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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산과 명인-제4편]함박동의 이름 모를 장군과 슬픈 전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9월28일 22시17분    조회: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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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천불의 산을 수호하는 호법신

  (흑룡강신문=하얼빈)이 이야기는 마을에 전하는 전설로 시작된다. 전설은 부근의 산봉우리를 타고 마을에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설의 주인공은 단지 성씨만 남겼을 뿐이다. 눈과 코, 입을 읽기 힘든 미지의 인물로 된 것이다.

        지방문헌인 『용정현지명지(龍井縣地名志)』가 이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임신한 웬 아낙네가 산에 올라 나물을 캤다. 그러다가 노곤해서 그늘 아래에 낮잠을 청했다. 비몽사몽에 순둥순둥한 애기를 낳았다. 눈을 깜박 뜨고 보니 남산 같던 배가 홀쭉했다. 정작 천금 같은 애기는 오간데 없었다. 어느새 구름을 타고 하늘에 날아갔는지 아니면 물처럼 땅에 잦아들었는지 모른다. 주변에는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서있고 무성한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향기를 풍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정말 기괴한 일이었다. 소식이 전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애기가 범상하지 않다고 여겼다. 애기가 앞으로 큰 장군으로 될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촌부(村婦)의 남편 성씨를 따서 기이한 애기가 출생한 이 산을 곽장봉(郭將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곽씨 장군을 잉태한 그 마을은 미구에 곽장동(郭將洞)이라고 불렸다. 마을이 생겼던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있은 일이다. 그런데 곽장동의 미지의 이 인물은 실은 홀아비라는 설이 있다. 만족말의 발음으로는 gezang 즉 홀아비라는 것이다. 길림성(吉林省)의 어느 민속학자가 이렇게 지명을 해석하고 있다. 아예 장군이 없던 마을이라고 고집을 쓰면 모를까, 곽장동은 말짱 조선인만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곽장봉 동남쪽의 향 소재지 백금동(白金洞)도 조선인들이 만든 동네이다. 간민(墾民)이 정착했던 광서 초년에는 우리말의 함박동이라고 불렀다. 함박은 통나무를 파서 큰 바가지처럼 만든 그릇이다. 마을은 이름처럼 함박을 만드는 것으로 소문이 있었고 한다.

함박동과 백금 지명 표지석이 두만강 기슭에 나란히 서있다.

        함박동에 흘러드는 대림하(大林河)는 옛날 사금꾼들이 금을 캐던 곳이라고 한다. 대림하는 양안에 수림이 많다고 부른 이름이지만 그보다 사금으로 소문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사금을 캐던 그 골짜기는 지금도 사금구(沙金溝)라고 불리고 있다. 사금을 채취할 때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접시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때 큰 바가지 모양의 함박이 많이 사용된 듯하다. 아무튼 함박은 대림하를 따라 두만강에 흘러가고 옛 이야기만 홀로 남아서 지명 백금으로 안착되고 있었다.

  한때 국사(國師)의 후손 김기복(金基福, 사망)도 가족과 함께 백금에 안착했다. 김씨의 선조는 옛날 반도의 왕궁에서 천운을 살피고 길흉을 가리던 점성가(占星家)였다고 한다. 이때 가족에 구전으로 전하는 별자리만 해도 무려 3650개에 달했다. 참고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2천여 개일 뿐이다. 김씨의 선조는 또 음양팔괘(陰陽八卦)의 희대의 둘도 없는 고수였다. 음양팔괘는 중국 민간에 몇 천 년 유전, 만물의 변화 이치를 논술하고 있다. 삼황(三皇)의 거두인 복희(伏羲)가 창안한 후 점술에 사용되었다. 김씨 가족에는 선조가 당(唐)나라 때 대륙에 와서 점성술 등을 전수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가 패망할 때 김씨 선조는 태자와 함께 황릉의 지도와 천상도(天像圖) 등을 소각, 그때부터 가족을 데리고 민간에 몸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53대의 전승인이 어찌어찌하여 강 이쪽의 백금에 거처를 잡았던 것이다.

