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족 력사연구 개척자, 항일투쟁사 대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6월13일 11시11분    조회:613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박창욱



《대학은 얼마나 많은 고층빌딩을 갖고있는가에 따라 지명도가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대가를 갖고있는가에 의해 그 지명도가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창욱선생은 그야말로 전반 조선민족항일투쟁사의 대가로서 우리 연변대학의 보배요 모든 사학도의 사표라 하겠다.》

 

연변대학 전임 교장 박문일선생은 반세기에 걸쳐 중국조선족력사연구에서 독특하고 창의적인 관점과 연구방향을 제시하고 탁월한 성과를 거둔 박창욱선생에 대하여 일찍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불령고개길과 민족사 입문

1891년 충주박씨 일가족이 조선 무산으로부터 두망강을 건너 연길현쪽을 바라고 령대를 넘고있었다. 도중 불령고개에서 할아버지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할아버지는 쑥대밭가운데 무덤으로 남고 할머니는 두살짜리 아들을 등에 업은채 3형제를 이끌고 화룡현 사도구 포지골에 와 임을 내렸다.

사촌들을 의지하고 아글타글 살아오는 동안 등에 업혀온 아들이 어느덧 18세를 잡아 장가들고 4형제를 보았는데 그 막내가 바로 박창욱선생이였다. 박창욱선생은 1935년 여덟살을 잡으면서 연길현조양천소학에 입학했다. 2년후 조양천소학교가 국민우급학교로 변했고1939년부터는 일제의《황국신민화》(黄国臣民化)교육이 강압적으로 진행되였다.

1940년 박창욱교수는 길림성제6국민고등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교원은 대개 일본인이였고 학생들은 절대다수가 조선인학생들이였다.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으로, 노예로 만들기 위한 야만적인 민족통치하에 박창욱교수는 조선민족 력사와 현실문제에 급격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학교당국의 우민화정책에 반발하며 학생들과 함께 일간동맹휴학을 단행하고 학교당국을 성토하였다.

1945년 길림에서 8.15해방을 맞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연변에 진주한 조선의용군과 항일련군은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조선인이 소유하고있던 토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어 그의 일가는 중국에 남게 된다.

1949년 연변대학이 세워지면서 박창욱선생은 선참 지원등록을 한다. 하지만 학생모집이 중단되는바람에 경비대에 지원하여 참군하였다. 그는 부대를 따라 료심전역, 평진전역 나아가 장강을 넘어 호북, 사천 중경 해방전에도 참가하였다.국내 해방전쟁이 승리한후 그는 또1950년 조선전장으로 나가며 6.25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한다.

건강이 회복될쯤 1952년 7월 다시 연변대학 학생모집에 응하여 력사학부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력사공부에 정진하면서 그는 자신의 가족사가 곧바로 조선민족력사의 한페이지임을 절감하며 조선민족해방운동사에 크나큰 관심을 갖게 된다.

1956년 최우수생(전교 3명에게 수여)으로 연변대학을 졸업한 그는 조교로 연변대학에 남아 사업하게 되였다. 이듬해 연변대학의 파견을 받고 상해화동사범대학에 가 유명한 력사학자인 오택의 지도아래 력사연구방법론을 배우게 된다. 여기서 박창욱교수는 조선족력사를 연구하고 연구리론과 연구방법체계를 세우는 방향을 잡게 되며 2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연변대학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조선민족해방운동사 연구에 투신하였다.

 
력사문제를 현실화하지 말고 학술문제를 정치화하지 말자는 주장에 서로 동감하는 조남기장군과 박창욱교수.

《조선족의 력사기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

1958년 전국적으로 소수민족력사를 조사하는 열조속에 박창욱교수는 동북지방당사연구위원회에 연구원으로 파견되여갔다. 이 시기 위원회가 소장하고있는 당의 극비문건과 일제가 남긴 풍부한 력사자료와 문헌들을 그는 일일이 카드를 작성하여 기록하면서 탐구를 진행하였는데 이는 그가 후날 남다른 연구성과를 올리는데 주추돌로 되였다.

