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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산과 명인-제7편] '천당', 그곳으로 통하는 무지개가 피었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28일 09시44분    조회: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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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마치 하늘의 무지개가 불꽃처럼 피어오를 듯 했다. 무대 아래에서는 재청의 박수가 거듭 터지고 있었다. 삼청이 이어졌고 또 재창이 반복되었다. 노래를 여덟 곡이나 불렀고 40여분이 넘도록 무대를 내려설 수 없었다.

 

 중앙텔레비젼방송 음악무대에서 열창하는 김흥국.

 

  그날의 노래판에는 악대의 연주가 없었다. 가수는 풋내기이었고 또 급작스레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악대는 노래를 위한 악보를 미처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사 없는 노래라더니… 이번에는 반주 없는 노래였지요. 부지불식간에 마당놀이의 공연장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김흥국의 말이다. 그때를 돌이키면서 또 다시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의 흥겨운 마당놀이를 방불케 했다. 무대의 아래위가 모두 어깨를 들썽들썽하고 있었다. 미상불 음악의 천당으로 향한 문이 활짝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금세 황홀한 오색의 색깔로 떠오르고 있었다.김흥국의 이 등단은 실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기되었다. 연길시 꽃노을예술단에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예술단의 톱 가수가 목소리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예술단은 이튿날로 동북 3성 순회공연을 떠나야 했는데요. 당장 자리를 채울 인기 가수를 찾아야 했습니다."

  모든 순간들은 우연과 필연의 조화이다. 흡사 이때를 기다린 듯 김흥국이 귀신처럼 불쑥 나타났다. 마침 연변인민방송국의 한 음악편집이 예술단에 김흥국을 소개했던 것이다. 김흥국은 실은 그 무슨 가수가 아니었다. 한사코 그를 가수라고 부른다면 그보다 가수 지망생이라고 해야 하겠다. 허공에 날릴 노래 소리를 내놓고 손에 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백수이었다.

  김흥국은 원래는 벽을 흙으로 바르는 미장이었다. 열여덟 살 때 길림성 제7건축회사에서 일했다. 고향인 용정현 정부가 빈곤구제로 찾아준 일자리였다. 앓음 자랑을 하는 엄마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사는 집안은 몹시 가난했던 것이다. 맏이인 김흥국은 하루바삐 돈을 벌어 가족을 영위해야 했다. 6월 22일, 이 날짜를 김흥국은 머리에 뼈를 긁어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특별한 날이었다. 마침 그날 독일은 소련을 침공, 세계사에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1986년의 그날은 김흥국의 인생사에 지울 수 없는 한 페이지이었다. 18살의 나이로 직장생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때부터 김흥국은 6, 7년이나 내처 흙과 회, 시멘트 따위와 '전쟁'을 해야 했다.

  "첫 달의 봉급이 단돈 28원이었어요. 지전을 1원짜리로 바꿔서 다시 세어도 서른 장도 안 되었지요."

  봉급은 배고픈 창자를 겨우 달랠 수 있을 정도였다. 급기야 김흥국은 1993년에 하해(下海)를 했다. 그렇다고 뭍을 떠나 바다에 뛰어든 게 아니다. 그때는 공직을 버리고 사업을 벌이는 일을 이렇게 '하해'라고 불렀다. 김흥국은 은행의 대부금을 내서 담통이 크게 일을 벌였다. 탈이라면 흙이나 회, 시멘트를 벽에 썩썩 바르듯 돈을 버는 일도 쉽게 여긴 게 탈이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빈 털털이로 한지(閑地)에 나앉았다.

 

2017년 조선족전통음악연구회 연주회 마당에 함께 남긴 기념사진.

  홀로 집에 숨어서 우울하고 슬픈 마음을 달랬다. 노래로 여기저기 터진 상처를 꿰맸다. 즐거워도 노래였고 슬퍼도 노래였다. 실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몹시 즐겼다. 예전에 어린 김흥국의 애창곡은 영화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별'의 주제가였다. 이 노래는 1970년대 대륙의 남북을 흥행하고 있었다.