  그들은 미상불 천불이 점지했다는 산의 기운을 찾아온 것이렷다. 백금 즉 함박동은 천불지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동네이다. 천불지산의 기운이 현시(顯示)되는 바위도 실은 이 동네에 있었다.

  기이한 바위는 함박동의 마을 북쪽 골짜기에 숨어있다. 작은 시냇물이 뭔가 속삭이듯 골짜기에서 졸졸 흘러나온다. 바위의 맞은쪽 언덕에는 일부러 지은 다락처럼 너럭바위가 번듯이 누워있다.

  “너럭바위에 올라서서 시냇물 저쪽의 현암(眩岩)을 응시해요, 갑자기 현훈증이 일어납니다. 이름처럼 아찔하도록 현혹케 하는 바위입니다.”

  언제인가 바위를 찾았던 반도의 풍수대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산의 남다른 기운이 즉각 감지된다는 것. 이 풍수대가는 용정에 왔다가 이곳을 선후로 두 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현암동은 도인들이 수련을 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실제로 옛날 이곳에는 사찰이 있었다고 현지인들이 전하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산언덕에는 민들레꽃이 또 향불처럼 다시 피어난다. 그러나 사찰의 종소리는 더는 귓가에 울리지 않는다. 사찰 부근에 있던 현암동도 벌써 10년 전에 소실되었다. 현암동의 이름도 산 너머 세월의 저쪽으로 멀어지는 듯하다. 현암의 아찔할 현(眩)도 솥 귀고리의 현(鉉)이나 시위 현(弦)으로 지방문헌에 각이하게 쓰이고 있는 현 주소이다.

  곽장봉에 감쪽같이 사라졌던 장군도 성씨를 바꾸고 있었을까. 백금 북쪽의 용천(涌泉)에서 웬 장군이 다시 샘물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마을 이름을 만든 현암, 이쪽의 검은 바위에 올라서서 현암을 응시하면 이름처럼 현훈증이 일어난다.

  유병훈(柳炳勛), 남, 조선족. 중국인민해방군 소장.

  1933년 음력 8월 연길현(延吉縣, 현 용정시) 용신구(勇新區) 용천툰(涌泉屯) 출생.

  1950년 10월 1일 용정연합중학교에서 중국공산당 가입, 11월 인민해방군 입대.

유병훈 장군의 약력은 연변 정부에서 편찬한 문사자료에

짧게 기록되어 있다. 책 『우리 겨레의 장군들』은 그가 학교 시절 유일한 학생 당원으로 입대한 후 군 부대의 모 기밀 부문에서 근무했다고 적고 있다. 1989년 7월, 유병훈은 낙양(洛陽) 외국어학원 정치부 주임을 담임했다. 이에 앞서 그는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모 국의 정치위원(사단장급)을 역임했다.

  낙양 외국어학원의 정식 명칭은 ‘인민해방군 외국어학원’으로 일종의 군사학교 성격을 띠고 있는데 외국어인력과 전산 인력을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군은 사병(士兵)부터 군관으로 진급하는 계급장마다 남다른 경력을 담고 있다. 장군의 어깨에 박힌 ‘금별’은 화려한 대하소설을 엮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병훈 장군의 이야기는 곽장봉의 곽씨 장군처럼 한낱 미스터리로 전한다.

  누군가는 천불지산의 장군과 전설은 호법신의 발현(發顯)이라고 말한다. 동서남북 4방위에서 천불의 산을 수호하고 있는 사천왕(四天王)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천왕은 불교의 수호신으로 널리 알려진 4명의 천왕이다. 사찰의 천왕문(天王門)에 들어서면 성난 얼굴로 칼과 악기 등을 쥐고 양쪽에 서있는 그 험상궂은 인물이다.

