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조선족력사(44)-제2차 반‘토벌’투쟁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6일 10시49분    조회:45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일본군 ‘보보점령’전술로 모조리 죽이고 불살라

유격대 적후서 일본군 위만군 습격 군수창고 소탕

소왕청작전

1933년 11월 17일, 일제는 6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소왕청유격근거지, 연길현 왕우구, 삼도만유격근거지,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자, 남구유격근거지를 불의에 포위공격해왔다. 일제의 토벌중점은 왕청유격근거지였다. 1,500여명의 일본군, 위만군, 자위단이 3개 방면으로 소왕청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기는 아군의 군정지도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마촌과 리수구를 련거퍼 폭격하였다.

왕청유격대의 반‘토벌’투쟁의 총성은 뾰족산과 마반산에서부터 울렸다. 유격대와 적위대는 유리한 산세를 리용하여 적을 진지 가까이까지 끌어들여 매복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적들은 뽀족산 앞자락에서 60메터 상거한 곳에까지 기여들었다.

“땅, 땅...”

유격대는 불의에 집중사격을 들이대는 한편 작탄세례, 돌세례를 안겨 달려드는 적들을 요정냈다. 경사가 급한 산벼랑으로 돌사태가 쏟아져내릴 때 전장을 들었다 놓는 벼락치듯한 소리와 포연을 방불케 하는 자욱한 먼지구름은 침략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유격대의 드센 반격에 적군은 악착같이 달려들었으나 전초진지를 한걸음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편 산기슭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군경의 ‘토벌’에 불타고 있는 집들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등뒤로부터 우박같은 총탄이 쏟아졌다. 유격대원들은 미리 반대편 산 우에 매복해있었던 것이다. 배후의 공격까지 받은 적군은 10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포수대로 조직된 수십개의 저격조는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을 쏘아눕혔고 부녀회원들은 주먹밥과 더운물을 이고 전호를 오르내렸다. 아이들은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전투원들의 사기를 돋구어주었다.

마반산 쑥밭골 초소에서 적을 저격하던 방차대는 새벽부터 쑥밭골을 포위하고 달려드는 적들과 치렬하게 싸웠다. 귀틀집초소가 불에 타 허물어질 때까지 적의 진공을 7차례나 물리치면서 영용히 싸운 방차대원들중 총탄을 열세군데, 일곱군데, 세군데, 두군데 맞은 유격대원도 있었다. 그 후 왕청유격구 사람들은 그들을 이름 대신 ‘13련발’, ‘7련발’, ‘3련발’, ‘2련발’이라고 불렀다.

적의 대병력이 뾰족산과 마반산 진지에 련속 투입되자 유격대는 전면방어전으로부터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였다.

새로운 전술적 조치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반군사조직 성원들과 함께 전초진지들에서 철수하여 유격구의 깊이에로 적을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의 천변만화한 전술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통쾌하게 때리였다.

불무지작탄전은 그 효률이 100%였다. 유격대는 진지를 옮길 때마다 다음 계선으로 철수하면서 불무지들에 작탄을 파묻게 하였다. 적들은 아군의 방어진을 차지하기 바쁘게 불무지 앞에 모여들어 언몸을 녹이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작탄이 폭발하면서 적들은 무리죽음을 당했다.

유격대는 적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전도 자주 조직하였다. 2―3명이나 4―5명 규모로 무어진 습격조를 적진 속에 들여보내여 적군와해를 위한 삐라도 뿌리고 총도 몇발씩 쏘고 오게 하였다. 적의 천막이나 불무지 같은 곳에 총을 서너방만 갈겨도 온 숙영지가 수라장이 되군 하였다. 이런 야습은 하루밤 사이에도 세번, 네번, 지어는 다섯번씩 하는 때도 있었다. 적들은 온밤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에 떨거나 저희들 끼리 헛총질을 해댔다.

그러나 적들의 전술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유격구로 쳐들어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 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피스톤식 ‘토벌’이 아니라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숙영하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여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가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리행하였다.

일본군의 포화에 재더미가 된 소왕청을 뒤에 두고 주민들은 십리평으로 피난하였다. 적들은 유격대에 검질기게 달라붙어 장기전을 시도하는 한편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족족 죽였다.

한달가량 소왕청 반‘토벌’전투를 진행하면서 유격대는 적군 200여명을 소멸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항일군민 1000여명이 죽었다. 거기에다 반‘민생단’투쟁까지 겹치여 유격근거지는 인심이 황황해졌고 공산당과 유격대의 력량이 엄중히 쇠퇴되였다.

