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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누구인가?’ 박웅규의 작품세계를 보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2일 10시15분    조회: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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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웅규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늦봄을 지나 초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베이징(北京)은 벚꽃이며 복숭아꽃 해당화가 어지러이 피었다지더니 금세 푸르른 녹색으로 물들었다. 순식간에 여름이 훌쩍 다가온 느낌이다.

올해는 박웅규 작가가 중국에 온지 11년째 되는 해이다. 체크무늬 티셔츠에 니트카디건, 단정하게 탄 가르마와 정성스레 다듬은 듯한 수염까지, 박 작가는 필자가 이전에 접해본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더 온화하고 깍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작업실은 베이징과 허베이(河北)의 경계 지점인 퉁저우(通州)구의 런좡(任莊)진에 있다. 도시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있고 쑹좡(宋莊)예술구와도 인접하여 창작활동을 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의 작업실은 외딴 정원에 있었다. 작은 정원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 건물이 한채있다. 건물의 바깥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작업실이 나온다. 널찍한 방 한칸을 독서공간, 창작공간, 집필공간으로 나누어 다소 어수선하면서도 질서가 잡힌듯 보였다. 2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은 그의 작품실 겸 보관실이다. 그가 중국에 온 이후 창작한 작품과 각지에서 습득하거나 구매한 도자기 파편들이 쌓여있다. 조각 하나하나에는 일련번호와 연대, 출처등이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이곳은 제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곳입니다. 파편을 하나씩 집을 때마다 그위에 소성된 무늬나 인물들이 실제 살아있는 것처럼 제게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같다고 할까요.”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한국예술가박웅규사진[인민화보 궈사사(郭莎莎) 기자]


그 시대의 뜨거운 이야기들
1988년 한국에서는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것이다. 당시는 모두가 마음속에 희망을 하나씩 품었고, 자아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박 작가가 대학 캠퍼스를 밟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70년 대한민국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며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되던 때였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교내 미술학부 동아리에 적극 참여하며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이 주장한 ‘신목각운동(新木刻運動)’, 즉 ‘대중을 위한 예술’을 접하게 됐다. 그 뒤로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집회에 쓰일 포스터나 만화를 그리며 시위대를 위한 정보전달 활동을 펼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학생운동에 참여한것은 어떤 명확한 동기가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닌 듯해요. 자아에 대한 인식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 때였죠.”

1994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박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왜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목표의식을 가진 그는 창작을 통해 자신이 주체가 되고 본체가 되는 작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의 많은 존경을 받던 성철스님이 입적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때 스님이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그는 오디즙을 이용해 성철스님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 과정에서 그 안에 새겨진 의미를 깊이 탐구했고, 불교 사상에도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의 모든 시도는 그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자아탐색을 하는 과정이었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창작 수단을 동원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지만, 속 시원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시기에 창작한 작품들은 거의 자아를 찾기 위한 반복적인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방법지외(方法之外), 대상(大象)아트스페이스, 타이베이. 타이완참여예술가와함께[사진=본인 제공]


물음의 해답을 찾아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속한 아시아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가 중국이라고 생각한 그는 중국에서 모든 것의 원천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중국에서 유학하며 수많은 유적지를 돌았다. 다퉁(大同), 타이위안(太原), 둔황(敦煌), 시안(西安), 뤄양(洛陽),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난징(南京), 선양(沈陽) 등지에서 막고굴, 후커우(壺口)폭포, 병마용을 눈에 담았다. 가는 곳마다 전율과 함께 불교나유교 사상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중국과 한국 간 문화적유사성과 차이도 발견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자아에 대한 인식에서도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의 미대 입시는 주로 인상파의 소묘 분할을 기준으로 삼지만, 중국은 고전주의 소묘 위주이다. 이 때문에 박 작가는 중국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적잖은 고생을 겪었다. 그는  2년 동안의 연수를 거쳐 중앙미술대학 유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중국에 와서 그림을 배우던 한국 유학생들 대부분은 전공으로 국화(國畫)를 선택했어요. 그럼에도 제가 유화를 배우기로 결심한 까닭은 유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그답을 예술로 표현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델을 대상으로 한 유화와 소묘 수업에서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예술과 기법을 배웠고, 야외 스케치 수업을 통해서는 인상파가 추구하던 예술과 핵심 기법을 배웠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중국을 여행하며 눈에 담았던 둔황석굴이나 한나라화상석(畫像石) 등의 문화 유적에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인생에 대한 사색을 투영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문화의 근원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유교에 대한 사상도 깊어졌다.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한가지 물음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계속 그 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자유를 완전히 잃은 것처럼 오로지 해답에만 사로잡히기 때문이죠.”  박 작가의 말이다.
 

박웅규예술가는중국옛미술잡지를수집하는취미가있다.[사진=인민화보 궈사사 기자 ]


중국 땅에 홀로 서서
졸업이 다가오자 같은 과 학생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냐 중국에 남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닥쳤다. 중국에 남아있자니 아는 사람도 없고, 이렇다 할 직업을 찾기도 어려웠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자신이 밤낮을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내키지가 않았다. 중국에 머문 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서남북 여기저기를 다녔기 때문에 이 땅이 마치 자신의 것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베이징에서 한국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결국 그는 중국땅에 홀로 남기로 결정했다. 

