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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을에 피어난 마지막 감자꽃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7월29일 23시36분    조회: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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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황상룡
 천불지산의 여덟 번째 이야기

5월의 마을에 피어난 마지막 감자꽃
 
  학교의 이름이자 마을의 이름이었다. 1920년경에 학교를 세웠는데, 원동(元東)학교라고 불렸다. 원동학교는 주변의 조선인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었다. 학교 동네는 종국적으로 원동마을이라고 불렸다.

  시초에 불린 마을의 이름은 원동이 아니었다. 토박이 황상룡(黃相龍, 1942년 출생)가 잔존한 어린 기억을 그렇게 떠올리고 있었다.




두만강의 남쪽에서 보는 천불지산, 칠도구는 천불자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한다.

 
  어릴 때 마을의 노인들은 그냥 칠도구(七道溝)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인들은) 골짜기의 여기저기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원동마을 즉 칠도구는 연길현(延吉縣, 훗날 용정현으로 개명하며 또 용정시로 승격.) 지신향(智新鄕) 소재지에서 거의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동네는 원동 골짜기의 부근에도 여럿이나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대(大隊, 촌) 마을인 서흥툰(西興屯)은 원동을 지난 골짜기의 안쪽에 있었다. 서흥툰 역시 원동처럼 광서(光緖, 1875~1908) 말년에 생긴 마을이다. 서쪽의 이 마을을 흥성하라는 의미에서 서흥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의 이름뿐이었다. 서흥툰은 인구가 흥성하지 못했다. 서흥툰은 촌의 중심부락으로 되었으나 18가구의 80명의 인구에 그쳤다고 1985년 편찬된 《용정현지명지(龍井縣地名志)》가 기록하고 있다. 원근에 이름난 마을인 원동에도 다 합쳐야 30가구, 130명의 인구에지나지 않았다. 칠도구의 동쪽 어구에 위치한 신동(新東)도 38가구, 140명의 인구였다. 참고로 이 신동도 근처의 원동처럼 조선인학교가 선 후 학교의 이름으로 마을이름을 지었다.

  황상룡은 20대의 열혈나이를 시작하던 1963년에 원동을 떠났다. 골짜기가 아니라 하늘이 탁 트인 넓은 벌에서 살고 싶었다. 원동이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에 남긴 것은 골짜기에 하얗게 피던 감자꽃이었다.
 
  감자꽃이 하얗게 피고
  산천어가 뛰노는 곳
  하늘아래 첫 동네가 나의 고향이라네
  고향아, 고향아 나의 고향아……
 
  노래 “나의 고향아”는 황상룡의 절절한 애정을 감자꽃처럼 하얗게 피우고 있었다. 황상룡은 독창곡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 급작스레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향이라는 이 이름을 떠올리자 금세 하얀 꽃이 머리를 꽉 채우더란다. 그 꽃으로 물든 시냇물에 산천어가 뛰놀고 있었다. 그가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음악편집으로 있었던 1989년 무렵의 이야기이다.
 


본인의 작품음악회 현장에 있는 황상룡.


  우리 마을의 산속에 무더기로 피어나는 게 감자꽃이었습니다. 산비탈은 온통 하얀 꽃이 만발했습니다. 골짜기를 타고 더 올라가는 겁니다. 산에는 노루가 뛰어다니고 물에는 산천어가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면 정말 다른 세상 같았습니다.
 
  연길 시내 동쪽의 어느 아파트에서 황상룡을 만났다. 황상룡은 그에게 노래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잠깐 오후 시간으로 미루고 우리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의 가운데에는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이 자주 반주처럼 끼어들고 있었다.

  퇴직한 얼마 후 황상룡은 용정 지신향의 어느 마을에 들린 적 있었다. 오씨(吳氏) 성의 의사를 만났다가 왕진(往診)을 떠나는 그를 따라 내친 김에 고향에 잠깐 들린 것이다. 그날 마을 노인협회의 사람들은 한창 흥겨운 가락을 뽑고 있었다. 와중에 그들은 노래 “나의 고향아”를 노래판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황상룡은 저도 몰래 눈물이 자꾸 흐르더라고 한다. 흥겨운 노래인데 왜서 슬픈지 몰랐다. 단지 고향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고 부르고 있다고 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고향과 민족 정서의 원형이 담긴 옛날 옛적의 노래가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자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산에 들어서고 마을에 도착하면 금방 색깔이 달랐다. 고향의 추억은 산과 밭에 피어난 풀과 꽃으로 푸르고 하얗다. 감자꽃이 피어날 때면 감자는 열심히 뿌리에 열매를 만든다. 감자알이 차츰 굵어지고 주먹만큼 커진다. 산비탈의 흙길에는 감자를 산더미처럼 실은 수레가 나타난다.