1961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는 연변대학의 학자들로 조선족력사편찬조를 뭇고 조선족략사를 편찬하였다. 전국적으로 가장 빨리 완성된 이 초고를 중앙에서는 내부간행물(白皮书)로 출판하고 중국소수민족사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연구도서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연변대학은 《지방분렬주의 기지》로 봉쇄되고 박창욱선생은 학문연구의 권리마저 박탈당한채 대학교에서 쫓겨나 농촌학교로 전전하였다. 와중에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연변대학에 반년간 수감되기도 하고 소장하고있던 문헌자료들을 몽땅 몰수당했다.

1978년 8월, 박창욱교수가 다시 연변대학에 복귀했을 때는 이미 모든 자료들이 분실되고 교과서도 연구일군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이미 50세를 넘어선 때였다.조건은 창조해야 했고 민족사연구는 미룰수 없는 사명으로 다가왔다.

그의 연구는 발로 뛰는 연구였다. 우리 민족 항일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 수많은 전적지들을 답사했고 전국 각지의 도서관, 당안관을 누비면서 부지런히 자료를 발굴하였다. 그는 중국조선족력사의 상한설(上限说, 明末清初说)을 천명하기 위하여 1986년 직접 제자들을 거느리고 문헌자료를 검토하는 한편 명말청초에 중국 하북성 청룡현에 이주한 박씨촌 (375명), 료녕성 개현의 박가구 (275명), 료녕성 본계현 산성향의 박포일대(1235명)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촌민들은 언녕부터 조선언어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식속에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후손으로 기억되여있었고 그들의 생활속에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풍속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여 정부에서는 만족이나 한족으로 기입된 이들을 모두 조선족으로 시정해주었던것이다.

박창욱교수는 상세한 조사를 진행한 기초상에서 학생들과 함께 《조선족의 천입과 력사상한선문제를 론함》이란 론문을 집필하여 조선족력사의 기점을 명말청초로 잡을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는 사학계와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59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건국후 조선족사회에 대한 제1차력사조사에서 이미《조선족100년설》이 제기되여 깊은 영향을 미쳐왔던것이다. 박창욱교수는 《조선족100년설》은 당시 조선족력사연구가 깊이 전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얻은 설법이기에 과학적인 정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잇달아 민족기준을 언어문자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민족심리와 민족의식에 그 기준을 맞춰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허다한 학술론쟁을 벌이면서 천입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력사기점을 17세기30년대로 새롭게 확정하였다.

이는 중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문제로서 중국조선족력사의 전체틀과 조선족이 중화대가정에 가입한 력사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를 전제로 1985년에 드디여 《조선족략사》를 출판해냈다. 이 책은 조선족력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2중사명설》과 활발한 학술교류

1980년4월 연변대학력사연구소가가 설립되였다. 박창욱교수는 소장직을 담임하고 연구생들을 거느리고 심입되는 연구과제들을 풀어나갔다. 1989년부터 12년간 8권에 달하는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를 집필하는 대형프로젝트에 착수한것이다.

중국조선족의 각 력사행정에 따른 력사적진실을 진술함에 있어서 학자들은 각이한 주장으로 갈리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조선족의 동북에서의 반제반봉건투쟁력사는 조선독립과 조선민족해방운동에 귀속되는가 아니면 중국혁명력사의 일부분인가 하는 론쟁들로 획분이 어려웠다. 이면에서 박창욱교수는 중국조선족의 력사적특성에 립각하여 중국조선족은 조선민족독립과 중화민족해방이라는 두가지 사명을 한어깨에 짊어지고 투쟁했다는 《2중사명설》을 제기하였다. 이런 학술관점은 학계의 쟁의를 불러일으켰으나 점차 사회전체에 받아들여져갔다.

박창욱교수는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학술교류를 진행하면서 민족력사연구에서 객관적인 진실을 고수하였다. 남북측 학자들의 한계를 직시하고 림시정부와 남만의 민족독립운동에만 초점을 두거나 동만청산리대첩은 중시하면서 왕청일대 전투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현상, 한국독립군에 대하여 과대평가하고 조선혁명군과 량세봉장군에 대하여 홀시하는 등 현상들에 대해 대량의 론문을 집필하여 객관성을 제시하였다. 북측학자들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독보적 조선혁명군 창설》설법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령도한 항일련군 제2군 6사는 객관적환경 때문에 조선혁명군을 설립하지 못하였음을 력사적사실로 증실하였다.

