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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성공을 부른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27일 12시50분    조회:3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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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록송

중국 초고속원심분리기 창시자 김록송 연구원을 적는다

 

 

중국 원심기 분야의 제1인자 김록송연구원 /리옥화 찍음


해마다 소집되는 북경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년차회의 때면 단정한 외모에 엄숙하면서도 유머가 섞인 언어로 재치 있게 사회를 보는 김록송 연구원(1940년생)을 볼 수 있다.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에서 초고속원심분리기 연구에 근 40년간 투신한 김록송 연구원은 끈질긴 노력과 끝없는 탐구 정신으로 중국 원심기산업을 일떠세운 우리 민족의 걸출한 과학자이며 중국 초고속원심분리기 창시자이다. 담배도, 술도 배우지 않았고 친구도 별로 사귀지 않고 오직 과학연구에만 집념해온 그는 세속적인 시각으로는 어딘가‘고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자는 고독을 즐겨야 하고 고독 또한 성공을 부르는 것이 아닐가.

가난이 그를 우수생으로 만들었다

1958년 장춘광학정밀기계학원(지금의 장춘리공대학)에 입학한 김록송은 남들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신 학습성적은 가장 우수했다. 그는 여름 내내 와이샤쯔 한견지로 보냈으며 날씨가 추워지자 동창한테서 내복을 빌어입다가 신입생 160명중 빈곤학생 3명에게 내주는 솜옷을 입고 장춘의 추운 겨울을 무난히 지냈다.

매일 책 속에 파묻히다 보니 시력이 날로 내려가 교실 제일 앞줄에 앉았지만 흑판에 적힌 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근시안경을 맞추라고 그에게 보조비 5원을 내주었다. 화창한 5월이라고 기억된다고 김연구원은 말한다. 그 날 근시안경을 찾아 착용하니 세상이 그처럼 밝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안경가게에서 학교까지 뻐스비가 7전이였는데 그는 뻐스비를 아끼려고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걷다가 너무 지쳐서 뻐스에 올랐다. 그런데 바로 다음역이 학교였다. 뻐스비 5전이 얼마나 아까왔는지 몰랐다고 했다. 대학공부를 하는 동안 교실과 도서관만 다니고 캠퍼스 밖은 거의 나가지 않고 공부한 그는 분명 길맹이였다.

그 때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첫 학기 두개 과목이 모두 만점 5점을 맞았던 일, 그리고 첫 방학에 장춘에서 연길까지 차비 4.01원이 없어서 집에 가지 못했던 일이란다.

대학에서 맞는 첫 방학이였다. 다른 친구들은 집에 돌아가 식구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낼 때 그는 매일 학교 도서관에 붙어있었다. 그 때 그는 텔레비죤 원리를 발명한 독일의 한 가난한 학생의 사적을 읽었다. 그 대학생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 차비가 없어 집에 못 가고 쓸쓸한 숙소에 남게 된 그 가난한 대학생은 무심코 창문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면서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였으며 거기서 계발을 받고 텔레비죤의 원리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19세기말 가난한 발명가 대학생의 이야기를 읽고 난 김록송은 온몸에 힘이 솟구쳤다. 그는 방학 동안 고등수학 교과서와 련습책을 빌려와 두 학기에 배울 내용을 전부 독학으로 배워냈다. 건강이 없으면 공부도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저녁이면 자주 탁구를 쳤다. 그때 배운 탁구가 후날 그의 유일한 취미로 되였다.

방학기간에 독학으로 고등수학을 잘 배운 덕분에 5년 동안 여러 과목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공과대학에서 고등수학을 잘 배우면 기타 여러 과목은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5년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최우수생으로 북경 중관촌에 위치한 중국과학원 북경생물학실험중심에 배치받았다. 그 때 함께 중국과학원에 입사한 사람중 청화대학, 서안교통대학, 할빈리공대학 등 명문대학의 졸업생들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 돌연습격으로 기계전공을 배운 졸업생 도합 76명이 참가한 시험을 치렀다. 고등수학, 기계공학, 로어 세 과목의 시험이였는데 김록송은 단연 총점수와 고등수학 1등을 하였다. 그는 독학으로 배운 주도적인 지식 습득이 효력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수십년간 설명절을 실험실에서 보내다

원심기는 19세기 유럽에서 처음 발명한 것이며 김록송이 대학을 마치고 원심분리기 연구에 종사할 때 중국에서 이 분야의 연구는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원심분리기는 생물학, 의학, 석유공업 등 분야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바 성분이나 비중이 다른 물질을 분리, 정제, 농축하는 데 쓰이는 정밀계기이다. 분당 3만 회전급 이상을 초고속원심분리기라고 하는데 우라늄 분리가 가능하다. 오늘날 인류는 우라늄의 핵분렬을 리용하여 원자력 발전을 일으키기도 하고 선박, 잠수함 등의 연료로도 사용한다. 김록송연구원의 연구 분야는 생물학에서 사용되는 원심분리기지만 이쯤이면 그의 연구가 사뭇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도문연구팀 성원 3인 /자료사진

 