  드디어 삶고 찌고 구운 감자가 밥상에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입김으로 손을 후후 불며 껍질을 벗기던 감자, 하얀 속살에 소금 알을 뿌리면 온 세상이 금방 단맛으로 입속에 막 녹아들 듯 했다. 감자로 또 수제비를 만들었고 국수를 만들었다.

  원동 마을에서 감자는 주식이었고 또 군음식이었다. 원동 마을에서 감자는 먹고 사는 생활의 전부로 되고 있었다.
  언제인가부터 골짜기의 흙길에 자동차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원동 골짜기의 감자국수가 산밖에 소문을 놓게 된 것. 산밖의 사람들은 다들 그 감자국수를 원동국수라고 불렀다. 연변의 초대 주장 주덕해(朱德海, 1911~1972)는 외지 손님을 접대할 때면 특식 1번으로 원동의 감자국수를 지목했다고 한다. 원동의 나들이가 불편한 탓으로 원동의 감자국수는 늘 고개를 넘어 이웃의 용신(勇新) 마을의 음식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감자국수는 원동 마을의 자랑이었다. 수레가 다니던 길에 자동차가 달리면서 하늘에 먼지를 뽀얗게 날렸다. 그래도 자동차의 뒤로 조무래기들이 졸졸 뒤따랐다. 다리 아닌 바퀴가 돌고 풀이 아닌 기름을 먹는 차가 신기했다. 산길이 너무 험해서 차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혹간떨어지는 감자국수를 줍느라고 조무래기들은 몇 리 길을 발로 뒤쫓기도 했다. 와중에 감자국수를 두둑이 줍는 애들도 있었다. 삶은 감자나 찐 감자로 배를 채우던 그 시절에는 감자국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호재였다.
 
  벼는 산기슭에 겨우 몇 뙈기 심었을 따름이었습니다. 골짜기에는 물을 댈만한 논이 얼마 없었습니다. 이밥은 어쩌다 명절 때 맛보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평소에 어쩌다가 밥이라는 게 있었다면… 모래알처럼 부슬부슬한 조밥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시골 마을에 사는 재미가 따로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늘 시냇물에 발을 잠기고 고기잡이를 했다. ‘세치네(細川魚, 세천어의 변음)’는 크지 않았지만 청정한 물에서 자라면서 맛이 유달랐다. 시냇물에서 고기를 잡아 밸을 따고 나눠서 함께 집으로 가져갔다. 원동의 30가구는 서로 형제이고 친척이었으며 사둔이었다. 황씨, 허씨, 이씨 등 몇몇 성씨뿐이었다. 어느 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는지 서로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황상룡이 회억했다.
 
  저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장단을 잘 치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잔치 때 보면 작은 밥상을 공중에 휘익 하니 뿌리고 그걸 떨어뜨리면서 장단을 치는 데요… 동네 사람들의 혼을 쑥 뽑았습니다. 이때 노래를 장단과 함께 불렀는데요, 지금 보면 표현 독창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번 불러도 모를 심거나 김을 맬 때 부르는 ‘농부가’ 하나 밖에 몰랐습니다.

  농부 일생 무한이로다, 춘경추수 연연(年年)이로다. 어럴럴 상사디여…



예술인들과 함께 있는 황상룡(가운데). 

  시골의 마을에 감자꽃 하나가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 감자꽃은 자식들에게 알게 모르게 하얀 꽃을 심어주고 있었다. 나중에 아들 황상룡은 가수 겸 작곡가로 되는 것이다. 황상룡은 노랫가락이나 말투를 들어서는 아버지의 고향이 강 바로 저쪽의 함경북도 어느 곳인 것같다고 추정을 했다. 아쉽게도 아버지는 험한 시골에서 세상을 어렵게 지내면서 황씨의 족보 하나 바로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집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공화국이 창립 1949년 무렵 황씨 가족은 이주를 했다. 정부는 연변 여러 지역에서 농사꾼들을 모집하여 용정 북쪽의 돈화(敦化)에 이주민을 보내고 있었다.
 
