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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前남편 모차르트를 위해 생애를 바친 남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8월9일 09시27분    조회: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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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파티에 나간 것은 돈 많은 남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갖은 노력을 다하였어도 생활은 궁핍했다. 그래서 아직은 30대이니 최선을 다해서 치장하고 파티에 나온 것이다. 남편은 9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한 푼의 재산도 남기지 않고 대신 어린 두 아들만 안긴 채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29세에 남편을 여읜 그녀는 살길을 찾다 못해 파티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는 없었다. 그녀는 파티가 괴롭고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넋을 잃은 듯 구애했다. 그녀는 그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부자는 아니지만, 반듯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빈에 부임한 외국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그녀를 대했다. 그래서 둘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전남편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교양 있었고, 4개 국어를 했다. 전남편처럼 상스러운 말이나 욕설도 하지 않았고, 침 뱉지 않았고, 트림하지 않았고, 방귀 뀌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돈 벌 방법을 찾아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집 안 곳곳에 널려있는 전남편의 악보였다. 전남편은 작곡가였지만, 생전에 팔린 곡은 몇 되지 않았다. 집에는 악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피아노 밑에, 침대 위에, 부엌에, 소파의 쿠션 사이에 있었다. 그 남자는 악보들을 모아서 정리했다. 연대별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그리고 출판업자들을 만나서 협상을 해냈다.

 
29세에 남편 모차르트를 잃고 두 아이와 남겨져 살길이 막막했던 콘스탄체(왼쪽 초상화)는 파티에서 만난 덴마크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오른쪽 초상화)의 청혼이 꿈만 같았다. 콘스탄체는 전 남편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잊으려 재혼했지만, 폰 니센은 아내의 전 남편 모차르트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는 걸 필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외교관 은퇴 뒤 아내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한 그는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했고, 그의 사후 콘스탄체가 첫 전기를 출간했다. 속표지(가운데 사진)에 저자 폰 니센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모차르트는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독일 경매사 도로테움

그녀는 전남편의 음악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음악이었다. 베토벤이라는 사람이 등장한 이후로 음악계는 변했고, 빈에는 새로운 음악가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꾸 전남편의 음악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는 전남편의 누나 등 주변 사람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써서, 전남편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내고 자료를 모았다.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방에 틀어박혀서 무언가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전남편의 전기(傳記)였다. 그녀는 전남편을 다만 일곱 개의 계명(階名)을 사용해 멜로디를 꾸며내어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닳고 닳은 솜씨를 가진 음악 기술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전남편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전남편과 그가 남긴 가난을 잊기 위해 새 남자를 택했지만, 이 남자는 전남편을 세상에 다시 드러내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전남편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벨기에 작가 에릭 에마뉘엘 슈미트(Eric-Emmanuel Schmitt)의 소설 ‘콘스탄체 폰 니센’에 나오는 내용이다.(국내에는 소설집 ‘브뤼셀의 두 남자’(열림원)에 들어 있다.) 그녀는 당연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Constanze Mozart·1762~1842)다. 실제로 극심한 빈곤 속에서 혼자된 그녀는 빈 주재 덴마크 영사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1761~1826)을 만나 재혼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품위가 있고 음악 애호가였던 니센은 모차르트의 진가를 알고 마음 깊이 존경했다.

니센은 무엇보다도 콘스탄체에게 전남편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두 아들을 정성으로 부양하고, 두 아들을 프라하의 기숙학교에 보내주었다. 1812년에 니센은 본국 근무로 발령이 나서, 두 사람은 코펜하겐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1820년 니센이 은퇴하자, 그들은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 작업에 계속 매진했다. 그러나 1826년에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다른 사람과 함께 남은 작업을 계속해, 1829년에 세계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다고 하지만, 그건 니센 탓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성격적 결함이나 빈곤한 처지를 과장하려는 콘스탄체에게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콘스탄체는 13년을 더 살면서 ‘위대한 천재의 미망인’이라는 명예를 얻었고, 현실에서는 귀족 호칭인 ‘폰 니센’을 붙여 ‘콘스탄체 폰 니센 부인’으로 남루하지 않은 여생을 보냈다.
/위키피디아



모차르트와 사별한 콘스탄체와 두 아들을 거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은 평생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했고, 외교관 은퇴 뒤 아내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했다.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해, 그의 사후 마침내 첫번째 모차르트 전기가 출간된다. 두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의 카페 토마젤리 건물에는 “폰 니센 부부가 여기 살았다”는 명판이 붙어있다.
 
/위키피디아 모차르트와 사별한 콘스탄체와 두 아들을 거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은 평생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했고, 외교관 은퇴 뒤 아내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했다.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해, 그의 사후 마침내 첫번째 모차르트 전기가 출간된다. 두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의 카페 토마젤리 건물에는 “폰 니센 부부가 여기 살았다”는 명판이 붙어있다.

잘츠부르크에 남아있는 니센의 무덤에는 “모차르트 미망인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다. 세상에 ‘전남편 미망인의 남편’으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나아가 아내의 전남편을 더욱 존경했던 니센에게 그것은 영광스러운 타이틀이었다. 아내 전남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 일생을 바친 그를 기리기 위해 잘츠부르크시(市)는 한 거리를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 슈트라세(도로)’로 명명하였다.

/위키피디아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있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의 묘비에는 '모차르트의 미망인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모차르트는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있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의 묘비에는 '모차르트의 미망인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모차르트는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고의 예술을 접할 때에 위대한 예술가의 존재만 의식한다. 그리고 그의 위대함이 감상자인 나에게 바로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한 예술가나 예술 작품의 가치가 명료해지고 세상에 인정받기까지는 무명의 학자, 해설가, 비평가, 작가 그리고 열광적인 애호가 등 중간 지식인들의 공헌도 있었다. 아니, 지금은 대부분 잊힌 그들의 도움 없이 대중이 즉시 알아차렸을 예술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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