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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저명한 조선족 고고학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2월22일 10시44분    조회:4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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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창주
김창주교수 "고고학은 상상력의 학문 재미있는 보물찾기"라고


사람들은 고고학을 페쇄적이고 딱딱한 학문이라 생각하고있지만 평생을 이 학문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0만년전 인류생존의 흔적을 발견하고 11만년전 인류의 하악골을 발견하여 세계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고고학이라는 인간사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며 화석에 반해 울고 웃는 조선족고고학자 중국과학원 고척주동물과 고대인류포유동물연구소 김창주교수 (60세) , 오늘도 그는 근 35년 동안 일해온 연구소로 향한다. 연구소의 구석구석의 작은 화석 하나, 돌맹이 같은 유물 하나에도 김창주교수의 손때가 묻어있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좋아하는 꿈의 보금자리 같은 사업터이기도 하다.

김창주교수한테 고고학은 "상상력의 학문"이고 재미있는 "보물찾기"이며 인간사의 역추적으로 력사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모험과 랑만으로 점철된 아름다운 자역과학인것이다. 하기에 연구소에는 그의 젊은 시절의 피끓는 청춘과 삶의 희열 그리고 인생의 성공과 쾌락, 즐거움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김창주교수는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고고학이란 이 미지의 학문에 빠져들어 고대인류연구에 평생을 바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숙명처럼 다가온 고고학자의 길
1950년 연길에서 태여난 김창주교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뛰여나게 잘하여 1963년 연변1중에서 전 주적으로 처음으로 4개 초중반을 모집하는 영재반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중시험을 준비할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고중에 진학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왕청 복흥공사 탄장대대에 하향하게 되였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두메산골에서 농촌일을 배우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기도 한 그 시절은 김창주교수의 인생에서 어찌 보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그때의 고생은 먼 후날 김창주교수의 인생에서 금을 주고도 못바꿀 귀중한 자산이 되기도 하였다. 1974년 김창주교수한테도 기회가 왔다.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대학추천과 더불어 시험이 있었다. 김창주는 시험성적은 높았지만 가정성분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제일 마지막 지망으로 썼던 장춘지질학원에 가게 되였다. .

그때까지만도 김창주는 지질학원이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 학문인지 잘 몰랐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모아산에 뱀잡이하러 갔다가 지질대들이 광산조사를 하는것을 보고 지질이란 산이나 들에 대한 광산조사를 하는것이라는 아리숭한 생각이 전부였다. 지질학원에 입학한 첫날 선생님들한테서 지질은 지구를 연구하는 과학이고 이 과학이 인류에 대한 공헌은 이루다 말할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창주는 속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꼭 고향사람들을 위해 뭔가 공헌할수 있는 지질학자가 될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김창주는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열심히 공부하여 학과마다 우수한 성적을 따내 전교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훌륭한 학생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김창주는 중국과학원 고척주동물고인류연구소에 배치를 받게 되였다.

8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중국과학원 고척주동물고인류연구소는 우리 나라 연구소가운데서 력사가 가장 오랜 연구소로서 세계에서 고척주동물을 연구하는 유일한 연구소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 나라 고생물척주동물연구는 세계에서 제일 앞자리에 서고있으며 고인류 고척주동물을 연구하는 세계전문가중 이 연구소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중국과학원, 우리 나라 여러 분야의 유명한 과학가, 학자들이 모여있는 이곳에서 그리고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이곳 연구소에서 김창주는 부푼 꿈과 희망을 안고 제일 어린 말단연구원이라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매일 지방에서 사람들이 그 지방에서 발견한 유적이나 문물들을 적어올려오는 문서나 편지 또는 직접 보내온 화석을 접수하여 그것을 분리하여 선배 연구원들에게 바치고 또 보내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회신을 해야 하는 일들이다. 어찌 보면 따분하고 싫증을 느낄만도 하지만 김창주는 보내온 서류들을 열심히 읽고 일일이 회답하면서 보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더불어 격려와 고무해주는 말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연구소에 와 일을 시작하면서 김창주가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점이 바로 하루빨리 외국어를 장악하는것이였다. 고생물연구에 대한 수많은 자료와 론문들은 대부분 외국사람들이 쓴것이 많아 외국어를 모르면 연구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때로부터 김창주는 낮에는 연구소에 출근하고 저녁에는 외국어학습반에 다니면서 영어, 일어,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3년간 외국어공부에 열중하다보니 영어로 된 고생물연구론문들을 보고 또 쓸수도 있게 되였다.

