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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们走在大路上9] 개혁의 봄물결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26일 19시42분    조회: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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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9집 개혁의 봄물결

1978년 12월의 한 겨울밤, 봉양(凤阳)현 소강(小岗)촌 18가구의 농민들은 이런 계약에 서명했다. “우리는 경작지를 가구마다에 나누어주는데 호주가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다. 앞으로 알뜰히 경작하면 가구마다 전년의 공량(公粮) 상납 임무를 완성하고 더는 나라에 돈을 달라, 식량을 달라 손을 내밀지 않게 될 것임을 보증한다. 만약 성사되지 못한다면 우리 간부들은 옥살이를 하든 머리가 날아나든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원들도 우리의 자녀들을 18세까지 키워줄 것을 담보한다.”

당시 이 농민들은 중국의 억만 농민들 운명을 개변할 개혁의 실천이 바야흐로 막을 올리고 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봄물결은 치솟아 시내물을 이루고 이어 사품치는 거센 흐름을 이루었다.

1977년 6월,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10분짜리 내부 참고 영상 한편을 방영했는데 바로 안휘 농촌의 빈곤상황을 반영한 것이였다. 중앙정치국에서는 신속히 결정을 내리고 유능한 간부 한명을 될수록 빨리 파견해 안휘의 사업을 주관하도록 했다. 하여 만리가 안휘성위 제1서기로 임명되였다.

1978년 여름, 안휘에는 특대 가뭄이 들었다. 성위에서는 과단하게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밀을 심도록〉 결정을 내렸다.

재해가 엄중한 비서(肥西)현은 여름철 량곡이 감산되고 중늦벼는 절단났다. 산남구위는 각 대의 당원들이 참가한 회의를 소집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량곡을 더 수확해 기황을 면할 것인가를 토론했다. 회의에 참석한 23명 당원은 땅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촌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농가에 도급주어 책임전을 가꾸도록 하는 데 일치하게 동의했다.

당시 비서현 소정장(小井庄)의 회계로 있던 리조충은 이렇게 말한다. “23일부터 땅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24일 아침에 벌써 전 촌 남녀로소중 로인 한분과 아이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기 밭에 나가 일에 달라붙었지요. 저마다 열의충천하고 힘에 넘쳐서 말입니다.”

“식량은 환매량(返销粮)을 먹고 돈은 구제금을 타쓰고 생산은 대부금에 의거”하기로 원근에 소문났던 안휘성 보양현 소강촌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전면 도급제’를 실시했다. 나라에 공량을 바치고 집체 몫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자기 것이였다.

전해의 가뭄에 이어 1979년은 날씨도 잘해준 데서 농민들은 드디여 오매불망 바라던 풍작을 안아왔다. 소강촌의 량식 생산량은 전해보다 4배 증가했고 농민 수입은 16배로 껑충 뛰였다. 촌민 인당 평균 수입이 전해의 22원에서 350원으로 비약했다.

이를 전후해 산동, 사천, 내몽골, 감숙, 하남, 귀주 등지에서도 조별 도급, 호별 도급, 련합 생산 보수 계산 등 여러가지 형식의 농업생산 책임제가 나타났다.

농촌 개혁의 핵심은 토지다. 우리 나라의 토지 소유제는 국가 소유권과 농민 집체 소유권이 병존하는 사회주의 토지 공유제이다. 련합생산 도급제는 바로 이 기초상에서의 농민 생산 책임제이다. 이는 농민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고 농민들의 활력을 격발시켰으며 생산의 발전을 추동함으로써 농촌 면모에 심각한 변화를 불러왔다.

등소평은 농호별 도급제는 “농민들이 발명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가 도급제는 효과가 아주 좋고 변화가 매우 빠르다. 안휘 비서의 절대다수 생산대에서 농가별 도급제를 실시한 데서 그 증산 폭이 아주 크다. 노래 〈봉양화고〉에서 나오는 봉양현 절대다수의 생산대에서 전면 도급제를 실시했는데 역시 한해 사이에 면모를 일신했다.”

1982년부터 당중앙은 련속 5년간 중앙 1호 문건을 내놓아 가정별 련합생산 도급을 위주로 한 책임제를 전국에 보급했다. 전면 도급제는 큰 변화를 안아왔다. 1984년 전국 량식 생산량이 처음으로 4000억키로그람을 돌파했다. 농림목어업 총 생산액은 1978년보다 1.3배 증가했다. 중국 인당 평균 량식 소유량은 400키로그람에 달했다. 20세기 80년대, 노래 〈희망의 전야에서〉가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졌고 봄이면 집집마다 봄갈이에 분망한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농촌 개혁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이 파죽지세로 퍼지며 농촌들마다에는 생기발랄한 기상으로 차넘쳤다.

