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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고칠수 있고 이겨낼수 있는 질병"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3월22일 08시34분    조회: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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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병규

        환자들을 진료하는 박병규교수(오른쪽 두 번째 사람).

중국 중의 종양의료중심 주임 중국중의연구원 수석연구원 저명한 중서의결합페암치료전문가 박병규교수


우리 나라 저명한 중서의결합 암치료전문가, 우리 나라 중의 중약 페암치료일인자로 해내외에 명성을 날리고있는 명의 박병규교수(74세),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언론로출이 잦지 않아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암이라는 무서운 병마에 시달리는 수많은 환자들한테 그는 삶의 희망이고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박병규교수의 진료를 받으려고 매일 전국 각지로부터 수많은 암환자들이 박병규교수가 있는 중국중의과학원 광안문병원으로 구름같이 몰려든다. 하기에 그의 진료예약은 언제나 몇달간씩 밀려있다.

페암치료에서 현시대 “화타”라 불리울만큼 유명한 중의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여러 면으로 자료를 찾아본 결과 그분의 경력과 사회적인 직위 또한 의학적인 명성 못지 않게 화려했다.

원 중국중의과학원 광안문병원 부원장 겸 종양과 주임, 중국 중의 종양의료중심 주임, 중국중의연구원 수석연구원, 세계중의학학회련합회 종양전업위원회 회장, 중국종양림상협회중심(CSCO)지도위원회부주임위원, 국가과학기술장려위원회 특별요청심사위원, 북경항암학회 부리사장…

이렇듯 유명한 조선족의학자를 만나기 위해 여러 면으로 련락을 취해 드디여 지난 4월 24일 박병규교수를 취재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박병규교수는 광안문병원 8층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를 맞아주었다.

박교수를 만나는 순간 놀라운것은 박교수가 너무나도 멋지고 표준적인 우리 말을 구사한다는것이였다. 근 반세기동안 한어로 대화하면서 살아온 박교수가 이처럼 조선어를 막힘없이 그것도 아주 표준적으로 구사한다는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탄복스럽기도 하였다.

서의로부터 중의로
박교수는 1937년 길림성 해룡현 (현재 매하구시) 영성촌의 한 조선족농민가정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비록 농사를 지으면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자식교육을 중히 여겨 남달리 총명했던 그를 6살에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어린시절의 박교수는 하냥 우울하고 말수가 적은편이였다. 그의 아래로 다섯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련이어 홍진으로 페염으로 요절하면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었고 나어린 그도 홀로 처마밑에 쭈크리고 앉아 동생들을 그리며 눈물을 훔칠 때가 많았다.

11살에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산성진중학교(현 매하구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는데 15리나 되는 길을 걸어다녀야만 했다. 어린 나이인데다가 체질까지 약해서 그 먼길을 추운 겨울에 걸어다니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부모님은 당분간은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너무나도 학교에 가고싶었던 박교수는 울면서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질을 써도 소용이 없자 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 학교에 다니고싶다고 사정하였다. 결국 교장선생님의 설득으로 부모님은 박교수를 학교에 보냈고 다시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된 그는 15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신바람나게 학교에 다녔다.

초중을 졸업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료녕성 개원중학교(고중)에 입학하였고 거기에서도 공부에서 두각을 보였던 그는 1954년 대련의학원 의료학부에 진학하였다. 의학보다 농업이나 화학을 하고싶었지만 부모님들이 너무나도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알기에 박교수는 어쩔수 없이 의학을 선택했다. 대학교에서 갓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박교수는 제일먼저 페니실린 한대만 맞았어도 살수 있었던 동생들이 떠올랐고 산산이 식어버린 동생의 시체를 끌어안고 할머니, 어머니가 대성통곡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리기도 하였다.