그때로 부터 시작한 김창주교수의 외국어공부는 수십년이 흐른 오늘에도 계속 이어지고있는것이다. 반백을 훨씬 넘긴 지금도 김창주교수의 하루는 외국어공부를 시작하는 첫 일과로 시작되고있는것이다. 현재 김창주교수는 영어로 쓰고 읽고 담화하는데 전혀 막임이 없고 일본어는 일본에 류학을 다녀오면서 연구소에서 일본어 전문가로 불리울 정도도 뛰여나고 있으며 프랑스어는 프랑스어로 된 론문을 번역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연구소에서 명실공한 외국어전문가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김창주는 연구소에 와서 고척주동물과 고대인류변화를 연구하면서 이 학문이 얼마나 인류사회에 중요한것인지 실감하게 되였고 차츰 고고학 연구의 무궁한 매력에 빠지게 되였다.

화석에 울고 화석에 웃는 고고학자
화석에 빠지기 시작하게 되면서 김창주의 등에는 언제나 묵직한 배낭이 따라다녔고 문명한 현대인의 생활과는 담을 쌓은 위험하고 고달든 산행과 생활환경이 열악한 야외생활을 거듭하는 외길인생길이 시작되였다. 진귀한 화석을 찾으려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인적이 없는 산골로 들어가야 했다. 마땅히 잘곳이 없으면 마부와 함께 마차점에서 쪽잠을 잤고 마른 만두에 물을 마시며 끼니를 에우기도 하였다.

80년대 서방에서 인류학전시와 연구가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인기를 끌면서 북경원인에 대한 연구와 발견으로 고대인류연구에서 성과를 보였던 우리 나라에서도 인류기원연구를 본격적인 연구과제로 삼게 되였고 따라서 중국과학원 고척주동물과 고대인류포유동물연구소에서의 인류기원에 대한 연구도 급물살을 타게 되였다. 다년간의 진귀한 조사와 연구로 수많은 자료들들을 축적하면서 연구소에서의 입지를 굳혀왔던 김창주는 연구소로부터 인류기원과 인류가 살고있는 자연조건을 테마로 연구하는것을 새로운 연구과제를 맡게 되였다. 김창주가 연구소에 온후 처음으로 연구소의 책임자의 신분으로 조사연구를 하게되는 연구대상이였다.

처음으로 책임을 맡고 시작하는 연구과제로 며칠간은 잠을 이룰수도 없었다. 십여년간 연구소에 와서 선배 연구원들을 따라 중국의 가장 치벽한 산들을 오르내리며 거의 대부분 시간을 인부들과 함께 보내면서 고생물 자료수집과 연구에만 집년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문뜩 햇병아리 연구원시절 안휘성 번창에 있는 한 젊은이가 코뿔소의 화석을 비롯하여 보존상태가 괜찮은 동물화석을 가지고 연구소에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것을 단서로 생각을 굳힌 김창주교수는 연구원들을 데리고 안휘성 번창현에 내려가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생태환경이 좋은 안휘성 번창현은 예로부터 식물이 무성했지만 나무들을 마구 찍어내 벌거숭이가 되여버렸고 세멘트공장에서 돌을 캐느라고 많은 돌들이 쌓여있어 무엇을 발굴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드는 일이였다. 번창현에서 발굴을 시작하면서 김창주교수는 거의 매일 흙먼지와 고투하고 모기에게 뜯기우면서 힘들고 어려운 야외생활을 하였다.

“세멘트공장에서 버린 창고에 침대를 놓고 비닐로 창을 가리고 주숙하였는데 그 여건이 악렬한건 더 말할나위도 없고 제일 힘든것은 모기와의 전쟁이였지요. 그곳은 대부분 습지와 풀술이 많아 수십만 마리의 모기가 무리를 쳐서 다니는데 손으로 팔에 앉은 모기를 쳐 잡으면 한번에 열마리씩 잡힐정도로 모기떼의 공격은 살벌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김창주교수는 그 악렬한 환경을 어떻게 뻗이여 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라고 이야기 한다.