봉양현 소강촌과 수백키로 상거한 절강성 소산(萧山)현은 인구가 많고 땅이 적은 모순이 더없이 불거진 곳이였다. 배를 채우고저 당지의 사원들은 별 방도를 다 대보았다. 다각경리를 하고 여러가지 소형 기업을 꾸리는 등. 이중에 로관구(鲁冠球)가 세운 농기계공장이 있다.

“당시는 모두 집체이고 개체가 희소했습니다. 우리 같은 공장은 좀만 크게 해도 안되였습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제한이 많았습니다. 숨어다니면서 자리를 7곳이나 옮기며 6년을 해왔습니다.”

로관구(鲁冠球)의 농기계공장은 작은 수공업 작업장으로부터 미국 시장에 들어간 중국 자동차 부품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농촌 기업이 해외 상장 회사를 수매한 선코를 뗐으며 용감히 개혁하고 실천하는 중국 기업가의 지혜와 감당 정신을 세상에 보여줬다. 오늘날 만향(万向)그룹은 년간 영업액이 1000억을 초과하고 리윤액은 100억을 넘긴 현대화 다국기업그룹으로 성장했다.

1979년부터 강소 곤산(昆山), 강음(江阴), 장가항(张家港), 상숙(常熟), 절강 온주, 복건 진강, 광동 불산 등지의 향진기업들이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1987년 전국 향진기업 생산액이 농촌 사회 총 생산액의 50.4%를 차지함으로써 처음으로 농업 총 생산액을 초과, 농촌 경제에 력사적인 변화를 몰아왔다.

농업이 없으면 안정이 없고 공업이 없으면 잘살 수 없다. 향진기업은 농민들이 가정 도급제에 이은 또 하나의 위대한 창조로서 농촌 공업화, 도시화, 현대화 진척에 새로운 한갈래 길을 개척했다.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날로 높아갔다.

도시 개혁은 우선 ‘권리를 풀어놓고 리윤을 양도하고 활성화하자’로부터 시작되였다. 권리를 풀어놓다는 바로 중앙에서 지방에로 재정권, 물권을 풀어놓고 기업의 생산 경영 자주권을 확대하고 지방과 기업의 적극성을 동원하는 것이였다.

1979년 5월, 수도강철공장 등 8개 대형 국영기업에서 개혁 시점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기업 자주권을 확대하는 사업을 국영공업기업에서 전면적으로 보급했다.

1984년 10월, 당의 12기 3차 전원회의는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했다. 이는 경제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강령성 문건이였다. 문건은 명확히 규정했다. 즉 사회주의 경제는 공유제 기초상에서의 계획 있는 상품경제이다, 상품경제를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은 사회 경제 발전에서 뛰여넘을 수 없는 단계로서 우리 나라 경제 현대화를 실현하는 필요한 조건이다, 상품경제를 충분히 발전시켜야만 진정으로 경제를 활기 띠게 할 수 있다.

이는 개혁의 중점이 농촌에서 도시에로 이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바 경제체제 개혁이 전면적으로 개시된 것이였다.

기업의 자주권을 한층 확대하고 계획관리 체제 개혁으로 지령성 계획 범위를 점차 축소하고 가격 체제를 개혁해 다양한 가격 형식을 형성했다.

하나하나의 개혁들은 전통적인 경제체제를 돌파했고 경제의 발전을 추진했다.

개혁은 사품치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마냥 앞으로 내달렸다.

경제가 활약함에 따라 중앙은 “개체경제의 적당한 발전을 고무격려하고 부축할 것”을 제기했다. 잇달아 거리에는 전국각지를 누비는 장사군이 많아졌고 난전을 벌이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온주의 인민서로에서 한 점포가 한 시대의 시작을 견증했다. 그 때로부터 ‘개체호’란 단어가 점차 중국 백성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1979년 가을, 당시 18세였던 장화매(章华妹)는 모험적이고도 막무가내한 결정을 내렸다. 개체호로 된 것이다. 당시 정책은 개체 공상업에 대한 제한이 많았다. 그녀는 남의 눈을 피해가며 집문앞에서 난전을 벌이고 일용 잡화 같은 것을 팔아 생활에 보태는 수 밖에 없었다.

장화매(章华妹)는 반전의 기회가 이처럼 빨리 찾아올 줄을 몰랐었다. 1980년 12월, 번호가 10101인 개체공상호 영업허가증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화매는 24년 후에야 이 허가증이 전국 개혁개방 이후의 첫 영업허가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장화매에 따르면 당시 공상소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 허가증을 가졌으니 당신들은 크게 해볼 만합니다. 나라에서 동의한 겁니다. 대담하게 해보십시오. 다른 걱정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마음껏 크게 해보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개체경제 발전 과정에서 안휘 무호(芜湖)의 ‘바보해바라기씨’의 경영자 년광구(年广久)는 쟁의가 있는 인물이였다. 년광구의 해바라기씨는 명성이 높고 판로가 좋았는데 일손이 딸려 삯일군을 썼다. 일군은 처음의 몇명에서 100여명으로 발전했다.