  정작 천불지산의 동네방네 소문을 놓고 있는 인물은 한의사였다. 그들은 천불지산 일대에 나타난 우레 같은 존재로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천왕이 천불지산에서 들고 있던 것은 기실 풀가시의 바늘처럼 가늘은 침(鍼)이었던가.

   침통(鍼筒)을 흔드는 무당(巫堂)

  침을 침통에서 꺼내기 전에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침을 찌르는 의사가 아니라 지게를 메고 있는 소금장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할 때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이야기의 맛을 이 소금장수가 내고 있었다.

  옛날 소금 지게에는 늘 괴담과 전설이 실려 있었다. 소금처럼 바가지에 담겨 동네방네에 내려졌다. 소금 지게를 메고 소금장수는 해마다 가을 무렵이면 꼭꼭 용신(勇新) 마을을 다녀가고 있었다.

  언제인가 사업차로 용신을 찾았던 현지의 은행직원 김씨가 이 이야기를 바구니로 두둑이 줍게 되었다. 정말이지 금덩이처럼 아주 기이한 이야기였지만 마을에는 동전처럼 흔하게 널려 있었던 것이다.

  소금장수는 워낙 저쪽 동네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해마다 두만강을 건너 멀리 이 마을을 다녀갔지요. 그때 이곳의 사람들은 늘 배를 타고 저쪽에 가서 장을 보았습니다. 백금의 사람들은 아예 저쪽을 오가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그 시절 국경은 이웃집 경계의 울바자와 같았다. 호랑이도 늘 두만강을 텀벙텀벙 건넜다. 마을 사람들은 병이 나면 곧바로 강을 건너 저쪽의 병원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소금장수는 강을 넘어 기어이 이쪽 용신에 살고 있는 이씨 성의 한의사를 찾고 있었다.

  이자준(李子俊)은 한때 백금과 용신 인근에 소문을 놓은 명의이다. 그럴지라도 소금장수가 이자준의 집 문턱에 꼭 소금 지게를 내려놓아야 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들 이자준은 침을 귀신처럼 잘 놓았다고 전하는데요. 그분은 침통을 늘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밭일을 하다가도 병자를 만나면 곧장 밭머리에서 병자에게 침을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잠깐, 그때면 이자준은 가타부타 대답하기에 앞서 해를 쳐다보면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이걸 어쩌면 좋담? 해가 기울기 전에 어서 밭 기음을 끝내야 하는데… 농부이자 의사인 이자준의 익살스런 능청이었다. 병자나 병자를 동행한 손님은 무가내로 그의 호미를 빼앗아 대신 밭고랑을 타고 앉는다. 그러면 이자준은 밭머리에 느긋하게 걸터앉아 병자를 진맥하고 침을 놓았다.

 옛 침통과 침, 현재 침구사는 1회용 침만 사용 가능하다.

  이자준이 침을 고르려고 침통을 흔들면 병자는 금세 병을 땅에 떨어뜨린 듯 시름을 놓았다. 마치 무당이 굿마당에서 사방에 방울을 흔들어 소리를 내고 신령을 불러 악귀를 쫓아버린 듯 했다.

  이자준은 강을 건너 이민을 하기 전에 반도에서 침술(鍼術)을 배웠다고 전한다. 침(鍼)은 우리말의 뜻으로 또 바늘, 가시, 바느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침술은 실은 반도에 시원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자침(刺鍼) 도구인 폄석(砭石)은 다름 아닌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의 패총(貝塚)에서 발굴되었다. 폄석은 글자 침(鍼)의 어원으로 돌침을 뜻한다. 침의 시조인 이 돌침은 바로 동방에서 생겼다고 『황제내경(黃帝內徑)』이 기록한다. 『황제내경(黃帝內徑)』은 침구설의 원전(原典)으로 전하는 옛 문헌이다. 이에 따르면 동방의 사람들은 인접한 바다의 물고기를 많이 식용하며 소금을 많이 먹으면서 혈액이 정체되는 종기 등 병이 많이 생겼다. 이때 뾰족한 돌의 끝머리로 종기를 째고 피를 빼내 치료하면서 화제의 돌침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소금장수도 소금을 나르면서 그 무슨 종기가 생겼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좀처럼 완치되지 않는 고질병으로 되고 있었다. 그런데 소금장수는 이자준의 침을 맞으면 금세 거짓말처럼 큰 차도(差度)가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웬 영문인지 차도가 있는 건 단 1년뿐 이었다. 해마다 가을 그맘때면 약정이라도 한 듯 병이 도졌다. 그래서 소금장수는 용신을 울며 겨자 먹기로 해마다 한 번씩은 꼭꼭 찾아와야 했다.

