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0)—반‘민생단’투쟁1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5월17일 10시22분    조회:57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억울한 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조선족항일전사들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꼬박 3년 4개월 동안 동만의 공산당과 공청단 및 혁명대오내에서는 조선인 당원간부와 항일전사들만을 타격한 억울한 사건이 빚어졌다. 일제와 총칼을 맞대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조선인전사들, 항일을 위해 목숨을 내건 조선인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삼단같이 쓰러졌다. 이 사건을 세칭 “반 ‘민생단’투쟁”이라고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 저명한 반일명장 주보중(周保中)은 “동만지구 당조직내에 적어도 50%의 민생분자가 있다고 하여 2000여명을 죽이였다. 동만 각 지방의 조직은 당, 단 특위, 현위로부터 아동단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적극분자들이 모두 살해되였고 사람마다 자기를 지키기에 인심이 황황하였다.”고 한바 있다.

반 ‘민생단’투쟁은 확실히 항일혁명대오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통계에 따르면 반 ‘민생단’투쟁의 피해자는 1000여명에 달한다. 그중 이름을 밝힐수 있는 피해자로는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김성도, 중공왕청현위원회 서기 리용국, 중공화룡현위원회 서기 김일환, 중공연길현위원회 군사부장 박동근 등을 비롯하여 560명이나 되고 피살자는 430명이나 되였다.

그럼 민생단이란 어떠한 조직이며 반 ‘민생단’투쟁이란 어떤 투쟁이였을가?

 

 

 
화룡현 어랑촌 십삼용사기념비

 

‘송노톨사건’

민생단이란 일제에게 투항한 조선민족개량주의들인 조병상, 박석윤이 룡정에 기여들어 공개적으로 조직한 친일반공적인 반동적 사회단체로서 1932년 2월 15일에 결성되여 그해 7월 14일에 해체되였다. 민생단은 창립된 그 날부터 반일혁명적군중들의 호된 타격을 받아오다가 일제의 제한과 동만반일혁명적 군중들의 강렬한 반대로 만 5개월 만에 자연 해산되였다.

중공연길현로두구위원회의 비서 ‘송노톨’은 30세 초반의 중년이지만 수염을 더부룩하게 많이 기른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를 ‘노톨’(老头儿 즉 늙은이)이라고 불러왔는데 1932년 8월경 그는 로두구 일본헌병분견대에 체포되였다. 일주일 남짓이 지난 후 항일유격구로 찾아온 그는 일본헌병대구류소를 ‘탈출’하여왔다고 하였다. 구당위 공산당조직에서는 그의 체포 및 탈옥과정에 대해 의심되는 바가 있었기에 원래의 구당위 비서직무를 취소하고 연길현농민협회에서 꾸리는《농민투쟁보》사에 보내여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조직적인 감시와 조사를 진행했다.

10월 16일, 세린하일대에서 활동하던 연길현항일유격대는 매봉산에 지형정찰을 나온 로두구분주소의 일본헌병 상등병 고노와 통역관 주모 등 3명을 발견하였다. 연길현유격대 장총대 분대장 최현은 분대원 4명을 데리고 가 상등병 고노 등 2명을 격살하고 주모라는 통역관을 생포하였으며 권총 3자루를 로획하였다.

통역관은 ‘토벌’하기 위한 군사략도를 그리러 왔다고 자백하면서 ‘송노톨’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심문한즉 그 놈은 ‘송노톨’은 헌병대유치장에 갇혀있을 때 헌병대에 매수되여 ‘민생단’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사명을 가지고 파견된 사람이라고 하였다.

특위간부들이 ‘송노톨’을 체포하여 심문하니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생사람을 잡는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헌병대 통역놈을 대면시키니 ‘송노톨’은 더 말을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렇게 되여 “누가 민생단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이 뒤따르고 ‘송노톨’은 빈사상태에서 묻는 대로 20여명의 조선인 간부와 열성분자들을 ‘민생단동료’ 라고 불어댔다. 이리하여 7월 14일 민생단이 자연해소 된 후 항일유격근거지 내부에서 새롭게 반 ‘민생단’ 투쟁이 일어나게 되였다.

