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0월, 항미원조 상감령전역에서 황계광은 몸으로 적의 총구를 막아 전우들에게 앞길을 내주었다. 올해는 항미원조 70주년이다. 황계광의 전우 리계덕은 그때 기억을 되살리며 다정했던 옛 전우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련장동지, 제가 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리계덕 로인, 황계광의 영웅이야기 진술
1951년, 리계덕과 전우들은 지원군전가를 부르며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향했다. 리계덕은 한때 황계광과 같은 반에 편성되여 그와 어깨 겯고 적들과 싸웠다.
1952년 10월 14일, 상감령전역이 터졌다. 그번 전역에서 적군은 지원군 597.9고지와 537.7고지의 약 3.7평방킬로메터 진지에 포탄 190여만발을 발사했다. 가장 많을 때는 하루에 30여만발을 발사하기도 해 한평 토지에서 포탄 76매가 터지기도 했다.
진지는 결국 적군에 점령당했다. “597.9 고지는 한치라도 내줘서는 안된다”. 황계광의 소속부대는 명령을 접수한 뒤 이날 저녁으로 잃은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진공을 펼쳤다. 그러나 적의 기관총 두대가 전진의 길을 가로막아 선두에 섰던 3개 소조의 전사들이 전부 희생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때, 황계광이 나섰다. “련장동지, 제가 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동의를 얻고나서 황계광과 오삼양, 소등량은 폭파조를 무었다. 그들은 살상력이 가장 강력한 구쏘련 폭파통을 지니고 적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적의 세찬 기관총 공격을 받았다. 오삼양, 소등량이 먼저 쓰러졌다.
황계광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뒤를 이어 포복전진으로 진지에 다가갔다. 적의 또치까 앞에 이른 황계광은 신속하게 폭파통을 안으로 던졌다. 그러고나서 바로 또치까 총구를 몸으로 막았다. 괴음과 함께 적의 기관총 발사도 멈췄다. 당시 황계광과 단 50메터 거리를 사이두고 있었던 리계덕은 또치까에 서슴없이 몸을 던지던 황계광의 모습을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597.9고지를 향해 달려갔고, 진지는 다시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리계덕, 60년전의 생사약정 지켜
조선전장에서 리계덕은 황계광과 생사약정을 했다. 항미원조전쟁이 끝나 리계덕은 고향에 돌아갔고 황하 주변의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농민으로 살았다. 60여년래, 리계덕은 황계광의 가족들과 고향, 부대에 십여통의 편지를 썼다.
2015년, 리계덕은 황계광의 고향에 있는 황계광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그는 끝내 60여년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머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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