  작디작은 뗏목은 강물에 흐르고

  높디높은 청산은 강기슭에 서있네

  용맹한 매는 날개를 한껏 펼치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질지언정

  이때 김흥국은 작은 빗자루를 총대처럼 들고 구들 위를 뛰어다녔다. 이 시간만은 영화의 어린 주인공처럼 산을 오르내리는 꼬맹이 전사가 되고 있었다. 홍군(紅軍)이 장정하던 그 무렵 옛 근거지의 붉은 어린이들이 성장하던 모습은 이렇게 연변의 어느 시골집 이불 위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엄마가 함박꽃을 얼굴에 피웠고 짜개바지의 동생이 새끼오리처럼 뒤뚱뒤뚱 뒤를 따랐다. 가난으로 얼굴의 주름살을 펼 새 없었던 김씨네 집안에는 이때만은 잠시나마 웃음이 호박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릴 때 남의 노래를 곧잘 흉내 냈어요. 그리고 춤도 잘 췄고요. 어른들은 '끼'가 많다고 하던데요."

  그건 몰라도 목소리 하나만은 정말 좋았다.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청아했다고 한다. 김흥국은 이날 인터뷰를 하면서 자주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마다 시냇물이 갑자기 도랑을 파고 방에 돌돌 흘러드는 것 같았다.

  김흥국은 학교 때 노래경연을 하면 입상명단에 꼭 이름 세 글자를 올렸다. 김흥국은 늘 그때 그 시절의 노래 한 수를 기억에 떠올린다.

  우리네 꽃동산은 언제나 봄동산

  어찌하여 곱게 피었나…

  한때 연변의 동요 세계에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노래였다. 그 '꽃동산'처럼 김흥국도 미구에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라고 어머니는 버릇처럼 늘 말했다. 이 맏아들이 미구에 노래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언처럼 늘 말하고 있었다.

  실제 미장이로 되었어도 김흥국은 흙이 아닌 노래로 그의 세계를 분장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노래경연을 벌이자 단연 1등상을 차지했다. 그때 수상 작품으로 손거울 화장대를 받았다. 김흥국은 집을 드나들 때마다 화장대에 얼굴을 비쳐보았다. 아, 언제면 거울 속의 저 얼굴이 무대에 오르고 가요세계의 인기가수로 될까.

  기회는 운명처럼 불쑥 찾아들었다. 연길에서 '노래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황씨를 만났다. 황씨는 연변의 이름난 작곡가이자 가수였다. 황씨가 그 무슨 일 때문에 김흥국의 어머니를 찾아왔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노래를 배워달라고 황씨에게 거듭 부탁했다.

  몇 해 후 황씨는 가수를 찾는 꽃노을예술단에 노래 제자 김흥국을 소개할 수 있었다. 창법이 남보다 특이하고 개성이 있는데다가 춤도 잘 춘다고 하면서 김흥국이 노래와 춤을 함께 하면 관객의 호응을 받게 되리라고 언감 장담을 했다.

모친 노선녀와 함께 여유를 즐기는 김흥국.

  이 무명의 '가수'에게 예술단 단장은 처음에는 뜨악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인의 소개를 무작정 거부할 수 없었다. 김흥국에게 제일 부르고 싶은 노래 한 수를 당장에서 부르라고 했다. 그러자 김흥국은 주저 없이 한국노래 '꽃바람 여인'을 선택했고 무반주로 '꽃바람 여인'을 불렀다.