당시 겨우 25세 밖에 안되는 중공연길현위 서기 한인권은 ‘송노톨’이 고문핍박에 의해 공술한 모든 말을 그대로 믿고 매우 당황하여 전 현 범위내의 중공 당조직과 공청단조직 그리고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등 모든 항일군중단체 내부에서 민생단숙청운동을 광범위하게 조직, 전개하였다. ‘송노톨’은 변절자, 주구밀정으로 인정되여 처형된 것은 두말할 것 없지만 그의 공술에서 지명된 20여명 사람도 즉시로 체포되여 심문받게 되였다. 잔혹한 육체고문과 지독한 공술핍박으로 하여 억지로 적발되여나오는 소위의 민생단원은 날로 많아졌다. 핍박공술에서 적발된 많은 사람들은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체포, 감금당하고 심문받았으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격화

그 해 겨울에 이르러 위자구에서 소위 공산당내 민생단조직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몇명의 공산당원이 팔도구 일본경찰분서에 가 귀순한 후 유격구에 돌아와 가족을 데려가려 할 때 체포된 것이였다. 계속되는 일본군경의 피비린 ‘토벌’과 극도로 곤난해지는 유격구의 생활, 거기에다 내부의 긴장한 반 ‘민생단’ 투쟁이 날로 험악해가는 상황에서 동요하고 투항변절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게 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격구공산당조직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내부에 잠입한 민생단의 작용으로 보고 반 ‘민생단’ 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당내에서 동요, 변절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고 반 ‘민생단’ 투쟁은 더욱더 격렬하게 전개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였다.

‘송노톨사건’을 도화선으로 연길현항일유격구에서 살벌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반 ‘민생단’ 투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룡현으로 번져져갔다. 1933년 3월 중공동만특위는 조직부장 김성도(金圣道)를 화룡현위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김일천, 리동규, 김락천(화룡유격대 정치위원) 등 5명으로 ‘청산위원회’를 조직하고 화룡현에서의 반 ‘민생단’ 투쟁을 조직, 지도하였다.

이들은 먼저 평강농민협회 책임자 리화춘을 체포한 후 자세한 심사도 하지 않고 군중대회에서 민생단이라 선포하고 즉시로 총살하였다. 이로부터 화룡현항일유격구에서도 반 ‘민생단’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김성도는 화룡현에 가 순시하는 2, 3개월 동안 혁명대오내에서 소위 민생단원을 수십명이나 살해하였다.

1933년 6월초, 중공만주성위의 대표단으로 반경우(潘庆友)와 양파(杨波)가 중공동만특위소재지인 왕청유격근거지에 오게 되면서 반 ‘민생단’ 투쟁은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6월 4일부터 소집된 중공왕청현위 제1차 확대회의에서 왕청현위가 지난날 “우경기회주의로선 밑에서 혁명적 현재단계를 뛰여넘어 쏘베트를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실행하려 하였으며 우경기회주의적 실질을 감추고 만주의 위대한 반일민족혁명운동을 보지 못했다. 그 착오의 내용은 한국민족주의자와 파쟁주의잔여와 립삼로선의 간여를 포괄하고 있었다”고 결론 짓고 현위 서기 리용국(李用國)과 군사부장 김명균(金明均) 등의 령도직무를 취소하였다.

면직당한 김명균은 불만을 품고 부인을 데리고 가만히 유격구를 빠져나와 도망쳤으나 이튿날 도중에서 유격대에 발견되여 체포되였다. 유격구에 감금되여 조직심사를 받던 김명균은 깊은 밤중에 기회를 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를 감시하던 리건수는 민생단으로 지목되여 총살당했다.

이 사건은 동만특위를 긴장시켰다. 이들은 원 왕청현위 서기 리용국, 조직부장 석초 등 20여명의 당정군 간부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새로 임명된 현위서기 김권일(金权一)도 체포한후 모두 소왕청유격구에 감금하였다.

만주성위대표단은 왕청에서의 문제해결을 마친 후 양파는 연길현으로 가고 반경우는 특위 서기 동장영의 안내하에 훈춘현 대황구유격근거지에 이르러 훈춘현 공산당과 공청단 확대회의를 7일간 소집하였다. 반경우와 동장영은 중공중앙과 만주성위의 지시정신을 전달하고 훈춘현위가 ‘좌’ 경로선을 집행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이 지구에 쏘베트를 건설한 것은 ‘좌’경로선이고 민생단의 책동이다.”고 질책하였다. 이들은 5월달에 이미 희생된 원 훈춘현위 서기 서광(徐光)을 지명비판하고 현위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령북유격대 정치위원 박두남을 파쟁분자라 비판하고 그의 중공당 당적과 정치위원 직무를 취소한다고 선포하였으며 권총까지 회수하였다.