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공왕청현위는 소왕청유격구를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1934년 1월의 어느 날 밤, 항일군민들은 적들의 방위가 허술한 서대파와 쟈피거우를 돌파구로 하여 포위망을 뚫은 후 대황구와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했다.

적아간의 공방전이 가렬하게 진행되던 어느 날 유격대 정위 김일성의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는 건의하에 유격대는 두패로 나뉘여 작전하게 되였다. 한패는 최춘국의 지휘하에 십리평을 지키고 다른 한패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적구로 나갔다.

2월 중순, ‘토벌’대는 십리평항일유격근거지를 거듭 진공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과 특위기관은 부분적 유격대과 군중들과 함께 십리평 묘구의 대북구일대로 전이했다. 3월 21일, 적군이 포위해왔다.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는 전투에서 중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동장영은 설상가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조선족녀전사 최금숙(왕청현부녀회 주임)은 비발치는 탄우 속에서 동장영을 업고 포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동장영은 최금숙에게 업힌 채 희생되고 최금숙도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적들의 등뒤를 들부시다

김일성의 지휘하에 유격대 한개 편대는 밤 어둠을 타 배밀이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후방으로 깊이 들어갔다. 예견 대로 적후방은 오히려 텅 비여 있었다. 그 때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맨처음 친 것이 량수천자의 적이였다. 우리의 벼락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자위단이 녹아나고 일본령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였다. 량수천자에서 적후교란전의 첫 총성을 울린 우리는 멀리로 사라지는 척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 곳에서 이동하는 적자동차수송대를 습격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우리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새 전투를 준비하였다. 1934년 2월 16일 밤, 북봉오동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은 모두 우리 부대에 의해 살상포로되였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방향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동골에 있는 삼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 ‘토벌’을 분쇄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 사이의 철길을 끼고 있는 주요 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 ‘토벌대’로 변장한 유격대는 100여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 조로 나뉘여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후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 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여일전의 출발지점으로 퇴각하였다.

기타 유격구에서의 반‘토벌’전

연길현유격구는 대부분이 야산지대여서 적들에게 쉽게 로출될 불리한 형편에 있었다. 일제는 “연길현 공비소굴을 완전히 소멸한다”고 장담하면서 포위공격해왔다.

적들은 연길현 팔구와 왕우구 등 유격근거지에 이르자 야포와 박격포 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유격대를 공격했다. 부암에서 벌어진 첫날 전투에서 유격대의 명사수들은 적 50여명을 사살했지만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적들은 유격대와 군중들이 집중되여있는 사방대를 향해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해왔다. 적들은 사방대의 관문인 작살바위유격대 진지를 맹포격하면서 아군의 방어선을 뚫으려 들었다. 작살바위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은 적을 근거지에 접근시켜놓은 후 맹사격을 들이대 쓸어눕히기도 하고 바위돌을 굴려 대갈통을 박살내기도 하면서 하루 동안이나 고수했다.

1933년 12월 24일부터 1934년 2월 21일까지 연길현유격대 주력은 연길현 삼도만유격근거지 일대에서 적들과 격렬한 반‘토벌’전을 벌리였다. 1934년 2월초 연길현경찰국장 및 경찰대 대장이 령솔하는 300여명 적들은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거 진공했다. 삼도만유격근거지 군민들은 련속 14일간 적과 23차 교전하여 150여명을 섬멸하였다. 3월 29일, 김순덕과 왕덕태, 남창익 등이 인솔하는 유격대는 연길현 팔도구의 삼상촌과 장재촌 사이에 매복하여있다가 ‘토벌’하러 오는 팔도구 경찰대와 자위대를 공격하여 경찰순경부장을 비롯한 일본군 몇명을 격살, ‘토벌’을 격퇴시켰다. 같은 달, 연길현유격대 한개 지대는 삼도만 소묘구에서 ‘토벌’대 15명을 사살하고 총 13자루를 로획했다.

유격대는 근거지보위전투를 벌리는 동시에 부분적 병력을 적후에 파견하여 적 병영과 군사요새를 습격하였다. 1934년초, 연길현유격대 한 부대는 로동자들의 배합하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천보산동은광에 쳐들어가 대량의 탄약과 광산경비대의 총을 로획했다.