그는 늘 력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학술문제를 정치화하지 말고 력사문제를 현실화하지 말것을 주장하면서 대내외학술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그는 1988년경 미국하와이대학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 강당에 올라《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조선족의 력사》에 관한 론문을 발표하고 1998경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 출석하여 《중국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의 민족구역자치 실시》라는 론문을 발표하여 중국조선족력사에 대한 소개와 함께 중국공산당의 일관한 소수민족정책을 널리 선전하였다. 론문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의 허위성》은 일본학자들의 경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가 집필한 론문《중국조선족력사와 금후전망》(1994년)은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한민족공영체》에 련재되고 《조선족략사》(1992년, 한문)는 길림성사회과학성과가작상 및 동3성조문출판물1등상을 받았으며《로씨야연해주의 조선인》(2002년)은 중국사회과학성과 1등상을 수상하였다.

량지의 학자 사심없는 후대양성

박창욱교수는 허다한 학술관점을 천명함에 있어서 연구생들과 함께 증실작업을 펼쳤다. 그는 교재와 력사체계가 계통적이 되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친히 자료를 수집하고 교수안을 작성하면서 자체로 교재를 만들어 교학임무를 완수하였다. 하여 현재 연변대학민족연구원에 소장되여있는 조선족력사에 관한 문헌자료와 조사일지는 거의 모두 박창욱교수가 당시 수집해놓은 자료들이다.

론문답변을 순조롭게 마친 제자들과 함께. 

그는 연구생들의 연구시각을 넓혀주고 종합연구능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조선족력사와 관계되는 모든 지식을 전수하였으며 조선족사를 중국과 조선 그리고 동북아국제관계의 변화속에서 유기적인 연구를 하도록 다방면의 인도를 하였다.

제자들은 학문연구에서 튼튼한 기초를 닦고 국내외 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조선족력사관련 권위적인 론문들을 펴냈다. 연변대학민족연구원 원장 손춘일교수가 쓴 《만주국이 재만조선인에 대한 토지정책연구》, 연변대학 민족력사연구소 소장 김춘선교수가 쓴《간도지역 조선족사회형성연구》, 연변대학 력사학부 김태국교수가 쓴《만주지역 ‘조선인민회’ 연구》등 수십명의 박사론문들은 모두 박창욱교수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박창욱교수는 학문연구를 위해 해외에서 찾아오는 학자들에게도 사심없는 가르침과 헌신적인 방조를 주었다. 한국의 저명한 력사학자이며 원 상지대학교 총장인 강만길교수는 《특히 민족해방운동사부분과 친일반민족행위규명작업 등에서 박창욱선생의 정확하고도 해박한 지식은 한국 학계에도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고, 전 한국통일부장관 이종석교수는.《선생님은 깊은 통찰력에 바탕을 둔 실증과 해석을 통해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중조관계를 연구하는데도 커다란 힘이 되여주셨다》,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와 더불어 선생님이 지탱해온 삶의 궤적이 곧 연변의 조선족력사 그 자체이며 선생님의 학문적 열정과 력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어느 젊은 학자들도 견주기 힘들다…연변지역 민족해방과 혁명력사에 관한한 그이는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찬탄을 표하였다.

현재 연변대학민족연구원 원장으로 사업하는 손춘일교수는 《박창욱교수님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연구성과와 학술태도, 교육자로서의 성품은 영원한 본보기가 되여 우리를 격려하고있습니다.》라고 하며 은사님을 그린다.