7월 20일, 반경우는 김남규네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집 뜨락에서는 한개 분대의 유격대원들이 한창 식사준비를 하면서 새로 로획한 일제 3.8식보총을 돌려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박두남도 그 총을 구경하겠다고 넘겨받은 후 인차 총알을 재워넣고 문앞에 달려가 반경우를 겨누면서 소리쳤다.

“애매한 박두남을 죽이려 하는 네 놈이 먼저 죽어야 한다!”

박두남의 웨침소리에 뒤이어 총소리가 울리고 반경우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다. 명사수인 박두남은 쓰러진 반경우의 몸에서 재빨리 권총을 빼들고 유격대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에게 덤벼들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 나서 산림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반경우의 피살은 동만특위에 있어서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동만특위에서는 선전부장 리상묵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을 직접 령도하게 하였다. 리상묵은 훈춘 공산당조직, 정부, 유격대와 군중단체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무단적으로 선포하고 현위위원 오일파 등 구급 이상의 주요간부 60여명을 체포하여 령북, 령남의 3개 구류소에 감금, 반년 남짓한 기간내에 갖은 흉악한 고문을 들이대여 6차에 나누어 60여명 간부중 한창혁 한사람을 제외한 전부를 총살하거나 타살하였다. 그리고 지주, 부농 가정출신인 자, 문장을 쓸 수 있는 지식인, 로간부, 과거 조선독립군과 조선공산당 당파에 참가했던 자, 공작중에 착오가 있었던 자, 공작표현에 이상이 있다고 보이는 자, 유격구의 생활곤난에 불평표현이 있었던 자, 심지어 식사중에 밥알을 흘린 사람까지도 모두 민생단원이라고 몰아치면서 그중 100여명이나 체포, 학살하여 전체 유격근거지가 내부공포에 빠지게 하였다.