“꼭 훌륭한 의사가 돼서 아픈 사람들을 살려주고 그들의 마음도 달래주자.” 그때로부터 그의 모든 애호와 취미는 의학과 관련된 모든것으로 바뀌여버렸고 갈수록 의학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그 어렵다는 의학공부를 너무나도 재미있고 신나게 완수할수가 있었다. 5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1959년 중국중의연구원에 배치받게 되였다.
중의연구원에 온 박교수는 인차 국가위생부에서 꾸린 제3회 중의학학습반에 들어가 2년 동안 꼬박 중의학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대련의학원 5년, 중의학습반 2년 장장 7년이라는 공부를 끝마치고 박교수는 드디여 광안문병원 침구연구소에 배치받게 되였다.

중국중의과학원 첫번째 류학생
광안문병원 침구연구소에서 위장병치료에 주력하던 박교수는 1971년 병원에서 내과병동을 설립하면서 내과에서 당뇨병 치료와 연구에 종사했다. 내과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박교수는 수많은 암환자들도 상대하게 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의사들까지 암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고 생각하고있었는데 박교수가 진료한 한 위암말기환자가 중약을 복용한후 2년후에도 생존해 다시 박교수를 찾아왔다. 그때로부터 박교수는 점점 암에 대해 료해하고 연구하고싶어졌다. 그러던차 병원에서 종양과를 확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75년 병원지도부에 종양과에 가서 사업할것을 신청하였다.

그때 박교수는 38살이였다. 중의내과계통에서 이미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 그가 다시 생소한 종양과에 가 사업하려고 하자 동사자들과 친구들은 이미 쌓아놓은 명성을 뒤로 하고 왜 하필이면 “장의사”가 되려고 하는가고 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암이라고 하면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암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그런 만큼 도전할 기회가 많은 분야라고 생각했다.

종양과에 간지 얼마 안되여 박교수는 농촌의료대로 하북성 한단에 내려가게 되였다. 당시 하북성은 우리 나라에서 식도암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근 1년간의 농촌의료봉사생활은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그는 이곳에서 한명, 또 한명의 식도암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하면서 식도암 진료와 치료에서 다방면의 림상경험을 쌓기도 했다.

농촌의료봉사를 끝내고 돌아온 박교수는 1977년부터 1978년까지 근 1년 동안 중국의학과학원 종양병원 종양내과에 1년간 연수하면서 서의학적으로 종양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하게 되였다.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열심히 종양에 관한 여러가지 지식들을 배워나가면서도 언제나 갈증을 느끼군 하던 그한테 드디여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78년 우리 나라에서는 류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게 되였다.1960년대부터 일어와 영어 공부를 시작했던 박교수는 일어는 소학교때 일어를 익힌 밑천으로 스스로 북경대학에서 편찬한 일어교과서를 가지고 사전을 찾으면서 자습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라지오방송강좌를 열심히 들으면서 영어도 독학으로 익혀나갔다. 이렇게 소리없이 익혀나간 외국어가 류학생외국어시험에서 은을 냈다. 외국어시험에서 박교수의 일어성적은 남달리 뛰여나 외국어시험에서 합격한 대부분 류학생들은 근 반년간 어학연수를 받은후 외국에 파견되였지만 그는 1979년 4월 직접 일본에 류학가 일본도 꾜의과치과대학 제2내과에서 연수받게 되였다. 박교수는 중국중의과학원의 제일 첫 류학생이기도 했다.

이미 다년간 중서의결합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한 풍부한 림상경험이 있는데다 일어실력도 남달리 뛰여난 박교수는 일본에 간지 얼마 안되여 지도교수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직접 환자들 진료에 나섰고 박교수에 대한 일본환자들의 믿음과 신뢰도 대단하였다.병원에서는 박교수가 중국에서 종양과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료해하고 박교수를 다시 일본의 국립암쎈터에 보내 연수받도록 했다.세계일류를 자랑하는 이곳에서 박교수는 일본의 저명한 페암치료전문가이고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기관지내시경을 발명한 이께다시게또교수로부터 전문적으로 페암에 대한 진단과 페암내시경진단방법을 차곡차곡 배워나갔고 페암에 대한 현대적인 치료방법을 배우고 연구했다.