  관원이 우리 마을에 와서도 이민 동원을 했는데요, 다섯째 삼촌 가족과 함께 두 가구가 떠났습니다. 우리 집은 닭도 많고 방앗간도 있었는데요.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해서 겨울인데도 무작정 이사를 작정한 겁니다. 그곳은 땅이 형편없이(아주) 기름졌습니다. 달래가 마늘처럼컸어요. 소가 수레를 끄는 게 아니었습니다. 개들이 썰매를 끌고 있었습니다.
 
  돈화 시내의 북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액목(額穆)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액목은 만족말로 물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산이 높고 강이 컸다. 산이 높아서 눈이 녹지 않는 노야령(老爺嶺)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강이 커서 배가 다니는 주일다하(珠爾多河, 만족말로 앞쪽의 강이라는 의미)가 길을 막고 있었다.
  풀과 나무로 대충 막을 들에 세우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봄이 되니 시퍼런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들었다. 황상룡의 말을 따른다면 역사교과서에서 겨우 읽었던 원시사회가 따로 없었다. 그건 약과였다. ‘물갈이 병’이라고 하는 수토병(水土病)이 이주민에게 찾아왔다. 삼촌은 마치 뱀에게 물린 것처럼 목이 팅팅 부어났다. 이듬해 삼촌이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고 뒤미처 아버지도 이삿짐을 다시 꾸렸다.

  그러나 집을 처분한 원동은 당장 돌아갈 수 없었다. 황씨 가족은 용정 현성에 살고 있는 친척집에 곁방을 얻어 더부살이를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눈썹에 불이 붙은 일이 있었다. 아들 황상룡을 학교로 보내는 것이었다. 황상룡은 벌써 고만고만한 아홉 살의 나이를 먹고 있었다.

  황상룡이 입학한 3.1학교는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옛터에 세운 학교였다. 서전서숙은 조선인에 의해 1906년 설립,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근대적인 학교이다. 폐교된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간도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또 여러 번의 교명을 거쳐 광복 직후 3.1학교로 되었고종국적으로 현재의 용정시 실험소학교로 되었다.
  그때 3.1학교는 입학 지망자들에게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관은 먼저 지망자에게 나무개비 20개를 내놓고 나무개비가 도합 몇 개인지 셈을 세라고 했다. 1년 후 학교 노래 합창단을 선정하기 위한 시험은 이와는 또 다른 형식이었다.
 
  학교 3천명의 학생 가운데서 합창대를 뽑는데요, 1차적으로 5명을 강당에 불러 앉혔습니다. 각기 노래 한마디씩 시키고 부르게 했습니다. ‘나도 나도 나가련다, 총대를 잡고 나가련다.’ 이 노래 한마디를 들으면서 성대의 좋고 나쁨을 보고 박자를 맞추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음이 구전한지를 보았습니다.
 
  황상룡은 정말로 총대를 잡고 나가게 되었다. 나중에 학생 1백 명이 학교 합창단에 선정되었다. 그런데 노래가 그의 천성이었다면 운명은 도리어 그와 엇박자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합창단 단원이 되었지만 합창무대에 한 번도 오를 수 없었다.

  마침 아버지는 용정현 정부의 물 관리국에 배치를 받았다. 감자꽃처럼 정처 없이 흩날리던 생활은 드디어 안착이 될 듯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용정 현성을 떠나 기어이 원동으로 귀향을 했던 것이다. 정부의 관리국이라서 측량과 계산 등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손과발 셈으로 얼추 헤아리고 살던 농부는 골치를 때리는 일이었다. 그해 아버지는 원동에 드나들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감자농사가 마대(麻袋)로 30개나 되었다고 한다. 머리 고생을 할 필요가 없이 배를 불릴 수 있는 원동의 생활이 지극히 그리웠다. 결국 황상룡은 아버지를 따라다시 원동에 돌아갔고 불알친구들과 함께 원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시골의 도톨도톨한 감자는 다시 초가의 화로에 나타났다.
 
