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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们走在大路上14]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2월10일 08시56분    조회: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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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14) 제14집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2005년 12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 농업세 조례〉 페지, 농업세 취소

북경, 전국농업전시관 1층 4호 전시청에는 한 평범한 농민이 주조한 청동대정(青铜大鼎)―지세고별정(告别田赋鼎)이 진렬되여있다. 2006년 1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농업세 조례〉가 정식으로 페지됐다. 하북성 령수현의 농민 왕삼니는 자체로 돈을 모아 주정각명식으로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한번도 있은 적이 없는 이 대사건을 청동대정으로 기록했다.

명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몇세대를 내려오면서 세세대대 세금을 바쳤다. 오늘 지세와 고별하면서 주정각명하여 후세대들에게 알려 만세대가 노래하며 영원히 잊지 말도록 하겠다.

농업세를 전면 취소함은 21세기 중국정부의 력사적 조치이며 특혜를 주는 민생의 중요한 표징이기도 하다.

새 세기에 들어서서 당중앙에서는 우리 나라는 총체적으로 공업으로 농업을 추진하고 도시가 농촌을 이끌어 발전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중요한 판단을 내리고 공업이 농업을 부양하고 도시가 농촌을 지지하며 ‘많이 주고 적게 가지며 령활하게 개방하는’ 방침을 제정, 실행했다.

전통농업 대국으로서 오래동안 중국의 농업경제는 주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농업세도 줄곧 국가세수의 주요 기둥으로 되였다. 개혁개방 후 공상업의 신속한 발전에 따라 국민경제중에서의 농업세 비중이 끊임없이 내려가고 재정수입의 보조적 수단으로 되였다. 재정수입의 전반 구조로부터 볼 때 농업세 비중은 1950년의 39%에서 2004년의 1%로 떨어졌다.

2005년 12월 29일, 제10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제19차 회의는 2006년 1월 1일부터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농업세 조례〉를 페지할 것을 채택, 결정했다. 같은 날, 국가주석 호금도는 제46호 주석령에 서명하고 전면적으로 농업세를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현재 농민들은 농사를 짓는데 세금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좋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농민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량품종 보조, 농기계구매 보조, 알곡재배 보조와 농업생산자료 종합보조 정책을 륙속 실행했다.

2004년부터 국가에서는 중점 알곡품종 최저 수매가격을 실행하고 알곡 수매가격을 해마다 올리고 있는데 농민들이 거둔 풍작의 열매가 확실히 수입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길림성 전고르로스 몽골족자치현 알곡재배 대호, 60여세의 담업군은 자기 집 온돌방에 앉아 흐뭇한 심정으로 약간 노랗게 된 몇권의 장부를 번져본다. 그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지요. 농사짓는데 세금을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려 보조를 주고 있어요. 그것도 식량 직접보조, 식용유 직접보조, 농기계 직접보조 등 이어서 주지요.”라고 했다.

담업군은 2000년부터 가정의 전부 수입과 지출 상황을 장부에 적어놓았다. 근 20년의 기록은 동북 한 농가의 수입증대를 견증했다.

 

농촌 기초시설 건설을 강화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촌마다 길’이 통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3가지 하향’ 활동을 가동했다. 촌마다 도로가 통하고 천가만호에 방송, 텔레비죤을 시청할 수 있으며 문화, 과학기술, 위생 하향으로 농민들의 문화생활이 풍부해져 농민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농촌위생건강 수준이 높아졌다.

1993년 3월의 따뜻한 봄날, 북경에서 ‘두 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온 인대대표들은 식권을 바꿀 때 식량권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식량권은 20세기 중국 민생의 축소판이며 특수한 한시기의 세월을 견증했다.

새 중국 창립 초기 알곡공급이 극히 부족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953년부터 전국적으로 알곡 통일구매, 통일판매 제도를 실행했다. 이로써 중국은 식량권을 대표로 하는 증표시대에 들어섰다.

토지 임대와 농산물가격에 대한 개방과 함께 해마다 높아지는 생산량, 해마다 맞는 풍수로 하여 농민들의 수입이 늘어나고 농업이 발빠르게 발전했다. 나라가 부유해지자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1984년 11월 1일, 개혁개방의 전연 진지 심수에 진출한 많은 근로자들의 밥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수에서는 전국에서 먼저 특구내에서 식량 통장과 증표를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이 조치는 알곡공급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에로 전변하는 리정비가 되였다.