이에 어떤 사람은 년광구가 고용하고 있는 로동자 수가 규정을 초과했으니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이 조사보고를 보고 난 등소평은 2년 후 다시 보자고 했다. 손을 대면 군중들은 정책이 변했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인심도 불안해지게 된다. 한동안 경영하도록 합시다. 무엇이 두려운가? 사회주의를 해쳤는가?

정책이 완화되면서 시장에는 자연히 사영경제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눈의 띄지 않던 수공 작업방, 작은 공장, 소매점들이 눈덩이 굴리듯 점점 커갔고 작은 장사가 전국적인 혹은 국제적인 매매로 커갔으며 실력이 강대한 사영기업주로 성장해갔다.

장화매와 같이 취업대기 청년으로부터 창업자로 전변된 이들은 개혁개방 정책의 첫 수익자로 되였다. 1978년에 전국적으로 가정 수공업 작업장과 개체호가 14만집이였다면 1981년에는 260만집으로 폭증했다.

개체경제가 발전하고 사영경제가 다투어 일떠서면서 우리 나라 사회주의 경제 구조에는 여러가지 소유제 경제가 공동으로 발전하는 기본 국면을 형성했다.

전통적인 계획 류통제가 시장 류통 체제로 전변하기 시작했다. 농산물시장, 남새시장, 사회구역 남새시장, 농부산물 일반가격 상점 등이 새로운 기상을 보였다. 여러가지 경로와 형식의 류통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군중들 생활에 편리를 주고 상품질을 보장하며 주민들 소비를 추진하는 방향에로 발전해갔다.

경제체제 개혁이 심화되면서 과학기술 면의 개혁도 20세기 80년대 중기에 전면적으로 진행되였다. 1985년 3월, 중앙은 전국과학기술사업회의를 소집하고 〈과학기술 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

북경대학의 왕선(王选)이 이 기회를 다잡았다. 그는 한자(汉字) 레이저 조판 기술 연구 발명을 이끌어 성공한 후 실험실에만 머물지 않고 1988년 북경대학 신기술회사와 합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방정(方正)그룹의 전신이였다.

레이저 조판 기술은 거대한 시장 효과를 안아왔으며 ‘납(铅)과 불(火)을 고별하고 빛과 전기를 맞아오는’ 기술혁명을 유발했다. 왕선은 ‘당대의 필승(毕昇)으로 불렸다.

왕선과 함께 역시 새 과학기술의 파도를 탄 왕대형(王大珩), 왕감창(王淦昌), 양가지(杨嘉墀), 진방윤(陈芳允) 네 과학자는 1986년 3월 3일, 등소평에게 편지를 띄웠다. 우리도 국제 선진 수준을 바싹 뒤따라 국제 첨단 기술 령역에서 한자리 차지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였다.

3월 5일, 등소평은 명확히 표시했다. “이 건의는 십분 중요하다. 속히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연시킬 수 없다!”

현시대 경제사회 발전에서 과학기술은 결정적인 력량임을 의식했기에 등소평은 ‘과학기술은 제1생명력이다’는 저명한 론단을 내놓았다. 그는 또 “경제체제 개혁, 과학기술 체제 개혁에서 내가 가장 관심하는 것은 인재다.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6년 11월, 중공중앙, 국무원은 〈첨단기술 연구발전 계획 개요〉를 비준했다. 후에 사람들은 제의 시간에 따라 이를 ‘863’계획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대외개방도 이때에 중대한 돌파를 가져왔다.

1978년 3월, 중앙에서는 습중훈을 광동에 파견해 정무를 주관하도록 정식 결정했다. 7월, 습중훈은 광동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지방 현, 시에 내려가 고찰을 했다. 심수의 중영가(中英街)에 이르러 보니 길 중심에 있는 돌 몇점으로 갈라진 거리 량측에서 향항 쪽은 차가 실북나들 듯하며 번화했지만 대륙 쪽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고찰길에서 본 정경들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1979년 4월, 습중훈은 북경에 와서 중앙사업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연설에서 광동이 향항, 오문에 잇닿아있고 화교가 많은 특점에 비추어 중앙에서 특수정책을 내와 심수, 주해, 산두에 수출가공구를 건설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 구상은 등소평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CCTV방송, 편역: 길림신문 김정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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