  자랑 같지만요, 저는 그때 공부를 정말 잘 했습니다. 반급의 대대장까지 했어요. 글을 잘 짓는다고 벽보도 만들었습니다. 노래를 잘 불러서 음악학과 성적이 특별히 좋았습니다. 나중에 졸업반 16명 가운데서 홀로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떤 더벅머리 친구는 소학교를8년이나 다녔지만 끝내 졸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지신중학교는 중점학급을 만들면서 다만 50명의 학생을 선정하고 있었다. 지신현의 3개 향에서 결과적으로 55명만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정말로 지신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그해만은 과거에 급제하는 격이었다.
  얘기를 두서없이 이것저것 다 적는 것 같다. 실은 소설이 아니라서 앞뒤가 그 무슨 영화 스토리처럼 쭉 이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거듭 말씀드리고 싶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황상룡은 소설을 특별히 즐겼다고 한다. 소설은 또 다른 세상이었고 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세상이었다. 초중을 다닐 때 황상룡은 소설에 미치다보니 학교에도 잘 등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한 형은 학교에서 이름난 소설 귀신이었습니다. 소설을 무척 즐겼습니다. 조선말로 된 소설책이라면 뭐나 다 사들었지요. 소설책 부자였습니다. 형의 책은 빌릴 수 있었지만, 제 시간에 발리 돌려주지 않으면 다시는 빌릴 수 없었어요. 그 책을 다그쳐 보다나니 미처 학교에 갈 새가 없었습니다.
  그때 소설책을 20여권을 읽었는데요. 작문을 쓴다하면 제가 쓴 글은 언제나 모범 작문이 되었습니다. 학교의 명실상부한 소설가로 된 거지요.
 
  뒷이야기이지만, 그때 그 시절에도 작사와 작곡을 다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치곤 예술기량과 문학수준을 모두 구비한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다. 어릴 때 목마르게 읽은 소설은 황상룡의 문학수양을 쌓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로 되었다.

  소설만 만난 게 아니었다. 이태수라고 부르는 음악교원을 만났다. 이태수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린 셈이었다. 덕분에 황성룡은 글자가 아닌 음부(音符)로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첫날에 이태수 선생님이 손풍금을 들고 교실에 들어오는데요. 정말 멋있게 생겼고 부러웠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저렇게 멋지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본악리를 배워줬습니다. 콩나물 같은 게 오선보라는 걸 그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도 함께 배워줬는데요, 그때 구도(構圖)라는 걸 처음 배웠습니다.
 
  기실 구도에 그림에 있고 노래에도 있다. 알고 보면 아버지가 즐기는 장단에도 구도가 있었다. 아들이 그리는 밑그림의 구도(構圖)에는 일찍부터 아버지가 꿈꾸는 미래의 구도(求道)가 배어 있었다. 아들이 늘 집 생각을 한다고 해서 아버지는 원동 시골에서 지신 소재지에 이사했고 미구에 용정 시내의 예술학교에 다니자 또 미련 없이 지신에서 살던 집을 팔았다. 지신의 집은 단돈 50원에 팔렸는데, 거기에서 18원 10전을 내어 아들이 오매에도 그리는 바이올린을 샀다. 아버지는 날마다 땔나무를 하기 위해 새벽에 산으로 오르고 발구로 시내의 장마당까지 나르면서 밤중에야 집에 돌아왔다. 주머니에 꼬깃꼬깃한 지전을 한데 모아서 아들이 예술학교를 다니는 비용을 대줬다.

  “마음에 새장을 갖고 있으면 언제인가는 그 안에 담을 그 새를 갖게 된다.” 정말이지 그 새가 무슨 새일지를 몰랐다. 황상룡은 어릴 때부터 즐기는 ‘새’가 있었지만 그게 꼭 새장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새’는 시골의 그에게 너무나도 먼 하늘에 날고 있었다. 그런데 보일 듯 말 듯 하던 ‘새’가 금방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5월이라 시와 때가 되니 산에는 감자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있는 듯 했다.
 
  고중 입시를 앞두고 용정에 예술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민간에서 경영하는 학교라고 했습니다. 귀가 솔깃했습니다. 예술이라니 그 무슨 문학인줄 알았습니다. 부랴부랴 찾아갔더니 노래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시 낭송을 할 줄로 알았더니… 한곡 불렀더니이불 짐이랑 챙겨서 오라고 해요.
 