박창욱교수 리력

1928. 9. 18 화룡현사도구포지(刨地)골 출생

1952.7-1956.7 연변대학력사학부 학생

1956.8-1978년 8월 연변대학력사학부 교수

1978. 8 -1980년 7월 연변대학력사학부 부학부장

1980.4- 1980.7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소장

1992년9월 정년퇴직

2010.6.17 별세

주요 론문:

《중국 조선족력사와 민족자치 실시》(1988년) 미국하와이대학 국제학술회의 발표

《1927―1989년 민족좌우진영의 민족유일당조직 촉성운동》(1989년) 한국국사편찬위원회 주최 국제학술회의 발표

《중국 조선족력사와 금후 전망》(1994년)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한민족공영체》 제1,2,3호 련재

《중국 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의 민족구역자치 실시》(1998년),

《1940년이후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항일유격전쟁》(1999년)

《로씨야연해주의 조선인》(2001년) 일본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

근 100편의 론문을 국내외에서 발표.

저서:

《중국조선족략사》(1985년) 주필, 연변인민출파사(조,한문)

《간도사신론》(上,下1989년)주필. 한국 《우리들의 편지사》

《조선족렬사전》(제1,2,3권 1987―1991년) 료녕민족출판사

《중국조선족력사연구》(1995년) 연변대학출판사

《조선족략사》(한문1992년) 길림성사회과학성과가작상,

《조선족략사》(조선문) 동3성조문출판물(조문) 1등상.

《조선족렬사전》(제1권,조문) 길림성사회과학성과 《우수상》

《조선족렬사전》 동3성조선문출판물 3등상

《로씨야연해주조선인》(2002년) 중국사회과학성과평의회에서1등상

사회직무:

북경대학 조선연구소 겸직연구원1990년

국제고려학회 리사1990년

한국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겸직위원1991년

한국사편찬위원회 해외 겸직연구위원1991년

한국력사문제연구소 자문위원 1992년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
  •    눈 오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민속 답사 길에 오른 리광평선생. 2020년 8월 길림성문화관광청에서는 성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전승인 60명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중 룡정시 리광평선생은 조선족 정월 대보름 전통민속놀이인 ‘지신밟기’와 ‘달집태우기’로 성급 무형문화유산전승인으로...
  • 2020-09-22
  • '이주 2세대' 이광평 씨의 '만주로 건너간 조선족들'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와중에 한반도에서 중국 만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 약 600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기록집이 일본에서 출간됐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이주 2세대인 이광평(74) 씨가 최근 이주 조선인들...
  • 2019-06-28
  • 독립기념관, 제14회 독립기념관 학술상에 ‘김춘선 교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저변 확대와 독립운동 역사인식 이해 기여   한국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광복 73주년 및 개관 31주년을 맞이해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와 역사학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김춘선 교수(중국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를 제14회 ...
  • 2018-08-13
  • 김성민씨가 수집해온 731부대 문물을 살펴보고 있다.(2015년)   (흑룡강신문=하얼빈) 박해연 기자=그는 중국 최초로 '731부대'유적지 보호 계획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초로 '731부대' 가해자의 진술을 법적인 공증으로 남길 것을 제안했고 이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초로 '731부...
  • 2016-05-03
  • 《대학은 얼마나 많은 고층빌딩을 갖고있는가에 따라 지명도가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대가를 갖고있는가에 의해 그 지명도가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창욱선생은 그야말로 전반 조선민족항일투쟁사의 대가로서 우리 연변대학의 보배요 모든 사학도의 사표라 하겠다.》   연변대학 전임 교장 박문일선생...
  • 2014-06-13
  • 연변해천국제여행사 총경리 노학수   (흑룡강신문=연변) 김명록지사장 = 연변해천국제여행사가 지난 3월 2일에 고고성을 울렸다. 전신은 연변해협국제여행사 하남분공사이다.   "백지장 한장의 두께와 같은 선택의 차이라도 결과는 판판 다르다. 일단 자기의 선택이 정확하다고 인정된다면 두말없이 밀고나가야 성공 한...
  • 2012-04-23
  •   샤타로 기록한 이민사, 렌즈에 담아 십여년   집단이주사 다큐멘터리사진작가 리광평선생 인터뷰   7개 현(시), 34개 향(진), 94개 마을… 500여명 이주민 취재 민족사에 가장 비참했던 강제 집단이주사… 왜 증발했나?   글 사진: 신철국 박군걸 기자 “리광평”. 초면에 스쳐...
  • 2012-04-2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