페암환자들의 복음 “익페청화과립”—해외에 수출
일본에서 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교수는 짐을 풀자 피곤을 풀 사이도 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천성이 조용하고 겸손하며 나서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였지만 일본에서 2년간의 류학생활은 그한테 나래를 단 호랑이와 같은 신심과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박교수는 매일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여 수많은 약처방으로 헤아릴수 없는 동물실험을 거듭하면서 페암을 다스리는 중약복방제제를 만드는데 사활을 걸었다.

1984년 종양과 주임으로 발탁되면서 박교수의 페암치료에 대한 연구는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되였다. 1986년 중국중의과학원 광안문병원 부원장으로 승진한 박교수는 페암치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병원부원장과 종양과 주임직을 병행하면서 의학자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의 주최하에 진행한 “말기 원발성 페암에 대한 익기양음청열해독제의 림상치료와 실험연구”는 국가 “제7차 5개년 계획” 돌파과제로 선정되였고 이 과제는 중국중의과학원 과학기술성과상을 받기도 하였다. 또 이 실험연구를 기초로 박교수는 드디여 페암을 다스리는 중성약 “페류평고(肺瘤平膏)” (“익페청화고(益肺清化膏)”라고도 함)를 연구제조하여 제2기 림상실험을 끝마치고 국가위생부 의약국의 허가를 받고 천진달인당제약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뒤이어 박교수는 또 “말기페암을 치료하는 페류평계렬약 실험연구”를 다그쳤는데 이 역시 국가 “8차 5개년 계획”돌파과제로 선정되여 국가중의의약관리국과학기술진보상을 수여받았다.

박교수가 연구제조한 “페류평고”의 암억제률이 근 40% 이상에 달한다는 입소문이 터지면서 수많은 페암 중기, 말기 환자들이 박교수를 찾아 몰려들었다. 한번은 몇개월밖에 생존할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은 한 페암말기 환자가 박교수를 찾아왔다. 박교수는 익기양음, 청열해독, 거습화담법에 의해 치료하는 원칙으로 중약을 지어주고 동시에 “페류평고”를 꾸준히 복용하도록 하였다. 이런 치료법은 비록 종양을 소멸하거나 축소시키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암을 억제시켜 그 환자는 별 고통도 없이 비교적 건강하게 4년반을 생존할수가 있었다. 또 한 중기 페암환자는 화학치료료법과 동시에 박교수의 치료료법을 결합하여 치료한결과 9년 반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생활하고있다…

2006년 중국중의과학원에서는 외국의 선진적인 제약기술을 인입하여 박교수가 개발한 “페류평고”를 다시 과립으로 개발하여 국가급 새로운 약 “익페청화과립”을 연구제작하여 중국중의과학원 산하 북경화신제약유한회사에서 단독으로 생산하도록 했다.

이 약이 새롭게 나오자마자 신화사, 인민일보, 광명일보, 건강보,중국의학보, 과학시보, 북경일보 북경조간 등 대형매체들에서는 앞다투어 페암치료 신약에 대해 소개하였으며 미국,유럽,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들에서도 이약에 대한 문의전화가 폭주했다. 페암환자가 비교적 많은 말레이시아에서는 지금도 “익페청화과립”을 대량으로 수입하고있다.

손연원사와 손잡고 부정배본법의 새 력사 쓰다
우리 나라 종양내과치료창시자의 한 사람인 저명한 의학자 손연원사가 1998년 중국림상종양학회(CSCO)를 설립하면서 이 학회 지도위원회 주임을 담임하고 중의로는 유일하게 박교수를 지도위원회 부주임위원으로 발탁하면서 서로의 의술과 의덕을 서로 높이 평가하고있었던 종양계의 두 거장은 손을 잡고 우리 나라 항암치료에서 중서의 통합치료 부정배본법(扶正培本法)의 새로운 력사를 써나가고있다.

부정배본법이란 수술치료, 화학치료, 방사선치료를 하는 암환자들에게 중약을 씀으로써 부작용을 최소한 줄이고 원기를 돋구어주며 암이 재발되거나 전이되는것을 막아주며 암환자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것을 일컫기도 한다.