  민영 예술학교는 지금의 용정시 제2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이 예술학교는 실은 종합적인 음악학교였다. 입학한 학생들은 황상룡 등 두셋을 제외하고 나이가 적지 않았다. 와중에는 장가를 간 나그네도 있었다. 나중에 발견한 일이지만, 그들은 저마다 남다른 재간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는 악기에 능했고 또 누군가는 춤을 잘 추고 있었다. 그들은 흡사 음악에 신들린 것 같았다.

  황상룡은 성악반의 3명의 한명으로 입학했다. 처음으로 음악학교를 만들면서 아직 성악 교원이 없었다. 성악은 배울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시창, 청음, 악리를 배울 수 있었다. 음악이라는 게 뭔지 눈을 다소 뜰 수 있었다.

  이씨 성의 가수가 학교에 찾아왔다. 연변가무단의 유명한 가수였다. 여태껏 성악 공부를 하는 사람들치곤 하늘처럼 숭배하던 가수이었다. 황상룡은 미친 사람처럼 이씨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씨에게 노래를 시연하자 이씨는 참 잘 부른다고 황씨를 연거푸 칭찬했다. 연길에 오게 되면 이씨를 찾으라고 했다. 그를 찾으면 황씨에게 금방 가수 자리라도 하나 구해 줄 듯 했다.
 
  알고 보면 열성 팬에게 말치레로 건넨 인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분 하면 그때는 구절구절 성지(聖旨)처럼 믿고 받들고 있었지요. 고지식한 저는 그분의 그 무슨 승낙처럼 듣고 가슴에 새겨 넣었습니다.
 
  며칠 후 예술학교 학생들은 시골마을로 노동단련을 내려갔다. 황상룡은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대고 휴가를 냈다. 학생들이 떠나기 바삐 그는 산 너머 연길에 천방지축 달려갔다. 그러나 이씨는 벌써 황상룡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를 겨우 기억에서 더듬어내자 마치바지에 달라붙는 도깨비 풀을 만난 듯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부근의 연변예술학교에서 마침 음악 수험생을 받고 있다면서 황상룡을 거기로 쫓다시피 밀어 보냈다.

  연변예술학교에서는 벌써 2차 음악 시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황상룡은 시험장에 들어설 자격마저 없었다. 정식시험도 경유하지 않았고 아무런 추천도 없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미처 연길로 가기 위해 거짓으로 병 청탁을 했던 사실이 발견되었다. 황상룡은그 이튿날로 예술학교의 퇴학 처분을 받았다.
  정말이지 꽃잎이 떨어진 감자는 한동안 잎이 시들고 있는 듯 했다.
 
  마을에서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했습니다. 이때 연변예술학교는 3년 동안 더 모집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뉘 감자농사를 하면서 세월을 지내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어느 날 대대판공실(辦公室, 사무위원회)에 들렸다가 신문을 읽었는데요, 예술학교 학생모집광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시골의 산골짜기에 이번에는 토실토실한 감자가 나타날 듯 했다. 황상룡은 다짜고짜 연길행을 단행했다. 22살이 되던 1963년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는 공부와 담을 쌓을 것 같았다. 3년 만의 학생모집이라서 연길에는 응시생들이 구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연길이나용정뿐만 아니었다. 동북 3성에서 응시생들이 모여왔다. 어언 5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황성룡은 그의 시험 번호를 어제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267번이었다.
  시험관은 사전 준비가 없이 한 사람씩 시험실에 불러들이고 있었다.
 
  시험관은 무슨 노래를 부르겠냐 하고 물어왔습니다. 노래를 즐겼고 노래를 입에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노래를 부르는 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또 어릴 때부터 샘물처럼 청아하기로 소문난 목소리였고요. 노래를 시작하니 반주를 하고 있던 시험관이 대뜸 저쪽 시험관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더군요. 1차 시험을 잘 통과하니 2차는 대충 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3차까지 시험을 보았습니다.
 