  마침 용신은 김장철의 가을이면 소금을 파는데 적격인 고장이었지요. 조선(족) 사람들이 산기슭에 부채처럼 쫙 펼쳐진 조선(족) 마을입니다. 하하, 마을이 골짜기에 마치 부채처럼 쫙 펼쳐 있다고 해서 항간에서는 또 부채골이라고 전하지요. 골짜기를 만든 산이 세 개 된다고 해서 한때는 삼산평(三山坪)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지방문헌에 기록된 첫 이름은 부채골이나 삼산평이 아니라 조양촌(朝陽村)이었다. 산의 양지 바른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동명의 명소인 북쪽의 조양천(朝陽川)에 밀려 결국 용신이라는 옛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용신은 선통(宣統) 2년(1910) 연길부(延吉府)에서 따로 나와 화룡현(和龍縣)의 관할에 있던 이 고장의 옛 이름이다.

  이자준은 용신촌 북쪽의 용천툰에서 살고 있었다. 용천툰은 광서 중반에 생긴 마을인데, 샘물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마을은 유씨 장군의 출생지로 되면서 또 한 번 세간에 이름을 알렸다. 정말이지 산봉우리에서 문득 오간데 없던 곽씨 장군이 실은 이 마을에 샘물처럼 솟구쳐 현신(現身)을 한 걸까. 공교롭게 명의 이자준이 시초에 살던 곳도 바로 곽씨 장군이 가뭇없이 사라졌던 곽장동이었다고 한다.

  용신은 저쪽의 이쪽 시내의 어느 쪽도 가깝지 않은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두만강 저쪽의 동네에 가려면 발품을 한나절이나 팔아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북쪽의 용정 시내에 다녀오려고 해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소금 지게를 마을까지 불러오려고 이자준이 침으로 꼼수를 부렸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 사달이 생겼어요. 갑자기 소금장수가 발길을 뚝 끊은 거지요. 그렇다고 이자준이 소금장수의 고질병을 완치한 건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꼼수를 언짢게 지켜보던 아내가 소금장수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고 남몰래 비방을 줬던 거죠. 하하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그저 시골의 식후 여담으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그 후 이자준은 그의 허가를 받지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린 아내에게 체벌을 주고자 침을 놓았고, 아내는 졸지에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아내는 이자준에게 고두백번 빌어서야 침을 은사(恩赦)처럼 받아 다시 말문을 열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남편의 일에 일절 간섭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자준은 지난 1960년대 저 세상의 사람으로 되었다. 후대에는 그처럼 의사로 있는 사람이 있지만 침구의 이야기는 그 이상 전승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이자준은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으나 종국적으로 이름 모르는 곽씨 장군처럼 천불지산 기슭의 영원한 전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침쟁이의 이야기는 이로써 결코 끝나는 게 아니다. 명의의 이야기는 다시 두만강 기슭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진맥의 달인이 샘물처럼 또 백금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분은 태아가 딸인지 아들인지 미리 알 수 있었는데요, 손가락으로 임산부의 맥만 척 짚어보고 읽은 거지요.