얼마 안지나 심수의 성공적인 경험이 전국에 영향을 주었다. 1993년 4월 1일, 국무원의 〈알곡 류통체제 개혁을 다그칠 데 관한 통지〉는 근 40년동안 도시주민들의 생활을 동반했던 식량권, 기름권 등 여러가지 증표가 륙속 력사의 무대에서 물러서게 했다.

1993년 5월 10일, 북경에서는 마지막으로 한더미 식량권을 등록, 취소했다.

천진의 진가영은 2만장 넘는 증표를 수장하고 있다. 식량권, 직물권, 비누권, 성냥권, 배추권 1,000여가지나 된다.

1991년,《중국청년보》 촬영기자 해해룡이 ‘나는 공부할래요’라는 사진 몇장을 찍었는데 이중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끈 사진이 바로 한 녀자애가 손에 필을 들고 큰 눈을 뜨고 뚫어지게 렌즈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해해룡은 “이름이 소명연이라고 부르는 이 녀자애의 눈이 특별히 크고 명랑했다. 소명연이 렌즈를 볼 때 나는 과단성 있게 샤타를 눌렀다. 렌즈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찍은 지 40년이 된다. 교육면에서 진정한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고 말한다.

백년대계는 교육이 기본이다. 교육은 자손후대와 관계되며 천가만호와 련결된다. 1986년 4월 12일 〈중화인민공화국 의무교육법〉 이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 표결, 채택되였다. 1993년에 인쇄, 발행한 〈중국교육개혁과 발전요강〉에는 20세기말까지 9년 의무교육을 대체적으로 보급하며 청장년들의 문맹을 대체적으로 퇴치한다고 제기했다.

2003년, 국가에서는 농촌의무교육단계 학생들의 학잡비를 점차 면제하고 무료로 교과서를 제공해주었으며 가정경제가 곤난한 기숙사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보조해주었다. 2006년 새로 수정한 〈의무교육법〉은 의무교육에서 수요되는 경비를 전부 재정 보장범위에 편입시킨다고 일층 명확히 했다. 2008년 9월, 전국적으로 도시와 농촌 무료의무교육을 전면 실행했다.

신강 얄칸트 타가르치 두가지언어소학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이 식당에 몰려들었다. 민족 특색이 짙은 손밥(手抓饭)이 아이들의 인기 메뉴였다.

2011년부터 당지의 만여명 농촌 기숙사 학생들의 학잡비를 전부 면제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주는 영양선식 보조로 시름놓고 맛 있는 음식을 먹게 되였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 취업에 극히 심한 충격을 주었다. 많은 중소기업이 문을 닫았고 1,000여만명 농민들이 일터를 떠나게 되였으며 대학생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되였다. 준엄한 형세하에 우리 나라는 적극적으로 취업정책을 실행했다. 2009년 하반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 취업상황이 대체상 금융위기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아침 일찍 길림석유화학 북방회사 공회 주석으로 있다 퇴직한 리하는 왕충방의 농업과학기술회사를 찾았다. 정리실업 종업원을 더 받을 수 없겠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둘은 언녕부터 아는 사이이다. 왕충방의 창업을 말하자면 리하의 도움으로 시작한 것이다. 1997년 정리실업자가 된 욍충방은 알로에밀가루공장을 꾸리려고 했지만 자금 곤난을 받았다.

왕충방은 “가장 어려울 때 리주석은 공회의 구제금 1,000원을 가져왔는데 이 돈으로 공장을 가동시키고 눈을 굴리듯 조금씩 모아 지금의 밀가루공장을 일떠세우게 되였지요.”고 말한다. 리주석은 또 공회와 여러 단위를 련결해주어 밀가루를 팔도록 했는데 당시 20여만원이나 되였다. 그 때로부터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고 왕충방은 말한다.

“224명 정리실업자들이 북방회사에서 일했는데 정말 열심히 했지요.” 왕충방의 말이다.

고방주, 사람들은 그를 ‘탕완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바로 이 맛 있는 ‘탕완(糖丸)’이 무수한 아이들이 민간에서 말하는 ‘소아마비증’인 척수회백질염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했다. 20세기 50년대, 30여세의 고방주는 위험과 재난의 시기의 명을 받고 척수회백질염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였다. 1960년 그는 연구팀을 거느리고 성공적으로 중국의 첫 ‘척수회백질염’ 생백신(活疫苗)을 연구, 제작했다. 백신의 안정성을 확정하기 위해 반드시 어린이 몸에다 실험을 해야 했다. 고방주의 큰 아들이 전 중국에서 첫번째로 백신을 마신 아이가 되였다.

북경협화의학원 전임 원장이며 교장인 고방주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실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먹겠습니까, 당신이 나서서 먹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더러 먹으라 하면 먹겠습니까?”

