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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살아온 삶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3월28일 10시19분    조회:4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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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신봉철

 퇴직한 로교수를 찾아 따뜻이 위문하는 신봉철(왼족 사람)서기.

길림공상학원당위 신봉철서기를 만나

수십년간 정계에 몸을 담고 청장급간부로 발탁된지도 어연간 17년… 카리스마 넘치고 판단력과 추진력이 뛰여난 반면 어딘가 딱딱하고 “위엄”있는 일인자의 모습일것이라는 기자의 선입견은 그를 만나는 순간 여지없이 깨여졌다. 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 신봉철(56세), 현재 연변대학을 제외하고 국내 대학교 일인자가운데 유일한 조선족인 그는 진한 “사람냄새”를 지니고있는 따뜻한 사람이였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있는 그런 사람… 그 어떤 상투적인 단어에서도 진지함을 골라낼수 있는 로시인의 주름진 손처럼…

"장장 17년 동안 연변일보사에서 저에게 무료로 신문을 보내줬습니다. 고향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있었기에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릅니다. 저 역시 연변일보의 충실한 독자입니다." 고향에서 왔다고 반갑게 맞아주는 그가 우리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아마도 그 "덕분"에 취재도 이루어진것 같았다.

아직도 젊은이 못지 않은 정열과 열정으로 때론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게 때론 부드럽고 여유있게 자신의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신봉철서기, “인민의 훌륭한 공복”이라는 항간의 평가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두메산골에서 태여난 꿈많고 당찬 소년
신봉철씨의 고향은 돈화시 안명호진 대구촌이다. 조선족이 적은 돈화시였지만 당시 대구촌은 60세대중 한세대외 전부 조선족세대였다고 한다. 비록 어려운 살림이였지만 촌조선족소학교 교원으로 특별히 자식교육을 중히 여겼던 그의 부모는 남달리 총명했던 그를 6살에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어린 신봉철에게는 소중한 꿈이 생겼다. 생산대 운동대회때 어머니가 해주었던 닭알볶음의 맛에 취해 언젠가는 꼭 마음껏 닭알을 먹을수 있는 대형양계장을 꾸리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가 소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돼 학교에서 인원정선제가 실시됐는데 그 "불똥"이 신봉철씨의 어머니한테도 떨어졌다. 그런데 한마디 토론도 없이 어머니를 정리해고시킨 "장본인"이 자기의 아버지일줄이야. 그 일로 그의 어머니는 개혁개방전까지 한평생 15원의 로임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머니의 일로 많은 육친들이 아버지를 질책하고 원망하였지만 남달리 어른스러웠던 신봉철씨는 처음으로 어려운 살림에도 과감히 어머니를 정리해고시킬수 있었던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에 탄복했으며 그런 아버지가 더없이 멋진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더 많이 생각하고 배려하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지니며 리더의 자질을 키워오기도했다. 후날 정계에 몸을 담으면서 간혹 힘들고 치지고 억울할 때마다 어릴적 기억했던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이 언제나 큰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여 오늘까지도 마음속에 의지할수 있는 큰산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후 아버지가 림승공사중심소학교로 전근하면서 그의 가족은 대구촌을 떠나 림승공사로 이사했다. 초중에 입학하면서 학습성적이 줄곧 앞자리를 차지했던 그는 14살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청단조직에 가입했고 류하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는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번역가, 기자로 되는 새로운 꿈을 키우며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는 중학교시절부터 열심히 글도 써보고 신문에 투고도 하였는데 연변일보에 1년에 많게는 70여편의 원고를 투고해 련속 몇년간 우수통신원으로 평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중을 졸업한 신봉철씨는 어릴적부터 키워왔던 소중한 꿈들은 잠시 접어두고 공사의 추천으로 관지조선족중학교 민영교원으로 배치받아 한어, 조선어, 화학 등 여러가지 학과목을 가르치게 됐다. 12명 교원중 유일한 민영교원이였던 그는 로임받는 날이 제일 괴로왔다. 누구 못지 않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원직에 충직했지만 민영교원이라는 리유로 남들은 현금봉투를 들고 신나할때 그만은 공수계산서 종이장을 받아쥐고 울먹거려야 했다.

민영교원으로 있은 몇년간 신봉철씨는 처음으로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어쩔수 없이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처음으로 이런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노력하는 사람이 되여야겠다는 아득한 소망을 가지게 되였다고 한다.

교육자에서 "관리"로의 삶의 전환
어려움속에서 더 큰 포부를 가슴에 품고있던 그한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77년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그에게도 입시시험의 기회가 찾아온것이였다. 그러나 민영교원이였던 그는 매일 여덟과목의 수업을 완수하고 저녁 늦게 퇴근해 다음날 강의안을 쓰다보면 대학입시준비란 마음뿐이였다. 나중에 학교에서 대학입시 3일을 남겨두고 자습시간을 주어 그는 연변사범전과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서 그는 학문도 뛰여나고 품행도 우수한 모범생이였다. 하여 재학기간인 197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졸업후에는 연변예술학교 교장의 눈에 들어 연변예술학교 공청단서기직을 맡게 됐다. 1980년에 연변예술학교 작곡반이 전문대학반으로 지정되면서 신봉철씨는 첫 전문학과 담임을 맡았다.