김창주는 청석사이에 인자형으로 많은 퇴적물이 있는것을 발견하고 세멘트공장 로동자들의 도움으로 그 돌을 직접 하나하나 청리해나갔다. 다행이도 청리작업는 고생한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였고 “인자동”이라고 이름지은 이 동굴에서 김창주교수는 인류기원에 대한 경이로운 발견을 연구해낼수 있게 되였다.

김창주교수는 인자동에서 검치호와 코끼리, 하에나 등 동물을 비롯하여 근 100개 포유동물의 화석을 발견하였을 뿐만아니라 고대원시인들이 쓰던 석기도 발굴하였다. 김창주교수의 인자동 석기의 발굴은 제일 처음으로 200만년전에 중국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간접적인 증거를 제기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제일 일찍 발견한 석기가 240만년인데 인자동에서 발견한 석기도 년대측정에 의해 200만년에서 240만년이라는것이 검증되였다

인자동 발굴후 김창주교수는 인자동발굴과 연구 전반과정을 책으로 출판함으써 국내외의 강렬한 반응을 얻었고 배원중상이라는 큰 영예를 받아안기도 하였다. 또 인자동에서의 수많은 동물의 화석과 구석기의 발견으로 치벽한 산골의 이름없던 번창진은 문화유적지로 거듭나게 되며 번창진은 인자동공원, 인자동복장 등 관광제품도 개발하면서 대내외에 그 이름을 알리며 또하나의 문화유적관광지로 되였다

세계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은 이변
김창주교수의 인류기원에 대한 연구는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비록 인자동에서 발견된 구석기는 200만년전에 중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간접적인 증거로 되지만 이 증거를 놓고 국내외과학자들가운데서도 여러가지 견해가 엇갈렸다. 2004년 5월 광서 승좌생태공원에서 연구활동을 하고있던 북경대학 교수반문석은 민공들로부터 입수한거원(巨猿)의 화석을 중국과학원에 의뢰하였는데 이 화석은 또 김창주교수의 손에 넘어오게 되였다.

김창주교수는 인차 6명의 연구원들을 거느리고 광서로 내려갔다. 전형적인 카스트르지형대로 가도가도 끝없는 기이한 모습의 산, 석회암으로 형성된 천연동굴, 산야를 뒤덮은 사탕수수밭, 얼기설기 뻗은 강줄기들,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김창주교수는 수많은 동물들이 서식하는 이곳이야말로 고대인류의 흔적을 발굴할수 있는 최상의 지역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때로부터 김창주교수의 목란산부근에서의 발굴이 시작되였다. 2005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그는 목란산부근에서 근 100여개에 달하는 동굴을 발견하였는데 그가운데서 지인동. 거원동과 같은 동굴에서는 200만년전에서부터 30만년전, 11만년전,그리고 6만년전의 인류화석이 나왔다.

세계 고인류학연구에서 이처럼 한 지역에서 수많은 화석이 나오는것은 극히 드문일이라고 한다. 2008년 5월김창주교수가 인솔한 고고학 발굴팀은 지인동에서 지인의 하악골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세계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이변이기도 하였다. 이 하악골은 시대가 대략 11만년전의 것으로 하악골의 형태를 보면 원시인이 현대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뚜렸이 나타나고 있었다.

1987년부터 미국유전학가들이 디엔에이 연구를 통해 전세계의 현대인은 모두 20만년에서 15만년 사이에 아프리카 원인이 진화한것이라 했다 그후 약 10만년에서 6만년 사이에 이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세아 대륙으로 전이해 왔는데 아세아인, 즉 중국인들은 아프리카 원인들이 진화하여 발전한것이라 했다. 그러나 김창주교수가 지인동에서 발견한 수많은 화석과 퇴적층이 선명한 지질구조는 삽시에 세계각지고고학자들을 주의를 불러일으켰고 세계내노라하는 과학자들도 이 지인의 하악골을 보고 확실히 중국에도 원인이 현대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있었다는것을 수긍하지 않을수 없었다.

2009년10월 27일 광서에서 <광서승좌유적답사와 지인동하악골발견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는데 세계14개 나라와 지구에서 온 유명학자들이 회의에 참가하여 지인동하악골 화석발견의 의의를 충분히 긍정해 주었다.

오늘도 김창주교수는 손수 손전등이며 연구원들이 지니고 떠날 도구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챙기며 또 발굴을 떠난다 목란산에서의 김창주교수의 발굴은 계속 되고있다.