  정영숙(鄭英淑)의 말을 빈다면 남편 최필현(崔弼弦)의 손가락은 명실공한 초음파 진단과 엑스레이의 투시 의기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정영숙이 인터뷰 현장에서 먼저 머리에 떠올린 것은 진맥의 기문(奇問)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천리 저쪽에서 도망하던 울도 웃지도 못할 이야기였다.

  그들이 허겁지겁 도망하던 그 고장은 반도와 이은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의 오지에 있는 흑룡강성(黑龍江省) 목단강(牡丹江)이었다.

  새벽에 있은 천리 저쪽의 탈주

  이 이야기는 그 전날 밤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리 이삿짐을 정리하였고 남몰래 택시를 예약했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집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기 바삐 택시에 올라탔다.

  남쪽으로 길림성(吉林省) 지역에 막 들어서는데 핸드폰이 따르릉 하고 급작스레 울렸다. 핸드폰에는 병원의 원장의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특진실(特診室)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죠. 의사가 보이지 않으니 야단법석이 난거죠

시골 농부들의 병을 보고있는 최필현 의사.

  정영숙은 그날을 다시 되새기면서 입가에 얕은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그날은 연길에 들어설 때까지 마음 놓고 웃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목단강을 떠날 수 없어 목단강의 귀신이 될까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

  사실상 자물쇠는 한 달 전 특진실에 걸려 있어야 했다. 최필현과 병원의 계약은 단 1995년 한해뿐이었다. 최필현의 특진실이 문전성시를 이루자 병원에서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차일피일 계약 해지의 마감 시일을 미뤘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그의 발을 묶어놓고 있었다. 최필현은 기어이 병원을 떠나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우 때문에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이때 그의 월별 임금만 해도 인민폐 1만원을 넘고 있었다. 그즈음 대학교수의 월별 임금이 고작 1천원 정도였고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은 기껏해야 1원 80전 정도이었다.

  정영숙은 저자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귀향을 고집한 비밀을 밝혔다.

  자나 깨나 고향이 그리웠지요. 혈육을 연길에 두고 왔는데요. 웬만하면 계약을 마치는 대로 집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때 최필현은 아내를 데리고 목단강의 모 병원에서 초빙 의사로 있었다. 대륙 북단의 흑룡강성은 1860년대부터 조선인이 이주, 목단강 주변에 벼농사 재배가 성공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유입되었다. 목단강을 따라 벼농사가 이뤄지면서 조선인 집거지가 대량 형성되었다.

연변에서 용한(재간 있는) 조선(족) 의사가 왔다니까 병을 보러 오는 조선(족) 사람들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어떤(일부) 환자는 소문을 듣고 연길에서 내처 목단강까지 뒤쫓아 왔지요.

  최필현은 원래 연길에서 개인병원을 꾸렸다. 그때 연길의 개인병원에도 병자들로 해서 문턱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고 정영숙이 손짓과 발짓으로 비유를 했다. 새벽부터 병자가 문밖에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최필현은 차마 병실을 비울 수 없어서 자주 끼니를 에워야 했다.

  이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잠깐 소피를 다녀오던 최필현은 웬 할머니에게 발길을 멈췄다. 품위 있는 차림새였는데도 웬 일인지 그대로 퍼더버리고 앉아 있었다. 다른 병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할머니부터 진맥을 했다. 한국인이었다. 그냥 지병(持病)으로 고생하다가 연변에 왔던 걸음에 지인의 소개로 최필현을 찾아왔던 것이다. 훗날 그녀는 비방을 받아 끝내 병이 나았고 기뻐하면서 최필현에게 한국 초청장을 보내왔다.

  최필현은 한국에서 진맥 등 중의학 강의를 했다. 이에 앞서 그는 연변에서도 오랫동안 중의학 강의를 했었다. 오전에는 병원에서 병을 치료했고 오후에는 대학에 가서 강의를 했다. 그는 의학원과 위생간부학교의 특별초청 강사였다. 최필현의 강의는 연변이나 서울에서 모두 큰 환영을 받았다.