관찰기가 지난 후 고방주와 동료들은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백신이 안전했던 것이다.

1965년, 우리 나라에서는 척수회백질염을 예방하는 백신을 정식으로 보급, 접종시켰다.

1978년, ‘탕완’ 백신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어린이계획면역 범위에 들어갔다.

2000년 10월, 중국은 척수회백질염이 없는 나라로 되였다고 세계보건기구는 정중하게 선포했다.

2013년 적령어린이들의 B형 간염 백신, 비시지(卡介苗), 척수회백질염 백신 등 12가지 백신 접종률이 향을 단위로 90%에 달했다.

2003년 신형 농촌합작의료제도가 농촌에서 시작되였다. 이는 정부 주도하의 호조공제제도이며 력사적으로 정부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의 기본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당한 직접적인 모금책임이였다.

신형 농촌합작의료제도의 건립은 농촌주민들의 의료부담을 덜어주고 농민들이 병 때문에 빈곤해지고 병 때문에 빈곤에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다소 완화되였다.

2007년부터 우리 나라는 도시주민의료보험 시범을 가동했다. 2008년 전국적으로 신형 농촌합작의료에 참가한 인구가 8억명을 돌파하고 2012년에 이르러 각항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구가 13억명이 되였다. 세계 인구의 제1대국인 중국은 십여년의 시간을 들여 전민 기본의료보험을 실현해 국제사회의 주목과 호평을 받았다.

강서성 수천현 기초생활수급자인 왕황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사망전) 병치료 때문에 집에 있는 돈을 다 끌어 썼지요.” 그가 마음을 안착하게 된 데는 그의 손에 쥔 얇은 증서 때문이다. 2007년 더 많은 빈곤인구를 대상으로 농촌 최저생활보장제도를 실행했다.

왕황고는 “다 합쳐서 한 계도에 2,700여원이 발급되지요. 도서관리원으로 있는 로임 한달치 300원을 보태면 한 계도에 3,600원이 되지요.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 생활하는 데 별문제 없지요. 이런 정책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정은 언녕 헤여졌을 거예요.”고 말한다.

복리로 분배받은 복도건물(筒子楼)은 도시의 시대적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거주조건이 엄청 나빴다. 4평방메터 되는 방에 27살 되는 아들이 부모 형제와 함께 한자리에서 잠을 자야 하니 다락방을 지어야만 했다. 복도건물에는 한집에 수도꼭지 하나, 수량계 하나씩 있는데 다른 집에서 쓸가봐 수도꼭지를 틀지 못하게 열쇠까지 채워놨다.

1980년 주택상품화의 초기 형태가 보이고 평범한 중국인들의 가정면모가 나날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북경-구룡 철도를 ‘대경구(大京九)’라고도 부른다. 이는 국가의 세기공정이며 또한 중대한 혜민공정이기도 했다. 이 철도는 북경에서 향항 구룡까지 가는 ‘대구룡’은 7개 성, 2개 시의 98개 시, 현을 지나간다. 지도를 펼쳐보면 사람들은 이 철도가 평지를 지나는 것이 아니라 큰 산을 넘나들고 가까운 거리를 가지 않고 에돌아 건설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철도는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경계지역, 대별산 산간지대, 정강산 산간지대, 강서성 남부, 광동성 동북구 등 로혁명근거지를 지나간다. 이 지역의 경제발전을 이끌기 위해 건설자들은 철도를 에돌아 건설하고 기차가 서도록 했는데 리본처럼 교통이 불편한 지역을 구불구불 꿰뚫어갔다. 정강산과 서금 이 두 로혁명근거지의 발전을 고려한 건설자들은 강서성의 감강을 가로지나기 위해 다리 두개, 4.41키로메터 되는 철도를 더 건설했다.

북경-향향 구룡 철도의 개통은 연선 각지 특히 로혁명로근거지 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렬차가 감주역에 들어섰을 때 수십년 동안 산길을 다녔던 한 어머니는 두손으로 차바구니를 어루만지며 “마침내 철제 차를 보게 되었구나!” 하며 격동되여 말했다.

민생을 보장하고 개선하는 데는 종점이 없으며 단지 끊임없는 새로운 출발점만 있을 뿐이다. 중국공산당은 시종 인민을 최고 위치에 놓고 민생을 우선 순위에 두고 한건 또 한건씩 처리하며 인민군중들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길에서 더 아름다운 래일을 맞이하도록 했다.

CCTV방송, 편역: 길림신문 홍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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