화룡현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일본군을 쳐부셔 기타 유격근거지 군민들의 반‘토벌’전을 유력하게 지원했다. 유격대 대장 차룡덕은 유격대를 이끌어 삼도구의 일본경찰대를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30여명을 격살했다. 유격대는 또 청두골에서 매복전을 벌려 일본수비대를 공격, 군용자동차를 훼멸시키고 30여명을 격살했다.

훈춘현유격대도 대황구와 소오도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려 50여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유격근거지내에서 반‘민생단’투쟁을 벌려 많은 령도간부와 전사들을 의심하고 처결하는 바람에 유격대의 사기가 저락되고 인심이 황황하여 반‘토벌’전에서 작전을 순조롭게 조직할 수 없어서 중대한 손실을 보기도 했다.

1934년 봄, 동만 4개 현의 유격근거지 군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여 적들의 ‘토벌’과 맞섰다. 근거지의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량면으로 유격대를 지원하였다. ‘토벌’군이 쳐들어와 무차별 학살과 방화를 했으나 군중들은 추호도 굴하지 않고 불탄 집터에 불도 꺼지기전에 다시 집을 지었다. 적들이 소각하면 짓고 또 짓고 하여 심지어 한 집터 우에 서른두번이나 집을 짓기까지 하면서 유격대와 혼연일체가 되여 근거지를 보위하면서 ‘포위토벌’을 분쇄했다. 이번 반‘포위토벌’을 통하여 유격대와 공산당조직은 더욱 장대해졌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이 펴낸 ‘… 사령관 양세봉’ “20여 년의 오랜 기간 동안 조선 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한 조선 치안의 암(癌)이다.”    조선총독부가 만주에서 활동한 무장투쟁 세력인 ‘조선혁명군’을 평가한 내부 문건이다. 불치병에...
  • 2017-06-14
  • 中 톈진 ‘한중 관계 역사와 현황’ 국제학술회의서 집중 조명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한중 공동의 항일투쟁사에서 한중모순의 해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19일 중국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에서 열린 ‘한중 관계의 역사와 현황’ 국제학술회의에서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항...
  • 2017-03-31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4) □ 리 함 1 중국혁명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에서 1927년에 조직된 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3대봉기로 일컫는다. 이같은 3대봉기에 모두 우리 겨레가 참가하였으니 1927년 8월 1일에 일어난 남창봉기에 우리 겨레 수십명이 참가하고 피를 흘렸다면 이 해...
  • 2017-02-28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3) ■ 리 함 1 2009년 7월 9일 여름방학 시간을 타서 대학에 다니는 쌍둥이 큰딸애 설이와 함께 강서 남창 도심의 8.1남창봉기기념관을 찾았다. 때는 오전 9시경. 8.1남창봉기기념관은 남창시 중산로 380번지에 위치하고있었다. 남창봉기기념관 정문에 들어서니 1983년...
  • 2017-02-28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 ◈ 리 함   주문빈  /자료사진 근 20년전까지만도 조선족항일운동사 연구가로서의 모택동주석의 높은 긍정과 평가를 받은 1938년 봄 개란탄광대파업이 당년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로 부임된 조선족 주문빈에 의해 조직지도되였다는것을 알았지만 주문빈...
  • 2017-02-28
  •   인민넷 조문판: 기자가 연변혁명렬사릉원관리처에서 료해한데 따르면 렬사정신을 발양하기 위하여 연변혁명렬사릉원에서는 지난해 40만원을 투자해 렬사기념비 대리석받침대를 새로 보수하고 연변혁명기념관 진렬전람에 대해 부분적인 개조를 진행하여 렬사사진과 실물자료 등 시설을 증설했고 최근에는 동장영, 리...
  • 2017-02-20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31) ◇ 리 함 1 2010년 여름방학, 운남의 곤명과 대리-려강-샹그릴라(大理-丽江-香格里拉)등지 가족유람을 마친후 나는 가족과 헤여져 홀몸으로 사천, 귀주 홍군장정 답사길에 나섰다. 그날은 8월 13일, 오후 5시에 운남땅 샹그릴라를 떠나 뻐스는 이튿날 8월 14일 이른새벽 5시에 48...
  • 2016-10-28
  •   서일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0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서일 총재의 항일투쟁유적 기념비. 서일 총재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 [아시아투데이 김인희 기자] 헤이룽장성 쑤이펀하(중국)/ 아시아투데이 김인희 기자 = 허룽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시에서 하룻...
  • 2016-07-07
  •     중국 지린성 허룽시 청산리에 있는 청산리대첩 기념비. 높이 20여미터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으며 하단에는 당시의 전투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자유시 참변 95주년 역사기행 대한독립군단의 발자취 따라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드는 대장정 지린성 허룽시(중국)/ 아시아투데이 김인희 기자 = ‘과거...