  가슴이 터질 듯한 당신의 그 몸짓은 날 위한 사랑일까

  섹시한 그대 모습 한 모금 담배연기 사랑을 그리며

  한잔의 샴페인에 영혼을 팔리라 세월의 향기인가

  다가 선 당신은 꽃바람 여인인가 나만의 사랑

  사랑의 노예가 되어버렸어 어쩔 수 없었네 꽃바람 여인

  단장은 '꽃바람'의 노래를 만나 흥겨웠고 '꽃바람'의 가수를 만나 즐거웠다. '꽃바람'을 탄 불청객은 곧바로 공연단의 임원이 되었다. 김흥국은 그길로 공연단에 합류하여 이튿날로 타지를 떠나는 차에 앉았다. 미처 공연 의상을 챙기지 못해서 남의 옷을 빌어서 입었다. 김흥국은 공연무대에 처음 올랐지만 그렇게 편하고 즐거울 수 없었다. 첫 공연이었지만 독창이었고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행운은 그에게 꽃바람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2002년, 김흥국은 성악시험에 응시하고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입사했다. 그때부터 김흥국은 마음껏 노래를 불렀고 마음껏 무대를 밟았다. 정작 큰 무대는 그로부터 10년 후에 올라섰다. 2013년, 중앙텔레비젼방송은 제일 아름다운 민족의 목소리를 찾고 신인가수를 추천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가수의 왕자 쟁탈전'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의 제1기로 몽골족, 티벳족, 위구르족, 회족, 조선족, 이족, 장족 등 7개 민족의 신청자를 층층이 선발하여 각 민족 가수의 왕자 즉 1등 수상자를 선출했다. 최종 선발전은 수도 북경에 가서 중앙텔레비젼방송국 음악져널의 무대에서 진행되었으며 전 과정이 방송되었다.

  김흥국은 흰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머리에는 흰 끈을 질끈 동여맸고 발목에는 흰 대님을 두르고 있었다. 발에는 버선과 짚신을 신었으며 등에는 지게를 걸머멨다. 발끝까지 논에 나선 옛 시골 농부의 차림새 그대로였다. 이때 그가 부른 노래는 '장백산 기슭은 나의 집'이었다.

  장백산 기슭은 나의 집

  진달래 만발하여 그 어디나 울긋불긋

  꽃향기 넘쳐나네

  이 세상 그 어느 명산인들

  내 고향 장백산에 비기랴

  이 세상 그 어느 꽃인들

  내 고향 진달래에 비기랴

  김흥국은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부지중 머리에 산이 생각났고 눈앞에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었다. 저도 몰래 머리에 집이 생각났고 눈앞에 어머니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방공연에서 노래를 선물하고 있는 김흥국.

 

  정작 어머니는 아들의 이 방송화면을 보지 못했다. 김흥국은 그가 북경의 방송무대에 올라선 소식을 일부러 어머니에게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병석에 앓고 있는 어머니가 너무 흥분해서 쓰러질까 근심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요독증(尿毒症)으로 앓다가 끝내 세상을 떴다.

  저 세상에 간 후에도 노선녀는 자주 아들을 찾았다. 꿈에 문득문득 나타나 아들을 만났다. 무슨 말인가 전하기도 했고 또 무슨 부탁인가 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흥국에게 어머니는 제일 바라는 게 하나 있었다고 말한다.

  "저 보고 노래로 꼭 성공하라고 해요. 꼭 성공할 수 있다고 해요."

  정말로 김흥국은 노래에 남다른 눈과 목소리의 천부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콩나물이 너울거리는 오선보를 잘 읽지 못했지만 노래를 누구보다 못지않게 잘 읽고 부를 수 있었다. 언제인가 그가 용정의 어느 무대에 올라 소리를 뽑자 고향 사람들은 뉘라 없이 절찬을 했다. 하늘에서 들리는 천사의 노래 같다고 했다. 과연 엄마는 천당의 그 세계에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목청껏 응원하고 있었던가.

  어느덧 김흥국은 무대에 등장하여 소문을 놓고 있다. 인제는 동네방네 인기 있는 가수이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은 임원이 160명, 와중에 가수가 16명이다. 1년 무료 공연이 200회로 5월초부터 10월말까지 공연이 지속된다. 혹간 객석의 분위기가 따분하면 노래로 흥을 올리는 자리에는 늘 김흥국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흥국은 어머니가 생각나면 노래를 불렀다. 천당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노래를 들려준다고 생각했다. 노래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모자의 둘뿐만의 소통이었다.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

  한국 노래 '미운 사랑'이다. 솔직히 저 세상으로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가 미웠고 야속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김흥국은 남달리 즐기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몽골족의 노래 '천당'이었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가수시험을 치게 되자 첫 노래로 선곡한 게 바로 이 '천당'이었다.

  푸르고 푸른 하늘이요

  파랗고 파란 호수물이라네

  아

  푸른 초원아

  여기가 나의 집이라네

  ……

  나의 집이여

  나의 천당이여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지개가 노래처럼 곱게 피어 있었다. 쥐일 듯 말 듯 반달 모양의 다리를 놓고 있었다. 이 땅과 저 땅을 한데 잇고 있었다. 그 원(圓)의 그 세계에는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었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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