1934년 1월, 공청단만주성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1933년 8월 1개월간 동만에서 민생단을 크게 파괴하였는데 항일유격구와 유격대내에서 민생단 200여명을 발견하고 그 수령 12명을 선택하여 총살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9
  • 박환 수원대 교수 '戰友' 발표…안중근의사를 모델로 독립의식 고취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방향 연구에 귀중한 자료"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맹활약한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의 기관지인 '전우(戰友)' 3호의 전문(全文)과 이에 관한 연구결과...
  • 2015-09-11
  • 첫 공개 기관지 '戰友', 여학교 세워 운동가 양육 호소 '여성 안중근' 남자현의 양녀 '이장청' 독립운동 첫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일제강점기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노선과 활약상 등을 보여주는 자료가 공개됐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가 '한국민족운동사'...
  • 2015-09-11
  •   ▲ 재외한인학회가 국가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국내거주 재외동포와 인권’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서울=동북아신문]“사할린의 역사를 슬픈 역사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됐다. 1920년대 사할린 이주자들은 개척자에 가까웠다. 이들에게는 개척지의 특혜가 주어졌고, 당시의 조선인들은 ...
  • 2015-08-28
  • 이민사 150년 최우선 가치는 인권의식에 기초한 인간존중의 인문정신 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해방, 1948년 건국, 1950년부터 3년간 펼쳐진 6·25 전쟁 등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판 삼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다. 광복 이후 70년의 위대한 여정은 이승만 박정희...
  • 2015-08-14
  •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일본군, 성인 남자들 교회 가두고 불질러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12) 중국 (中) 북간도 ‘제암리 사건’, 경신참변 일어난 룽징 장암동 장암동은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약 13㎞ 떨어진 곳에 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 2015-05-14
  •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1855~95)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압송 사진의 이본(異本·위 사진)이 발굴됐다.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가 미국 럿거스대 도서관 소장자료에서 발굴해 23일 공개한 사진은 기존 사진과 몇 초 차이를 두고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전봉준을 실어 나르는 ...
  • 2015-04-24
  • [일요신문]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1910년 경술국치조약으로 일본에 합방된 대한제국은 1945년 8·15 광복을 맞을 때까지 기나긴 암흑기를 보냈다. 일제강점기 36년간의 어두운 역사는 한편으론 끊임없는 항일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 곳곳에서 각자의 지향점과 역할에 맞...
  • 2015-04-15
  •     중국인민항일전쟁·세계반파쑈전쟁 승리 70돐 기념 로간부대학 100여명 학생 참여 전통 청명제로 치러 금요일 오전 9시 30분경, 연변예술극장남쪽에 있는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앞에서 순난자추모식이 조선족전통 청명제로 치러졌다. 제관(제사에 참례하는 사람) 한명이 제물상앞에 나...
  • 2015-04-11
  • 한국 찾은 이칭타오 뤼순구장 “유해 발굴도 최선 다해 돕고파” 安의사 훈춘 유적도 복원키로 “일제에 저항한 안중근 선생은 한국인에게 영웅이지만 중국인에게도 영웅입니다. 다롄 시민들은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해 군항제’를 참관하기 위해 방한한 중국 ...
  • 2015-04-06
  •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당국이 북한, 러시아와 접경한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시에 있는 안중근 의사 거소(居所) 유적 복원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3일 옌볜 소식통들에 따르면 훈춘시는 취안허(圈河)촌에 있는 안 의사 거소 유적을 복원하기로 하고 관광객 유치 방안 등을...
  • 2015-04-04
  • 《3․13》운동의 4명 령수중 한명인 김하규선생 묘소 20여년만에 끝내 찾아 중한 유가족들 조선문간행물을 통해 추적,《길림신문》보도 결정적단서 제공   조선문간행물을 펼쳐보이며 증조부 묘소를 찾은 이야기를 자총지종 설명하는 김윤동과 그의 부인 장춘의 퇴직로인 김윤동(78세)은 요즘 반일운동가인 증조부 김...
  • 2015-03-31
  • 박삼중 스님은 자나깨나 염주 두 개를 가지고 다닌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형수 둘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스님은 “힘들 때마다 그들의 영혼을 불러낸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형수의 대부' 박삼중 스님 3·1절 아침이다. 95년 전 조선 땅 곳곳에서 대한독립을 향한 열망이 들...
  • 2015-03-13
  • 7월18일 오전 6시 택시를 타고 연길시 인민공원 옆 시장(市場)으로 갔다. 이명학 국학운동시민연합 국장, 류경성 광주국학기공연합회장과 함께였다. 택시요금은 6위안. 내린 곳은 인민공원이다. 시장은 인민공원 건너편에 있다. 인민공원에 몇몇 사람들이 나와 기공 등 운동을 한다. 공원 안에는 무대 시설이 있다. 인민공...
  • 2014-11-20
  • 여성항일 의병 윤희순 의사가 中에 세운 학교 `노학당' 유지비 훼손 파문 윤 의사가 1912~1915년 교장으로 재직 항일 인재 양성 독립운동가 우당 선생 후손이라 주장하는 조선족이 훼손 중국내 절차 까다로워 내용 다시 바꾸기 쉽지 않아 문제 광복절을 앞두고 조선·중국인의 항일투쟁 교육의 산실이었던 노학당...
  • 2014-08-15
  •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확장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중국 하얼빈시 조선민족사변촉진회 서명훈(84) 명예회장은 지난 7일 하얼빈에서 가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중국 정부는 현재 하얼빈 역사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기념관을 신축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4.8.14 > photo@...
  • 2014-08-14
  •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회장 윤병석 명예교수)는 23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간민회’를 주제로 첫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간민회는 1907년 간민교육회로 출발해 13년 청나라가 망한 뒤 원세계가 집권하던 시기에 결성된 최초의 한인 자치기구로 현재 조선족 사회의 토대를 만들었다. 5년만에 일제의 강압으로 해산...
  • 2014-05-20
  • 김약연은 1868년 9월 12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여났다.   김약연이 연변--당시의 간도로 이사올때 찍은 사진. 1899년에 가정을 이끌고 명동--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으로 이사 와서 조선인집단부락을 세웠다. 1875년, 8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오삼렬(吳三烈)·남종구(南宗九)·주봉의(朱鳳儀...
  • 2014-01-14
  • 안중근의사. 그는 일찍 이등박문을 꼭 죽이겠다고 손가락을 끊어 맹세했다.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이 탄 렬차가 들어서기직전의 할빈역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이등박문이 렬차에서 내렸다. 이등박문은 로씨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렬차에서 회담한후 로씨아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렬차에서 내...
  • 2013-12-09
  • 현 연길시 인민정부(원 주정부)청사 북쪽에서 50메터 떨어진 주택구역에 완벽하게 보존된 청나라건물 수변루(戍边楼)가 있다.   100년도 넘는 력사의 세례를 거친 수변루. 지금 연길시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길림변무도독이란 오늘날의 주정부를 뜻한다.   1907년 7월에 연길변무방판(延吉...
  • 2013-10-24
‹처음  이전 1 2 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