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항일유적지 답사 실기(9)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15일 10시56분    조회:67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항일유적지 답사 실기(9)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리진룡장군 《의렬비》와 《우씨부인묘비》

            김창영


  청명전이라 하루해는 짧았다. 어둠이 온 산야를 뒤덮은 뒤에야 일행은 소괴마자 로학당 옛터를 떠나 관전만족자치현 청산구진 은광자촌으로 향했다. 말 그대로 어둠 속 강행군이였다.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시골의 산길을 고즈넉했다. 일행을 태운 봉고차의 엔진소리 만이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와중에 간혹씩 마주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빛이 산골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군 했다. 그렇게 밤중의 산길을 약 두시간 달려 여덟시 반이 지나 청산구진에 도착하였다.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 미리 련락해놓은 은광자촌의 민박에 행장을 풀었다. 전정혁 주임이 이튿날의 일정을 념려하여 서둘러 취침할 것을 주문했다. 허나 때묻지 않은 은광자촌의 저녁밤을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다. 저녁 식사 때 맥주 한잔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주인 량반께 맥주 두병을 주문했다. 인정 많은 주인량반은 껍질을 까지 않은 생땅콩 한접시를 덤으로 가져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땅콩에 맥주 두병을 다 마시는 동안 리진룡장군과 우씨부인, 그리고 옹근 한세기 동안 리진룡장군과 우씨부인을 기리는 은광자촌의 촌민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이튿날 이른 새벽, 노크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 먼동이 틀 무렵이였다. 서둘러 세수를 끝내고 일행을 따라 봉고차에 올랐다. 일정을 다그치기 위해 아침 식사 전 리진룡기념원을 먼저 찾기로 한 것이다. 민박집에서 리진룡기념원까지는 엎디면 코 닿을 곳이라 이내 도착했다. 기념원 앞을 감돌아 흐르는 소아하는 얼어붙었던 얼음이 군데군데 풀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평상시 기념원을 돌보고 있는 류덕운로인이 얼음덩어리를 광주리로 기념원 둘레에 있는 진달래꽃나무 밑둥에 옮겨놓고 있었다. 기온이 올라가 얼음이 녹으면 진달래꽃나무가 잘 자란다는 것이였다. 4대 째 은광자촌에서 생활해 온 류덕운로인은 할아버지는 리진룡 장군과 이웃으로 각별한 사이였다면서 기념원 관리에 온갖 정성을 쏟고 있는 분이다. 
 


 

  기념원 입구 좌측에 “리진룡기념원”이란 글씨가 새겨진 높이 2,2메터, 너비 1,7메터의 청석 표지석이 있고 우측에 리진룡의 항일사적을 기록한 높이 2,5메터, 너비 2메터의 비지(碑志)석이 있었다.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기념원의 핵심 표징인 의렬비(義烈碑)와 우씨묘비(禹氏墓碑)가 있었다. 의렬비와 우씨묘비는 1919년 당지의 민중들이 리진룡부부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것으로서 근 한세기 동안 당지 사람들의 자발적인 보호하에 지금까지 보존되여왔다. 
 


 

  일행중 우승희씨는 리진룡장군의 처(우씨부인)손자다. 우승희씨가 나서서 의렬비와 우씨묘비 앞에 술을 부었다. 일행을 고개 숙여 묵도를 했다. 의렬비에는 아래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선의사 리공진룡 렬부우씨와 함께 곰 잡았노라, 남편은 나라 위해 죽었으니 문산의 충성이며 부인은 남편 위해 숨졌으니 충실의 가풍일세. 해지면 달 솟아 봉황은 쌍쌍이 날고 두 충렬 굳게 믿고 영원한 빛 뿌리고 있네 -- 기민년3월 일"(《朝鮮義士 李公鎭龍,烈婦禹士 倂同取熊,夫爲國死 文山之忠,婦爲夫殉 洪室之風,日沈月升 鳳ㅑ凰翔,忠烈相資 吾道之光,---屠維協洽三月日》
 

  우씨부인묘비명은 "유명조선국렬부유인우씨묘 영력5기미 3월 일" (《有名朝??烈?孺人禹士墓---永?五己末三月日 》)라 새겨져 있었다. 
 