탁월한 기획력과 판단력을 소유한데다 리더십이 특별히 뛰여났던 그는 1980년에 공청단 연변주위에서 부부장으로 활약했고 1984년에 공청단 연변주위 서기로 발탁 , 연변청년련합회 주석직을 겸하면서 정계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다.

공청단 연변주위에서 사업하는 근 5년 동안 그는 하루를 48시간처럼 보내며 동분서주했다. 공청단원들을 조직하고 전 주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렬사비를 대거 보수한 사연은 당시 연변일보 1면에 보도되기도 하고 150여킬로메터의 도로록화에도 앞장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아안았으며 “연변청년문명공약”을 제정하기도 했다. 1985년 8월에는 전국공청단정치사상사업회의가 처음으로 연길에서 열리게 되였는데 대회에서 신봉철은 공청단 연변주위대표로 경험을 소개하여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영예나 직위에 앞서 백성을 위해 뭔가 할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던 5년 동안 신봉철씨는 너무나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과 소중한 인연을 쌓아왔다고 한다… 그중 잊지 못할 추억은 1984년 호금도동지와의 인연이라고 했다. 당시 공청단 연변주위 서기 신분으로 연변에서 호금도동지를 접대하는 행운을 안고 장백산에서 동행했던 잊지 못할 시간들 , 그때 장백산에서 호금도동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추억의 한자락으로 가슴깊이 남아있다고 한다.

1985년 안도현당위 부서기로 부임된 신봉철씨는 1989년까지 안도현에서 사업하다가 이해말 룡정시당위 부서기로, 1992년 36세 되는 해 룡정시 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주내에서 가장 젊은 시장으로 되였고 2년 뒤에는 룡정시당위 서기로 임직했다.

격정과 승진, 업적으로 점철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그는 "안도현에서 근 4년 동안 부서기로 있으면서 자부심을 가질수 있었던 일은 박순자씨를 중국공산당 제13차 전국대회 대표로 추천, 선발한것"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9년제의무교육이 성정부의 검토를 통과, 룡정시를 성급쌍용모범도시, 성급위생도시로 건설, 해마다 백성들을 위한 실제적인 일을 하기로 다짐한 이 모든것이 다 신봉철씨가 룡정에 있는 동안 일궈놓은 업적이였다.

자신의 업적을 먼저 내세우기에 앞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신봉철씨는 진정 "사람 냄새 나는 정치인"임이 틀림없었다.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 사업에 바쳐온 15년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신봉철씨는 선후하여 길림성 로동청, 로동보장청, 인력자원및사회보장부문에서 부청장으로 장장 15년 동안 자신의 청춘을 바쳐왔다. 1997년, 양로보험통일제도를 내오기 위해 직접 문건초안작성소조 조장을 맡고 8개 직속기관을 조직하였으며 18명의 동료와 함께 13일 동안 뇌즙을 짜내 드디여 관련 문건초안을 내왔다. 이는 길림성정부문건으로 작성되면서 길림성양로보험제도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1999년 신봉철씨는 또 길림성 의료보험개혁 의견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 역시 정부문건으로 발부되면서 정식으로 길림성의료보험제도로 되였다. 당시 신봉철서기는 길림성의료보험관리중심 제1임주임을 겸했다. 2001년에는 국가로동및사회보장부에서 7개월간의 양성취업사 부사장직을 겸하면서 선후하여 15개 성, 자치구, 시에서 조사연구를 펼쳤다.

2004년, 신봉철씨는 창업으로 취업을 이끄는 활동방안을 제기하고 6년 동안 빠짐없이 관련 계렬활동을 펼쳐나갔다. 같은 해에 그는 전 성 로력시장을 인력자원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도록 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로력시장을 인력자원시장으로 변화시킨것보다 4년 앞섰다. 2008년에는 전 성 기술공업학교에서 "자질을 높이고 형상을 수립하며 최고를 다투자"라는 활동을 펼치고 "8가지를 비기고 8가지를 보자(八比八看)"를 제기했는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2010년 ,장장 15년, 5425일이란 긴 시간 인력보장사업에서 소리없이 일만해왔던 그한테 조직의 또 다른 부름이 기다리고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드는 순간이였다. 자신의 청춘과 정열, 희망을 쏟아부으며 연구하고 구상했던것들을 떠나자니 유감과 함께 아쉬움이 뒤따른것이였다.

" 청사를 떠날 때 20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문밖까지 배웅해주며 내손을 잡고 오래동안 놓치 않던 모습들을 잊을수가 없다. 이는 두고두고 나한테 큰 힘이 되고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수 있는 인생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신봉철씨는 15년 동안의 인력보장사업에서의 나날들을 《탐색》, 《사색》, 《모색》 등 3권의 책으로 수집정리하여 인력보장부문에서 일해온 15년이 분명 민생과 백성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은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손색없는 15년이였음을 입증하고있다.