  한국에서 감사패를 네 개 받았지요. 그분들은 영주권 수속을 해주겠으니 한국에 남아달라고 여러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딱 잡아뗐어요. 중국 정부의 혜택으로 의사공부를 했는데, 어떻게 한국이 잘 산다고 한국에 이민(귀화)하는가 하고 그냥 도리머리를 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 와서 병원을 차릴 것을 권장하는 미국인도 있었다. 이 미국인은 훗날 목단강의 특진실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에는 병을 고치려고 지인에게 최필현을 소개 받아 연길에 왔다. 정연숙은 그가 아예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병을 보던 인상이 깊었다고 한다. 발병원인이며 처방전을 내는 이유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최필현의 의술에 감복한 미국인은 나중에 최필현의 뒤를 따라 목단강행을 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최필현의 병자로부터 팬, 제자, 친구로 되고 있었다.

  한국의 의대생 몇몇도 방학이면 최필현을 쫓아 목단강을 다녀갔다. 미구에 현지의 군 의사도 늘 특진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편의 제자로 있는 의사가 참 많습니다. 이 가운데서 유명한 의사가 여럿이나 됩니다. 계서(鷄西)의 이씨, 연길의 전씨, 용정의 오씨 등등 이름만 외워도 현지에 잘 알려 있는 모모한 의사들이지요.

  연기(緣起), 이것이 있음으로 하여 이것이 있다.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처방전의 이야기가 오가고 그가 이르는 곳마다 약초의 향기가 따르고 있었다. 약의 책이 펼쳐지고 약의 산이 내려오고 있었으며 책과 산을 따라 사람이 나타나고 있었다.

  최필현의 슬하에 두고 있는 오누이도 종국적으로 약과 처방과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

  딸은 간호장(看護長, 수간호사)로 있고 아들은 약제사로 있어요. 또 사위는 장인의 명맥을 계승하여 한의사로 있습니다. 아, 그리고 외손자도 외할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는데요, 지금은 섬서성(陝西省)에서 중의약 대학을 다니고 있지요.

  사실상 최필현이 시초에 닦은 의학공부는 서의(西醫)이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급성 기관지염에 걸렸는데, 의사를 만나 서약을 며칠이나 복용했지만 좀처럼 약효가 없었다. 그런데 중의학과의 한의사를 만나 초약을 복용, 세 첩의 약제로 삼일 만에 병이 완쾌되었다. 그때부터 중의약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시작, 미구에 연변 중의학계의 큰 별로 떠오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영숙도 최필현이 졸업 전야에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그를 각근히 보살폈던 여인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필현이 서의에서 한의의 고수로 ‘탈주’하게 된 것도 병이요, 총각에서 결혼으로 ‘탈주’하게 된 것도 병이다.

  병으로 시작한 이야기 같은데요, 병을 치료하던 이야기를 하려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분에게는 병 이야기뿐입니다.

  최필현의 이야기는 그가 40개의 큰 자루에 넣은 책처럼 수두룩하다. 이 이야기의 어디엔가 있을 듯 말 듯 비낀 함박동의 다른 명인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으리라.

  아쉽게도 최필현은 2002년 회갑 나이를 앞두고 뜻밖에 사망했다. 소설 같은 그의 많은 이야기는 거개 지인의 추억으로만 전하고 있다. 그들이 머리에 떠올리는 최필현의 이야기는 자루마다 가득 차고 있었다.

  사위 신씨(申氏)에게 유난히 기억되는 장인은 그가 읽던 책인 것 같았다.

  그분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는데요, 짬만 나면 고금의 의학서를 탐독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경험 비방을 정리해서 “최씨의 임상경험 처방(崔氏臨證篇)”을 남기셨습니다.