 

  전정혁 주임과 우승희씨는 리진룡장군과 우씨부인의 사적을 손금보듯 알고 있었다. 리진룡장군은 1879년 조선의 황해도평산군신암면장동리에서 부친 리영배와 모친 려흥민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여났다. 자는 석대(錫大), 석산(錫山) 또는 서산(瑞山 ), 운서(云瑞 )이고 호는 기천(己千)이며 본관은 서산리씨(瑞山李氏)이다. 

  1885년 리진룡은 6살 때부터 당대의 대학자인 의암(毅菴 ) 류린석(柳麟錫)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세에 이미 경서(經書)에 통달할 만큼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며 기골이 장대한 남자로 건강하게 자라났다. 당시 조선왕조 훈련원 판관이고 류린석선생의 문하이며 대유학자인 우병렬( 禹炳烈 )은 리진룡의 뛰여난 재주와 성품을 인정하여 자신의 큰 딸을 리진룡에게 시집보냈다. 리진룡은 류린석선생의 문하에서 열심히 학문을 닦으면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리진룡은 1909년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주살할 때 의거용 무기와 자금을 제공한 동시에 국내외를 오가면서 50여차에 달하는 의병무장투쟁을 이끌었다. 1910년 6월 연해주에서 13도의군조직이 성립될 때 의원에 추대되였다. 1911년 10월 그는 부대의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가족들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청산구 은광촌으로 이사해왔다. 리진룡은 관전현청산구은광자촌을 거점으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독립군을 확충하는 데 온 정력을 기울였다. 리진룡의 부인 우씨도 이 거점을 건설하는 데 모든 정력을 이바지하였다. 

  리진룡은 자주 소부대의 무장조직성원을 거느리고 국경선을 넘어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군 하였는데 하루에 100여리를 나는듯이 걸어다녀 "번개다리"(飛毛腿)라 불렸다. 

   리진룡은 매국노 림곡(林谷)의 밀고에 의해 불사조의 신화를 깨뜨리고 1917년 5월 25일 관전현 청산구 은광자촌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 리진룡은 갖은 악형과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투사로서 추호의 동요도 없이 도리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국부를 위협하고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삼았으니 고금천하에 반도패리함이 너희같은 자가 어찌 나를 반역이라 하느냐?"고 왜경을 꾸짖었다. 심문하는 왜경이 리진룡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왜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구함이 업이다"라고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리진룡은 먼저 려순감옥으로 압송되였고 후에는 조선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였다. 평양복심법원은 1917년 12월 25일 리진룡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나라  독립과 민족해방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유감을 남긴채 리진룡은 1918년 5월 1일 일제의 교형대에 올라 마지막으로 민족적 긍지에 찬 호탕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비보를 접한 부인 우씨는 비분 강개하여 관전현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로 순절하였다. 

  한국독립운동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독립운동사"는 리진룡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리승만, 박은식, 장덕수 등은 사회여론계에 몸을 바쳐 겨레의 계몽과 지도에 앞장섰는가 하면 김구, 안중근, 우동선, 리진룡, 편강렬 등은 직접 무기를 들고  침략자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나서서 대담의협의 활동으로 적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고 우리 겨레의 구국항적의 정신기백을 세계 만방에 알려주었다."

  1994년 5월 11일 관전현청산구향 인민정부에서는 《저명한 반일의병장령 리진룡부부 의렬기념비 수건에 관한 신청보고》(24호문건)를 관전현 인민정부에 올렸다. 문건의 내용을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저명한 의병장령인 리진룡은 생전에 장기간 우리 향에서 항일활동을 하였고 군중 속에서 아주 높은 성망이 있었으며 세인의 숭고한 존경을 받았다. 리시가 영용히 순국한 후 그의 부인 우씨도 청산구 은광자에서 순절하였다. 그 때 당지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우씨의 유체를 안장하였다. 리씨의 항일의거와 우씨의 견강한 절개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때 당지 군중들은 '리씨부부의렬비'를 건립하였고 그 비문에 두 부부의 영용한 사적과 견강한 절개를 널리 선전하였다. 

  우리 향에서는 당년의 항일투쟁에서 영용히 희생한 리진룡의 사적을 널리 선전하여 광범한 군중들에게 애국주의와 혁명전통 교육을 진행하기 위하여 리진룡부부가 살았던 청산구에 리씨부부의 기념비를 수건하려고 하니 비준하기 바란다."