  • 2016-07-06
  • ‘청산리대첩’은 항일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록된다. 1920년 10월 21일 새벽 김좌진·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의해 실시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22일 천수평전투와 이랑촌전투, 23일 맹개골전투와 만기구전투, 홍범도 부대가 치른 완루구 전투, 25일부터 이틀간의 고동...
  • 2016-05-21
  •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잘 보세요, 제가 남자치곤 잘 생겼지요?” 서철(徐哲) 옹은 인터뷰 도중에 이렇게 엉뚱한 물음을 불쑥 던져왔다.   서철 옹은 중국 공안부의 전 요인이다. 둘째 형 서파(徐波)도 명인, 약 70년 전에 벌써 대령의 계급장을 달았던 인물이...
  • 2016-04-05
  • [미국 현지 인터뷰] 약산 김원봉의 조카 김태영 박사 ▲  영화 중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 ⓒ 케이퍼필름 관련사진보기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개봉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누적 관객수 1000만을 훌쩍 넘긴 영화 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선생(조승우 분)의 등장 장면 대사다. 이 영화를 통해 김원봉 선생에 대한 재...
  • 2015-09-24
  • (연길 도심 남쪽에 위치한 연변예술극장, 80여년전 이곳에 연길감옥이 있었다.)   2013년 5월, 연길 도심 남쪽에 위치한 연변예술극장(延邊藝術劇場) 주변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낡은 집 개조공사를 벌이던 현장에서 불현듯 녹이 뻘겋게 쓴 족쇄가 발견된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섬뜩한...
  • 2015-08-16
  • 1940년, 홍기하(紅旗河)의 기슭에서 역사에 회자되는 큰 전투가 발생했다. 일본 마에다(前田) 토벌대가 항일부대의 매복습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이다. 홍기하는 두만강 상류에 있는 작은 지류이다. 연변박물관 김철수(金哲洙) 전 부관장은 연변지역의 항일투쟁사에 연구가 깊은 사학자다. 그는 홍기하전투는 아주...
  • 2015-08-16
  •           그녀의 일본 이름은 가미오찌노미쯔꼬, 1937년 1월 4일, 일본 후꾸시마껜 이시가와군의 한 평민가정에서 출생.   1941년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밀산시에 와 살았다.8세때 '8.15광복'이 오자 일본으로 피난도중 부모와 동생을 잃고 오빠에게도 '버려&...
  • 2015-08-08
  •   이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 그가운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오늘은 인생의 황혼녘에 선 갑삭한 88세 로인의 묵직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60년만에 빛을 본 편지 2000년 청명, 룡정시 개산툰진의 김문필옹(당시 73세)은 해마다 그래왔던것처럼 안해 강금자씨(올해 81세)가 정...
  • 2015-07-01
  •   축구는 연변의 “명함장”으로서 전래(传来) 순간부터 그 열이 식을줄 몰랐다. 더구나 요즘 전국 상하가 축구로 분위기가 화끈한 가운데 연변축구는 “동산재기”로“축구고향”으로서의 그 명예를 되찾음이 바람직한것이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다면 중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
  • 2015-04-03
  • 독립운동가 3대의 기록 펴낸 김주영씨 ▲ 김대지(왼쪽) 선생과 아들 김명씨. photo 김주영 “독립운동의 기억을 가진 독립운동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사(史)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데, 그마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잊혀지고 묻힐 민족 저항의 역사를 어찌 독도나 동해...
  • 2015-03-10
  • 《내두산항일밀영》을 찾아 1935년 겨울 내두산근거지 보위전이 벌어졌던 왕덕산. 31일 아침 8시, 장백산아래 첫 동네로 불리우는 내두산촌을 향해 우리는 연길을 출발했다. 내두산촌 촌가를 작사하고 내두산관광촌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있는 작가 김춘택씨의 가이드를 받으며 떠난 답사길이였다. 우리 일행은 202성도를...
  • 2015-02-03
  • 7월 18일 명동촌에서 나와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철혈광복단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설, 김준, 박웅세 등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기관지 발행과 무기구입 등을 목적으로 1920년 1월 4일 용정 동량어구에서 일본은행권 15만원을 탈취했다. 이 거사를 후세...
  • 2014-12-1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