  3차 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39명이 입학, 와중에 성악반에 10명이 입학했다. 그런데 발성법을 배우는데 문턱이 생겼다. ‘수정주의(修正主義)’를 반대한다면서 서양의 악기, 춤과 창법이라면 무조건 배척했다. 남도 민요며 판소리, 타령을 배우게 했다. 빈하중농(貧下中農)의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면서 우사칸(牛舍, 외양간)에 들어갔다. 시골 할아버지가 와서 퉁소를 배워줬고 옛 기생이 와서 타령을 읊조렸다.
  그때 만났던 교원 신옥화는 예쁘고 예절이 있던 여인으로 기억에 남았고 교원 박정렬은 감동객(방언,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그들이 음악의 귀재라고 해도 서양의 악기와 노래를 배우려 했던 지망생들에게는 땅 밑에서 솟아난 귀신과 같았다.
  결국 예술학교에서 노래를 시작했지만 황상룡은 창법은 잘 배우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노래를 너무 즐겼다. 학교에서 종일 노래를 훈련하느라고 목을 백여 번은 상했다. 한 달이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 노래 열정은 졸업을 해서 연변가무단 성악배우로 된 후에도 조금도 식지 않았다.

  마침내 천불(天佛)이 나타난 산처럼 하늘의 노래로 열리는 것 같았다. 황상룡의 노래가 드디어 전파에 떴다. 천부적으로 목소리가 좋은 그의 노래는 금방 방송으로 인기를 탔다. 나중에 30수 정도의 노래를 불러 방송에 올릴 수 있었다. 이 가운데서 황상룡이 즐기는 노래는 “사랑아, 어찌 늙으랴”였다. 가수로 이 노래를 불러 이름을 날렸지만 기어이 이 노래를 자랑하는 원인이 있었다. 이 노래가 늙지 않는 그의 음악 사랑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작을 끝낸 후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황상룡.

  생애의 첫 작곡은 38살 때 역에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치 서서히 역을 떠난 기차처럼 줄기차게 작곡 작품이 쏟아졌다.
 
  피아노를 치지 않는데도 도레미쏘가 그냥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노래를 너무 즐기다 보니 아직 곡을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작곡은 누가 배워주거나 시켜준 건 아닙니다.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가락을 음부(音符)로 적고 싶었습니다.
 
  그날 신문을 읽으면서 발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가사가 눈에 띄었다. “당의 빛발을 안고 삽니다”라는 가사였다. 그때 그 시절 글에는 빈말이 많았다. 더구나 찬송하는 식의 노래는 거개 딱딱하고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가사는 내용이 있었고 재미있게 엮어졌으며 구도가 좋았다. 금방 곡이 떠올랐다. 가사 위에 음부를 적었다. 기이하게도 가사 글자 숫자와 딱 맞아떨어졌다. 기차고 뭐고 그냥 연변가무단에 달려갔다. 연변가무단은 그가 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 다닌 곳이다. 참 듣기 좋은 노래구려. 정말 당신이 썼소? 다들 찬탄을 했다. 소문을 듣고 나서 동창 송씨가 대뜸 이 노래를 가졌다. 송씨는 그 무렵 제일 잘 나가던 최고의 가수였다. 좋은 노래라면 그가 1번으로 선택하고 있었다. 노래는 1980년 연변 음력설야회에 등장했다. 금방 인기곡으로 소문을 놓았다. 뒤미처 중앙방송에도 실렸다. 이름 세 글자가 노래와 함께 전파를 탔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황상룡은 무대생활을 계속하면서 늘 작곡을 했으며 작사, 작곡을 함께 하기도 했다. 작품은 음악 간행물에 입선되고 방송에 채용되었다. 황상룡의 작품은 하나둘씩 숫자가 늘고 있었다. 드디어 황상룡은 가수라는 이름보다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직업은노래를 부르는 가수인데 결과적으로 노래를 만드는 작곡가로 변신한 것이다.