  관전현 인민정부에서는 본 신청보고에 동의하여  670평방메터 면적의 기념비 기지를 비준하는 문건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리진룡장군 후손들이 당지 정부로부터 200평방메터의 부지를 50년간 사용하기로 임대계약을 체결하면서 2012년에“리진룡기념원”을 수건했다. 

  동녘하늘에 붉은해가 서서히 솟아올라 리진룡기념원을 감돌아흐르는 소아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영웅의 넋은 끊일줄 모르는 소아하의 물결 속에 스며들어 영원하리라!

료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명동촌 초입에서 '명동, 윤동주생가'라는 글을 새긴 커다란 바위가 우리를 반겼다. 이 일대가 명동촌(明東村). 넓게는 명동지구라고하는 곳이다. 조선 회령의 덕망 있는 한학자 규암(圭巖)  김약연( 金躍淵, 1868~1942)이 1899년 2월 문병규, 김하규, 남도천, 문치정 등과 함께 142명을 이끌고 이곳 명동일대...
  • 2014-12-08
  • 옥중서 중공연길감옥위원회 설립   연변당사연구전문가인 리송덕은 다년간의 연구에 근거하여 연변항일투쟁력사에서 또다른 한페지를 엮고있는 연길감옥에 수감된 항일지사들의 투쟁에 대해 8일에 이렇게 진술한다. 1924년에 수건된 연길감옥은 원래 길림성제4감옥으로 불리웠고 지금의 연변예술극장 위치에 자리했었다...
  • 2014-08-27
  • 훈춘 대황구라 하면 “13렬사릉원”을 빼놓을수 없다. 우중충한 푸른 산에 둘러싸인채 훈춘지역 반일투쟁의 빛나는 력사의 한페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는 대황구마을, 마을에서 1킬로메터 정도 떨어져있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13렬사의 무덤 그리고 그앞에 자리잡은 “13렬사기념비”는 지난 세기 30...
  • 2014-08-14
  • 황량한 골짜기를 뜻하는 대황구지만 30년대 성세호대한 연변 항일투쟁의 눈물겨운 시편이 기록되여있는 력사의 현장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숙이 락인되여있다. 훈춘시가지에서 38킬로메터 정도, 훈춘시 영안진과 밀강향 북부에 위치해있는 대황구항일근거지는 지난 세기 30년대 중공 훈춘현위의 탄생지이자...
  • 2014-08-12
  • [임기상의 역사산책 70]백정기 의사의 '폭탄 투척', 불발로 그치다 백정기 의사와 의거 현장에서 소지했던 도시락 폭탄과 권총의 사진. 앞쪽에 손으로 만든 듯한 줄과 손잡이가 점화장치로 보인다. (사진=더채널 제공) ◈ 백정기·이강훈·원심창, 왜적을 몰살하려다 체포되다 1933년 3월 5일 중국 상...
  • 2014-07-31
  • 정부, 러시아 출생문서 불신해 공증 난항겪어 -사할린 강제노역 한인 4만여명, 탄광에서 고역치뤄 -해방이후 출생 한인은 영구귀국 대상에서 제외돼 -자녀교육, 각종 불이익으로 러시아 국적취득자 많아 -사할린뿐 아니라 재외동포에 관한 정책이 걸려있어 -동포지원법률 맹점많아, 형식적인 기준이 발목잡아 [CBS 라디오 ...
  • 2014-06-24
  • 아버지와 어머니 해마다 추운 한겨울이 지나고 꽃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청명절을 손꼽아 기다린다. 어머니가 세상 뜬 이듬해부터 청명절은 나의 명절이였다. 그날이 되면 꼭 어머니산소로 찾아간다. 어머니가 보고싶었다. 거기 가서 어머니한테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있다는것도 알려드리군 한...
  • 2014-06-23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지난달 30일 버지니아 페어팩스카운티 정부청사에서 열린 위안부기림 평화공원 개막식에 초청된 위안부 희생자 강일출(86) 할머니는 3년 간 위안소생활을 하다가 일제가 산채로 태워죽이려하는 위기를 뚫고 극적인 탈출로 생환한 주인공이다. 행사 도중 방생된 나비들의 날개짓처럼 덩실덩...
  • 2014-06-02