35년간의 “견우”와 “직녀” 생활
화석하나를 발굴하기 위하여 짦게는 몇달, 길게는 수년. 수십년간 흙먼지와 고투하고 땀내에 절어다니면서도 김창주교수가 발견된 유물 한쪼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삶의 희열을 느끼고 더욱 고고학연구의 깊은 매력에 빠질수 있었던것은 언제 말없이 그의 뒤에서 그를 응원해주고 말없이 가정의 모든 짊을 짊어지고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였던 안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1년중 7월과 8월 ,1월과 2월을 제외하고는 집에 있어본적 없다는 김창주교수는 수십년동안을 거의 떠도는 나그네생활로 집은 간혹 들리는 려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해는 집의 가장이자 호주였고 아들딸의 엄마이자 아버지노릇까지 혼자 떠멨다.

안해는 그래도 원망한마디 없이 힘든 힘든 야외생활을 하다가 집에만 들어서면 된장국과 김치부터 찾는 남편을 기다리며 언제나 손수 김치들 담궈두고 된장국을 끓여놓고 남편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수십년간 견우직녀와 같은 부부생활을 해왔던것이다.

“남편을 기다리면서 하냥 걱정이지요. 남편이 하는 일이 늘 위험한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일이니 말입니다…” 김창주교수가 인자동에서 발굴작업을 할때일이라고 한다. 하루는 아침 다섯시에 연구소 소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집앞에 와있으니 얼른 함께 기차역에 가자는것이였다. 영문도 모른채 차에 앉은 그는 연구소책임자들의 표정을 보고 남편한테 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허둥지둥기차역으로 달려가는데 남편이 담가에 실려내려오는것을 보고 하늘이 내려앉는것 같았다고 한다. 벼랑에 매달려 화석을 채집하다가 떨어졌는데 다행이도 생명위험은 모면하였지만 왼팔은 팔굽이 끊어지고 오른팔은 팔목이 부러져 두 팔 다 수술하고 3년동안은 야외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김창주교수는 집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집에 와보면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안해한테도 미안하였지만 자식들한테도 아빠노릇 제대로 한번 못해 미안하였고 한다. 딸애가 대학시험을 치를때 함께 있지 못해 딸애가 서운해하는것을 보고 아들애가 대학시험을 칠때에는 꼭 아들애곁에 있겠다고 안해와 아들애와 약조하였다. 그런데 당시 안휘성 인자동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때라 현장에서 전화한통이 날아왔다. 전화를 받고 안절부절하는 남편을 보고 안해는 아들애는 내가 있으니 가보라고 하였다. 안해의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김창주는 안해와 아들애한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인자동발굴현장으로 향했던것이다.

현대생활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오랜 야외생활과 연구소에서 몇십만년 몇백만년전의 화석 하나를 놓고 대화하고 연구하는 김창주교수한테는 하루다르게 변해가는 현대생활의 모든게 생소하기만 하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만큼은 안해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많다는 그는 안해와 함께 마트에 가서 물건사는것도 재미있고 바트민톤 치는것도 무척 즐겁다고 한다. 오늘도 한잔의 차를 안해와 함께 하며 친구같은 안해와 담소한다.

2005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광서 목란산부근의 동굴을 오르내리며 흙먼지와 고투하고 있는 김창주교수는 너무나 행복하다고 한다. 남들은 평생을 연구하고 발굴하러 다녀도 하나도 찾아내기 어려운 화석들을 그는 이렇게 운좋게도 두번씩이나 찾아 세계 고고학계를 들썩이게 만들수 있으니 말이다.

유명한 고고학자, 어찌보면 현대인의 폼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지루하고 힘든 과정의 련속이고 농부처럼 퇴약볕에서 몇주일 몇달 몇년씩 고생하기도 하지만 그러다 발견된 화석하나를 높이 치켜들고 환호하면서 화석과 대화를 나눌수 있는 것은 고고학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무한한 매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김창주교수는 스스로도 천생 타고난 고고학자 인것같다고 말한다.

김창주교수와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들이 있기에 스스로 말하지 않는 화석과 유물들은 발견되고 발굴되며 우리 인류사회는 잃어버린 력사와 문화를 되찾고 복원할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연변일보 장연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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