 최필현의 가족 일동, 딸과 사위, 외손자는 모두 의학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40개 자루의 책 그리고 40리의 도보

  이야기 속에 있던 그 책들은 하마터면 한줌의 잿더미로 불에 날아갈 뻔 했다. 아니, 물에 잠겨 물귀신이 되어버릴 뻔 했다. 집에 뜻하지 않던 화재가 생기면서 물이 동이로 쏟아지는 난리가 일어났던 것이다.

  최필현이 연변 중의연수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던 그 즈음이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니 최필현은 또 연길시 중의원에서 한의사로 거의 10년을 있었고 와중에 장춘의 중의학원 교학병원 교수로 되었다.

  남편의 목숨 같은 책이었지요. 남편은 책을 손에 놓으면 가슴이 텅 비는 것 같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보조금을 받아 공부하면서도 저 책이다 하면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기어이 그 책을 샀답니다.

  집의 벽은 책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의학 서적이 3천여 권이나 되었다. 와중에는 보기 드문 고서도 여러 권 되었다. 필사본도 100여권 되었다. 호주머니의 사정 때문에 차마 살 수 없는 책이라면 며칠이고 손작업으로 베껴냈던 것이다.

  불이 나서 연기에 그을렸고 물이 흘러 젖어서 부풀었다. 최필현은 아내와 함께 책을 하나하나 그늘에 널어 말리고 돌로 눌렀다. 책은 최필현의 삶 그 자체였다.

  책 이야기가 나오니 뒤미처 공부 이야기가 따라 나선다.

  소학교를 졸업하는데 경제난 때문에 책을 내려놓아야 할 처지였답니다. 담임교원이 직접 찾아와서 큰 수재이니 어렵더라도 공부를 시키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소학교 때 대대장을 했었는데, 공부를 특별히 잘했답니다. 큰 어머니를 따라 용정에 나왔어요, 큰 어머니는 별다른 장사를 벌 일 수 없어서 빙궈(氷菓, 얼음과자)를 팔았다고 합니다.

  최필현은 백모의 손에서 자랐다.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떴고 모친은 재가를 했다. 백모는 조카를 데리고 용정 시내에 와서 단칸방에 세집을 잡았다. 손에 닥치는 대로 일감을 잡아 조카의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백모의 도움으로 최필현은 끝내 중학교 공부를 마쳤다. 연변의학원을 차석으로 입학했다. 특별히 의학대학을 선정한 이유가 있었다. 조부가 불구였고 백부와 부친이 젊은 나이에 졸사하였으며 그 역시 몸이 아주 허약했다. 그가 50대의 젊은 나이에 졸사한 원인도 여기에 있지 않을지 한다.

  대학교에서 보조금을 받았는데요, 달마다 단돈 18원이었다고 해요. 한 달 식비를 내면 동전 몇 개의 50전만 남아요. 휴일이나 방학에 집으로 올 때면 그 돈을 남기느라고 줄곧 용정까지 걸어 왔다고 합니다.

  연변의학원은 연길(延吉) 시내의 북쪽에 위치한다. 연길 시내를 가로질러 부르하통강(布爾哈通河)을 지나고 남쪽의 모아산(帽兒山)을 넘어 해란강(海蘭江)을 건넌 후 용정 시내에 들어간다.

  굴곡적인 길처럼 최필현이 걸은 길도 약간 굽이돌이를 지나고 있었다. 졸업 무렵인 1968년 최필현은 시내에 있는 방역소(防疫站)에 배치를 받았다. 일하고 먹고 사는 게 편한 공무원의 일터였다. 그러나 지금껏 오매불망 바라고 달려온 그 길은 정녕 아니었다.

  이때 최필현은 팔도(八道) 중심보건원(衛生院)을 선정했다. 팔도는 연길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20여리 떨어진 시골마을이다. 말이 시골마을이지 한때는 연길 시가지 못지않게 흥성거리던 고장이다. 왕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데다가 부근에 금광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었다고 한다.