  • 룡정시당안국에서 일전 시민 방순복녀사로부터 당년 주보중장군이 교열하던《동북항일련군계통표》를 기증받았다. 주보중은 동북항일련군의 창건인이고 걸출한 지도자이다.《동북항일련군계통표》는 동북항일련군 및 중국항일혁명의 귀중한 사료총서중의 하나이다.  기증인 방순복로인은 팔순이 넘은 리직간부다. 당안...
  • 2014-05-27
  • 극비문서에 기록된 한 조선인 (길림성 문서보관국에서 공개한 이기수 관련 헌병대문서) (길림성 문서보관국 문서보관실 일각) (헌병대 문서에 잔존한 이기수 사진) (731부대 본부 옛터) (731부대 동력부 옛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일부의 옛 사진)   1941년, 이기수(李基洙)는 체포된 후 하얼빈 일본군헌...
  • 2014-05-05
  • 나의 아버지는 거룩한 산이였다 동북군정대학 60주년 합영. (세번째줄 좌로부터 일곱번째가 아버지 신청송임) 사람들은 흔히 자식들을 따스한 품에 안아주시고 살뜰히 쓰다듬어주시는 어머니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자식들을 지켜주고 이끌어주는 아버지를 우뚝 솟은 높은 산에 비한다. 그래서인지...
  • 2014-03-13
  • 서로 ‘일본첩자’ 의심하며 죽인 ‘민생단 사건’…김일성이 종지부   1930년대 앳된 소년 같은 동북항일연군 북만 지역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이다. 70여년간 묻혀 있다 발굴된 사진이다. 당시 항일연군 지휘관들은 20대 청년들이었다. 앞줄 한가운데 키 작은 사람이 북만 지역 항...
  • 2014-03-05
  • 간도특설대 / 김효순 지음ㆍ서해문집 발행/ 384쪽ㆍ1만5000원 간도 독립투사 섬멸 위해 조직… 조선인 사병 위주의 특별 부대 저자, 옌볜·간도 지역 넘나들며 작전명령서·토벌대 실태 취재   조선인 항일단체를 겨냥해 구성된 간도특설대의 구성원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 초기 지휘부...
  • 2014-02-24
  •   토성전역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한 중앙홍군은 1월 29일, 토성진의 훈계구(浑溪口)와 토성 북쪽 가까이 원후(元厚) 나루터에 이르렀고 적수하에 부교를 놓으면서 제1차로 적수하를 건너섰다. 원 북상계획대로 사천의 로주, 의빈 사이로 장강을 도하하여 장강이북 사천땅에서 홍4방면군과 회합하려 했으나 장개석이 대병...
  • 2014-02-07
  • 조선족 반일 무장투쟁의 거점이었던 연변 지역의 중심지 연길의 시장 풍경. 1920년대 말~30년대 초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③ 1920년대 연변 항일무장투쟁 1644년 산하이관(山海關: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중국 화북의 군사 요지)을 돌파한 여진의 후예들이 베이징에 정좌했다. ...
  • 2014-02-03
  • 청나라의 말대활후 완용이 연길에서 죽었다. 바로 지금의 연변로동자문화궁(원 연변예술극장, 옛날의 연길감옥)   완용은 1905년에 청나라 내무부대신 영원(다우르족)의 녀식으로 태여났다. 어릴때의 완용은 훌륭한 가정문화교육을 받았고 회화와 시사에 능했고 영어가정교사까지 둘 정도로 가족이 부흥했다.   ...
  • 2013-12-16
  • 필자가 알기로는 연변에 《달라자》라는 동명마을이 도문시, 룡정시, 안도현에 하나씩 있다. 도문시 석현진 달라자마을 이름은 이 마을 동쪽에 우뚝 솟은 형제바위에서 온것이다. 달라자는 한자로 큰 《大》, 바위《砬》또는 각담 《磊》, 아들 《子》 자로 쓴다. 이전에는 이 마을을 《달라자(大磊子)》라고 했는데 최근에...
  • 2013-11-27
  • ㅡ환인만족자치현 보락보진 보락보촌을 찾아서 이미 페교된 보락보진조선족소학교의 옛터. 환인만족자치현 보락보진 보락보(普樂堡)촌을 찾아가는 길에 이미 작고한 리영훈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은 환인현민위 부주임으로 사업하던 시기는 차치하고 퇴직후에도 환인현조선족력사연구회(2006년 환인현조선민족사학연구...
  • 2013-11-08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