서의를 전공하고 여직껏 저명한 중의로 일해온 박교수지만 그는 항암치료에서 중의치료는 몸의 면역력을 극대화하고 암치료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데 목적이 있는것이지, 암세포 자체를 줄이거나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므로 보안료법이며 중서의 통합치료만이 가장 리상적인 치료방안이라고 강조한다.

중의인 박교수는 환자들을 진료할 때 먼저 진맥하고 처방을 쓰지 않는다. 그가 제일먼저 고려하는것은 환자에 대한 진단이다. 대부분 암환자들은 진단을 받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우선먼저 서의학의 렌트겐선, 내시경, 세포진, 초음파촬영, 오위원소주사 등 최첨단의료기술로 환자에 대한 검사 진단을 세밀히 한 다음 그에 알맞은 치료방안을 세워준다. 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 화학치료, 방사선치료를 해야 하는 환자에 대해서는 제때에 적중한 진단을 내려 암환자들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제때에 수술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도록 알선해주고 그런후에 그에 알맞는 중약을 쓸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박교수는 암치료에서 중의치료는 비록 보안료법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갈수록 중의 종양학치료법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있으며 특히 중서의결합 통합치료 일명 부정배본법은 특히 페암, 위암을 비롯한 각종 암치료에서 놀라운 치료효과를 보고있다고 강조한다.

1987년 9월 박교수는 일본 도꾜에서 열린 제1차 일본중국 한방의학학술회의에 참가하여 “악성종양에 대한 중서의 결합치료법”이란 론문을 발표하여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그후에도 선후로 미국, 로씨야, 일본, 타이, 싱가포르 한국, 조선 등 나라에 가 중서의결합치료를 주제로 한 전문강연을 함으로써 성망을 얻기도 하였다. 박교수는 또 “페암에 대한 중서의료법”, “페암말기의 중서의결합치료에서의 392병례에 대한 림상분석” 등 50여편에 달하는 론문을 국내외 이름있는 의학잡지에 발표하여 국내외학자들의 깊은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1994년부터 박교수는 또 석사연구생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선후로 6명의 석사, 4명의 박사, 1명의 외국적석사, 2명의 외국적박사, 5명의 박사후를 양성해내 높은 의술과 의덕을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몰붓고있다.

“암 고칠수 있고 이길수 있는 질병이다”
박교수는 암이란 인제 더는 고칠수 없는 무서운 악마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로 중서의를 결합한 통합치료를 받는다면 얼마든지 고칠수 있고 이길수있는 병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근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암을 이겨내고있습니다. 암을 싸워야 하는 적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함께 이겨낸다면 얼마든지 고칠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기에 박교수는 제일 먼저 암환자들에게 암에 대한 공포와 무서움을 떨쳐버리고 편안한 정신상태로 치료에 림한것을 부탁한다.

박교수는 암환자에게 면역력은 너무도 중요한데 사람이 절망에 빠지거나 공포를 느낄 때는 면역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떨어지고 따라서 건강도 급격하게 악화될수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박교수는 암환자를 진료할 때 환자와의 신뢰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최악의 상황이라도 환자가 편안하게 병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치료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안정하도록 하는것이다.

지금도 지역의 의료기술과 인재가 부족하여 수많은 환자들이 북경에 몰려들고 특히 아직도 많은 지역 농촌의 의료시설이 너무나 차해 병이 많이 악화된후에야 북경의 큰 병원을 찾아 허둥지둥하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박교수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박교수는 꼭 그들한테 그 지역의 괜찮은 병원과 의사들을 소개해주면서 그쪽에서도 안심하고 치료할수 있도록 련계를 달아주기도 한다.

환자들을 진료하고 환자들곁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명의 박병규교수, 그는 명의는 꼭 매체에 잘 알려지고 유명한 병원의 유명한 박사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평범하지만 환자가 가장 편하게 찾을수 있고 만날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 환자의 명의 라는것,많은 환자를 고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바로 지금 자기앞에 있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바로 명의라고…

참으로 뛰여난 의술과 의덕을 자랑하는 명의 박병규교수만이 할수 있는 명언이였다.

연변일보 장연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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