중국에 남기로 결정하고 나니, 이제는 생계문제를 해결할 취업자리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취업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어요. 전공으로 보나 외국인 신분으로 보나 딱 맞는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죠.” 하지만 그는 들뜬 표정으로 기자에게 말했다.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天無絕人之路)’는 말이 있잖아요. 하늘이 정말 무너진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때, 마침 한 친구가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왕징(望京)의 한 화실에서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소개해 줬어요.”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난 그는 수업이 없는 시간을 활용해 다시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 즈음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이 사람이 언제 나타날 것이라고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아내가 제 앞에 나타난 순간 ‘아, 이 사람이구나 ’싶었죠.” 박 작가는 그렇게 조선족 출신의 아내와 결혼했다. 아들은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다.
박 작가는 작업 틈틈이  ‘템페라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의 일부 습작품을 정리하면서 서양 미술과 관련된 기법이나 재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용적으로는 자아의 본성이 담긴 사상을 일상과 결합해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고전주의 기법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일련의 깨달음 덕분에 속박에서 벗어나자 심리적으로도 자유를 얻어 다음 창작을 좀 더 여유있게 진행할수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은 그의 시야를 한층 넓혀 주었다. 지금은 템페라화에서 유화와 아크릴화까지 섭렵하고있다. 인터넷으로 세계 여러 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보며 전에 들어보지 못한 다양한 재료들을 접했다.

그는 매일 작업전에 향을 한 개씩 피워두곤 한다. 마음의 안정과 ‘자신과의 대화’를 위해서다. “자신과의 대화는명상이자 사색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바른 자신을 깨닫고, 자신이 가야 할길을 명확히 아는 것이죠.”

예술을 통한 교류활동
수교 이래 중국과 한국은 예술 분야의 교류를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양국 예술계는 관련 인사들의 상호 방문이나 전시회 개최 등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있다. 박 작가는 여러 해 동안 양국 예술교류의  ‘친선대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중국대표처를 담당하고 있기도 한 그는 매년 연수차 전라남도 광주에서 오는 한국 작가들을 중국에서 맞이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양국의 현대 작가들을 초청해 함께 창작에 대해 토론하거나 야외 스케치를 나가는 등의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중국대표처는 그의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네 개의 공간 가운데 세 곳에는 한국 작가가, 한 곳에는 중국 작가가 입주해 있다.“처음에는 네 곳에 모두 한국 작가가 입주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러면 중국 작가들과 교류가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4개월 단위로 양국 작가들이 이웃해 살면서 더 많이 교류할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랜 중국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한국과 중국의 예술적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많다. “저는 주로 현대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예술은 중국에 비해 수년이 앞섰고 중간에 맥이 끊기지 않았어요. 중국은 시작은 늦었어도 몇 년 사이 굉장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양국간 차이를 거의 느낄 수가 없어요.”

일을 하다 보면 각종 행정적 잡무가 그의 창작시간을 빼앗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한국의 예술가로서 이미 이런 패턴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대신 그는 자신이 지도했던 학생들의 작품 수준이 높아지거나 고유의 색깔을 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는 작은 변화라도 한눈에 알아보며, 그런 변화를 발견할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박웅규예술가의<일념>시리즈대표작[사진=본인 제공]


‘일념’
그의  작업실 정면에는 멀리서 볼 때 붉은색으로 보이는 작품이 한 점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사용했던 향을 가지런히 배열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가 ‘일념’이라 부르는 시리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일념’은 향을 원 재료로 사용했다. 향에 색을 입히고 향을 마름질하거나, 태우거나, 붙이는 등 단순 작업을 반복해 작품을 만들었다.

향을 원 재료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사찰에서 향을 피우는 이유는 대부분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순간은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이죠. 이것은 자아와 대화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작품에 쓰인 향의 개수에 대해 묻자 “처음에는 개수를 셌는데,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답했다. 창작에 걸린 시간에 대해서는 “매일 쉬지 않고 작업해서 꼬박 6개월이 걸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작품이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이전에 작업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제게 많은 생각거리와 소득을 안겨줬습니다.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면서 내가 왜 그림을 배우는 것인지, 작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렇게까지 창조를 추구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반문했고, 그러면서 점점 제가 원하는 답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가 털어놓았다.

박 작가는 사람의 모든 행동이 다 하나의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러고 나서 다음 행동이 이어지는 것이다. “어렵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눠야 해요.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잊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거죠.”

그는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이면서도 수집광이기도 하다. 골동품 시장에서  ‘건진’중국 최초의 미술 잡지<미술>을 두근대는 마음으로 한 권 꺼내들어 출판년도를 확인했다. ‘1958년’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오래된 물건, 옛날레코드, 석유램프, 동(銅)나팔등을 발굴해 집안 구석구석에  ‘쟁여 놓곤 ’한다.

인터뷰 말미에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찾았는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지 물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찾는 중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작품을 통해 저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한 만큼, 저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인민화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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