  어찌됐거나 최필현은 행복했다. 제일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것. 그는 가족을 데리고 내처 10년 세월을 벽지의 팔도에서 보냈다. 이 10년은 또 그를 명의로 거듭나게 한 황금 세월이었다.

  향 병원에는 아직 그 무슨 전문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병자를 만나면 무슨 병을 치료해야 했어요. 처방이나 침으로 병자에게 효과가 없으면 집에 와서 의학 저서를 찾아보았습니다. 밤을 패면서 병의 원인을 찾고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은 ‘문화대혁명’ 후반이었다. 유명한 의사들이 연변 오지의 팔도에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국경 도시 도문(圖們)의 중의원 원장으로 있던 최현(崔鉉)도 이때 오류분자(五類分子)로 낙인 되어 팔도에 ‘정배살이’를 하고 있었다. 오류분자는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의 정치신분을 말하는데, 지주와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 분자, 우파를 이른다. ‘문화대혁명’ 시기 제일 먼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최현은 도문 100리 안팎에 유명한 명의였다. 임산부의 맥을 짚어보고 태아에게 달린 혹을 미리 읽은 ‘신의(神醫)’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오류분자라고 해서 병을 볼 수 없었다. 최필현은 낮에는 병원에서 병을 보고 저녁에는 그에게 달려가 진맥과 침술, 처방을 배웠다.

  최필현은 또 명의 이용희(李勇熙), 김인묵(金仁默) 등 연변 지역에서 소문난 명의들을 찾아다니며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명의가 원래의 고장으로 속속 복귀하자 최필현은 한동안 허전함을 금치 못했다. 주변에는 그에게 의학을 담론할 사람이 더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최필현은 수제자 오씨(吳氏)에게 명구 하나를 남긴다. 오씨는 팔도 태생으로서 일찍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옛날의 조실부모의 그의 아픈 경력을 오씨를 만나 다시 눈앞에 떠올렸을까, 최필현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오씨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오씨에게 책 ‘의약명사’와 ‘경험방(經驗處方)’을 주면서 수련을 거듭 부탁했다.

  풀과 나무가 연단(練丹)을 거쳐야 약으로 완성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요. 침과 약으로 병을 치료하는 사람도 공부하고 수련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의사로 될 수 있는 거요.

        10년을 산속에 지핀 연단(煉丹)은 마침내 금단(金丹)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최필현은 새내기의 의사로부터 동네방네 소문을 놓은 명의로 되었고 종당에는 팔도중심보건원의 원장으로 등극했다.

  최필은 선후로 용정의 오씨를 제외, 흑룡강성 계서(鷄西)의 이씨, 연길의 전씨 등 여러 지역의 소문난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와중에 최필현은 난이병 치료의 비방을 직접 만들어냈다. 많은 치료 임상에서 약효가 증명된 비방이었다. 간과 담, 위장의 병 질환을 치료하는데도 남다른 비방이 있었다. 또 뇌성마비의 후유증을 완화, 해결하는데 독특한 비법이 있었다. 일부 비방은 제약회사에서 거액으로 사겠다고 최필현에게 특별히 주문을 했다.

  뇌성마비는 병을 치른 후 신경 근육의 조절이 제대도 되지 않는데요, 흥분하거나 하면 증상이 더 심합니다. 그런데 이 비법으로 치료한 후 병자는 걸음걸이가 뚜렷하게 나아지고 또 말도 또렷하게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정영숙은 길에서 종종 낯선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알고 보면 예전에 치료를 받았던 병자들이나 의학을 전수 받았던 제자들이 감사했다고 그녀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인상에 없는 분들에게 문득 인사를 받고 놀라요. 그때는 병자도 그렇지만 제자가 너무 많아서 누군지 기억이 잘 안나요. 남편의 덕분에 제가 지금도 인사를 받고 있는 거지요.

  드디어 사람은 산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또 마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나무처럼 풀처럼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또 전설처럼 살아서 열매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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