 연구, 개발의 과제로 되고 있었다.

  '장백산의 야생 과일과 채소 생태모방 재배기술 연구', '장백산 두릅나무의 인공재배기술 연구', '오미자의 생태재배기술연구', '야생 개암의 품종선택 육종과 재배기술 연구'…

  박영진은 식물 재배 하면 어림잡아서 몇 백가지를 연구한 것 같다고 말한다. 어느덧 식물의 재배학을 떠나 식물의 철학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박영진은 얼마 전에 과수를 실례로 삼아 논문을 작성했다. 작물의 재배 원리를 둘러싸고 지구의 생태가 준 계시를 글로 엮은 것이었다. 살초제 등 약물의 범람 후과 등을 기술하고 재배기술의 실태와 문제, 방향을 기술했다. 책자를 출간한 후 농업부와 국무원에 보냈고 유엔 식량농업기구에도 영문으로 번역하여 우송했다. 그의 생각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고 앓고 있는 세상을 미약하나마 성토하고 싶었다.

  "인간이 자연에 배출한 화학물질은 순환을 거쳐 다시 인간의 몸에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르는 거지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그런 환경 친화적의 생태를 존속해야 한다는 것. 천불지산에 심고 있는 박영진의 '꿈의 나무'이었다. 과연 그의 이 '꿈나무'가 '복주머니'로 되어 천불지산의 어디에나 푸르싱싱하게 자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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