  1985년, 황상룡은 연길시방송국 음악편집으로 전근했고 뒤미처 1987년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으로 되었다. 황상룡의 종합적인 음악재능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방송프로그램 제작을 하면서 또 “대중음악무대”, “라디오노래방”을 신설, 많은 신인가수를 발굴하고 육성했다. 이중 일부 가수는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황상룡이 부른 노래 “연길의 밤이여”, “조국과 고향은 하나라네”, “손자사랑, 손녀사랑” 등도 가수로서의 재능을 인증 받았다. 음악창작에도 확실한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장백의 폭포수야”, “사랑의 옛집”, “인생살이” 등 작품은 음악팬들과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2000년 황상룡은 음반을 내던 그 무렵까지 황상룡은 수백수의 애창곡을 작사, 작곡했다. 그의 70돐 생일을 계기로 2012년에 가진 기념음악회, 2015년에 연변텔레비젼 방송홀에서 열린 개인가요작품음악회는 그의 음악일생의 최고의 작품이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황상룡은 노래의 그 언덕길에 오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요 “어머니의 눈물”로 국가상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구나 노래의 세상에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황상룡은 지금도 잠만 깨면 피아노의 앞에 앉고 노래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부터 그와 같은 사람을 위해 노래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학생이 선후로 30여명 된다고 한다. 어린이나 젊은이는 물론노인들이 성악을 배우는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옛날에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배울 시간이 없었다면서 여기저기 교원을 찾아다닌단다. 이날 작가의 인터뷰 때문에 오전의 노래 수업을 오후로 미룬 학생들은 바로 50, 60대의 그런 노인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함께 인생을 살아온 세상을 노래로 부르고 노래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니 연변의 노래방에서 날마다 남녀노소 다 부른 노래가 있었다. 열광을 떠나 발광적이다시피 불렀다. 그때 모두 다 그 노래에 미친 것 같았다. 2000년 무렵 연변에 있은 진실한 이야기이다. 노래 제목은 “모두 다 갔다”였다.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한 주인이 바로 황상룡이었다.
 
  그때 외국 나들이가 연변을 들썽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만나지 못하면 한국이나 러시아에 갔다고 했습니다. 열에 한둘은 외국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거개 돈을 벌겠다고 외국에 불법체류를 했습니다. 기차를 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를 알고 아들과 며느리를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못살 때를 만났다고 이렇게 가는가, 인제 가면 우리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기차역은 온통 눈물 바다였지요.


가수인 황상룡은 또 작곡가이며 작사도 한다.
 
  그 즈음 연변에서는 외국 나들이의 정경을 노래 “타향의 봄”, “타향의 달밤”, “타향의 여름”이 나왔다. 피눈물이 어린 이 노래는 대뜸 인기곡으로 부상했다. 이국타향의 러시아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연변의 사람들은 함께 모이면 이 노래를 불렀고 술을 마시면 이 슾른 노래를 불렀다.
  그때 그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황상룡은 직설적이고 또 흥겨운 절주에 담고 있었다.
 
아내도 갔다 남편도 갔다/삼촌도 갔다 모두 다 갔다
한국에 갔다 일본에 갔다/미국에 갔다 러시아에 갔다
잘 살아보겠다고 모두 다 갔다/눈물로 헤어져서 모두 다 갔다
산다는 게 뭐길래 산산이 부서져/그리움에 지쳐가며 살아야 하나
오붓하게 모여서 살 날 언제면 올까/손꼽아 기다려 본다네.
 
  에피소드가 있다. 노래 “모두 다 갔다”가 널리 불리면서 일파만파 곡절을 겪었다. 어느 관원인가 이런 노래도 전파를 탈 수 있냐 하고 힐문하면서 한동안 연변의 방송에서 ‘금지곡’으로 되었다. 또 노래는 흥겨운 가락으로 이어지는데, 그토록 슬픈 이야기를 하필이면 흥겹게불러야 하는가 하면서 반감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았다.
  기실 우리민족은 비극의 극치를 늘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기뻐도 노래를 부르고 슬퍼도 노래를 불렀다. 흥겨운 그 가락은 부를수록 마음에 숨긴 그 슬픔을 한결 아프게 긁어 올린다. 노래 “모두 다 갔다”가 더구나 대중에 널리 전해진 원인이 아닐지 한다.
 
  극은 서로 통한다는데요, 우리는 도대체 한(恨)의 민족일까요, 아니면 흥(興)의 민족일까요?
 
  아무튼 감자꽃 마을에는 더는 한과 흥을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감자꽃을 만날 사람들이 없었다. 칠도구의 골짜기에 있던 원동 마을은 벌써 해체된 지 오래다. 부근 골짜기의 마을도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족들은 외국 나들이가 생기면서 나왔고 한족들도 임장(林場)이 서면서모두 골짜기 밖의 벌로 이사했다. 고향의 그 마을에 하얗게 피어나던 감자꽃이 새삼 그립다면서 황상룡은 또 노래처럼 감자꽃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감자꽃은 사람이 살아도 피어나고 사람이 가버려도 피어난다. 아, 해마다 5월이면 감자꽃이 다시 산골짜기의 옛 마을에 피어날까.*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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