"길림공상학원은 나에게 뒤늦게 찾아온 봄"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취임된 곳은 그동안 몸담그었던 정계와는 거리가 먼 인재양성의 요람—대학교. 신봉철씨가 길림공상학원의 당위서기 취임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고 한다. 과연 정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더구나 조선족인 그가 대학교육실정을 알면 얼마나 알고 또 대학교의 키잡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수 있을가?

하지만 그가 취임된지 50여일도 안돼 이런 우려는 씻은듯이 사라졌다. 현재 교내에서는 "신봉철서기효과"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신서기에 관한 미담이 전해지고있다. 교직원주택과 학생기숙사의 난방이 잘 안된다는 의견을 접수하고 직접 온도계를 들고 보이라실, 기숙사를 일일이 찾아보며 문제를 해결해준 일… 더욱 화제를 몰고온건 취임식 날 그의 학원당위서기 취임약속이였다. 솔선수범하는 "책임지는 당위서기", 조화롭게 사업하는 "너그러운 당위서기", 봉사정신을 가진 "진보적인 당위서기", 성과를 올려 "열심히 일을 하는 당위서기", 규률을 지키고 법을 준수하는 "청렴한 당위서기"로 될것을 약속한다는 그의 취임약속은 수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봉철서기는 사업에서 늘 "다섯가지"를 강조한다. 바로 "민생, 대사, 제도, 리념, 조화" 였는데 그중 그는 특별히 "민생"을 강조하고 항상 앞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항상 "진정으로 민생을 책임지고 실제로 의미있는 일을 하는것이 당위서기로서 해야 되는 일이다"면서 해마다 8가지 실제적인 일을 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해왔다. 지난해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로간부활동실에 악기를 기증하고 부청급이상 로간부들에게 공무용차, 학생들의 편리를 위해 자동현금인출기 3대를 새로 증가하고 학생활동실에 문예활동기자재와 설비를 갖추어주고 교직원들의 책임수당금을 올려주고 건강검진을 받도록 하며 교수들의 직함문제를 해결해주는 등 8가지 일을 착실히 완수했다.

요즘 들어 대학졸업생들이 취업난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 신봉철서기는 마냥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어왔기에 그들의 고충을 안다. 부모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취업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하는 그는 늘 이 문제를 념두에 두었다. 성정협 위원인 그는 올해에도 "부모같은 마음으로 대학생취업을 추진할데 관안 제안"을 내오면서 각계 지도자 및 관련 부문의 높은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신봉철서기는 길림공상학원의 실제정황으로부터 출발해 참답게 졸업생취업사업을 틀어쥐고 이끌어가고있다. 더구나 동북로공업기지진흥과 선도구일체화전략실시의 절호의 기회를 빌어 시의적절하게 "2차 창업, 도약식발전"이라는 목표를 제출하고 실용인재를 배출하고 사회, 경제 발전에 공헌하리라는 약속을 내걸었다.

본과대학으로 된지 불과 5년밖에 안되는 길림공상학원은 요즘 새 캠퍼스 확장건설로 바쁘다. 새 캠퍼스확장건설은 학원 전체 교직원들이 제일 관심하고 주목하는 초점문제이며 오래동안 남아내려온 숙제이자 시급히 풀어나가야 할 난제였다. 여러해동안 반복적인 토론연구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방치해두었던 난제였다. 신봉철서기는 부임한지 얼마 안되여 이 일에 달라붙었다. 자료를 수집하고 의견을 청취하고 전망계획을 작성하였으며 새 캠퍼스를 경제개발구에 건설하는 방안을 내온 뒤 천명 교직원 대회를 통해 의견을 통일했다. 사람들은 신봉철서기의 결단력에 탄복했고 "조선족 신봉철"을 다시 보게 되였다.

"길림공상학원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고 새로 답을 작성해야 하는 시험지다. 학문연구와 독서를 즐기고 아이들과 어울리는것이 소원이였는데 내가 바라던 곳으로 온것 같다." 요즘 신봉철서기에게는 5가지 소원이 있다. 바로 학원의 "12.5"전망계획을 전면 실시,학원의 종합실력 제고, 현대화한 캠퍼스를 성공적으로 건설, 모든 교직원들과 리퇴직직원들에게 주택을 마련해주는것 그리고 퇴직할때 안전하게 “착륙”하는것이라고 한다. 대학교전면발전을 위해 밤낮없이 면밀주도하게 생각하고 일해가면서도 자신한테는 더없이 린색한 그의 작은 소망, 곧바로 퇴직할 때 후회없이 부끄럼없이 조용히 일인자의 자리를 떠나는것이라고 한다…

지난해말에는 길림공상학원에서 사업한 2년간의 나날들을 《새로운 로정》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여 대학교교수들마저 탄복하게 만든 신봉철서기의 탄탄한 실력과 파워, 늦깎이 봄을 맞은 신봉철서기의 인생 도전은 구경 어디까지일가… 교육자에서 정치인으로, 정치인에서 또다시 교육자로 업그레이드 된 그의 인생도전은 분명 아름다운 수채화마냥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과 여운을 남기며 후세에 전해질것이다.


연변일보 장연하 전윤길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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