금방 대학을 졸업한 김록송은 다른 동료와 함께 둘이서 1964년 4월부터 1965년 8월까지 밤낮을 이어가며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중국 최초의 분당 만 3천 회전 고속원심기 시제작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4청운동에 이어 문화대혁명, 5.7간부학교 하방 등 사건으로 그의 과학연구는중도에서 멈추지 않으면 안되였다. 1972년 그가 다시 원 단위에 돌아왔을 때는 원래의 생물학실험중심은 생물물리연구소에 합병되였고 원심분리기 연구과제를 맡겨주었던 전문가도 다른 연구소에 전근된 상태였다. 그는 다른 연구 분야의 연구실에 배치되였다. 리유라면 미국에서 돌아온 전문가도 못해내는 초고속원심기 연구를 중단한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 공부라도 열심히 하는 것이‘내가 살 길이다'고 생각하고 육체로동으로 몹시 지친 몸이지만 밤마다 외국의 원심분리기 연구에 관한 서적을 보면서 연구를 다시 시작할 것을 구상해오던 그였다. 당시 정치운동의 영향으로 중국내 수입제 원심기는 대부분 고장이 생겨 못쓰는 형편이였기에 수리실에는 고장난 원심기가 적지 않게 들어와있었다. 그는 연구실을 떠나 자진하여 수리조에 갈 것을 신청하였다. 수리조에서 원심분리기를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 더 감성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제 원심기를 수리하기 위해 초고속원심기 실험장치를 제작하는데 지도부의 동의를 받았고 김록송의 어깨에는 초고속원심분리기 제작 임무가 맡겨졌다. 그를 팀장으로 한 수리조의 인원들은 악전고투하여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분당 6만회전의 초고속원심분리기 실험장치에 성공하였다. 때는 1974년, 그의 나이 34세 밖에 안되였다. 이는 전국적으로 최초의 연구로서 그의 연구팀은 중국과학원 선진집단, 중국과학원 중대성과상, 전국과학대회상 등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의 연구팀은 전문 원심분리기를 연구하는 제4연구실 403연구조로 명명되였다.

1978년 과학의 봄이 찾아왔다. 중국과학원에서는 초고속원심기 연구를 크게 중시하고 지지해주었다. 그 시기 일본의 원심분리기 연구는 우리 나라보다 20년 앞섰다. 김록송은 전에 배워두었던 일본어 실력으로 참고서적, 참고론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미국, 유럽 등 지역의 서적을 참고하기 위해 영어공부 시간표를 짜놓고 매일 2시간씩 꼬박 5년사이에 대학교 교재를 다 배워냈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원심분리기 분야의 첫 일본어 통역, 첫 영어 통역으로 되였다. 연구가 심입될수록 공부 욕심이 더 생겼다. 독일의 기계학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니 독일어로 된 문헌이나 참고자료를 보고 싶어 영어공부와 더불어 독일어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 서점이나 도서관에는 독일어 학습자료가 극히 부족했다. 그는 헌책방에서 일본어로 독일어를 해석한 책을 겨우 사서 독일어 문법을 배웠다.

기회는 준비 있는 자의 몫이다. 1980년 김록송에게는 서독 유럽분자생물학연구쎈터에 2년간 방문학자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 때 연구쎈터 일군들은 서투른 독일어지만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김록송연구원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은 주말이면 맥주클럽으로 가군 했는데 자주 그를 불렀다. 독일 맥주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지만 그는 한번도 마시러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서독의 학자와 함께 자체흡입련속류동원심법 원리라는 새 리론을 내놓았다. 이로써 세계적으로 새로운 원심기 원리가 또 하나 제기되였고 이와 더불어 새로운 원심기 견본이 만들어졌다.

200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김록송은 수십년 동안 설명절을 한번도 집에서 쇤 적이 없이 전부 연구실에서 보냈다. 그는 조용한 시간을 리용하여 연구실에 나가 실험하고 외국문헌을 찾아보고 외국어를 공부하였다.

고향의 발전을 항상 념두에 두다

1979년도 김록송은 중국과학원과 연구소의 동의하에 고향인 길림성 도문시에 가서 당지 기업과 합작하여 초고속원심기 회전자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실험에 들어갔다. 실험은 분당 6만 회전에 쓸 수 있는 회전자를 분당 8만 회전 이상의 속도에서 돌릴 수 있는 초고속원심기 부품의 안전회전 수치를 얻는 것이였다. 그의 연구팀은 3개월간 53차의 실험을 거쳐 1979년 11월, 분당 8만 회전 초고속원심기 회전자 안전수치 확보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뒤를 이어 성공한 과학성과로서 중국의 초고속원심기 설계와 제작 기술이 세계 선진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이 때로부터 기업용 국산 원심기가 사용중 폭발하는 악성 사고가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1990년말 김록송은 도문과 합작하여 또 분당 9만 회전 초고속원심기 회전자의 안전수치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였다.

도문에서의 연구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프로젝트로 되여 99만원의 연구비를 조달받았으며 후에는 130만딸라의 제조기술 인입 비용을 받았다. 이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주동적으로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전국 대형 과학기기의 수입을 총괄하고 비준하는 기구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액의 자금을 들여 해마다 100여대씩 수입하는 상황이였으므로 국산품 시제작이 시급하였다. 김록송은 북경과학기술위원회로부터 3차례나 국가프로젝트를 맡았으며 모두 훌륭히 완성하였다.

그는 1963년 대학을 졸업해서부터 200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 40년간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에서 원심분리기 연구를 해왔으며 원심분리기연구팀 팀장으로 9개의 연구과제를 완수했는데 그중 4개는 국가급 연구과제였다. 7개의 과학원급 및 성급 감정회를 통과했고 5개의 특허권을 획득하였으며 4차례 수상받았다. 김록송의 연구 성과는 산업으로 이전되여 1970년대 후반기부터 중국에 6개의 원심기 공장을 세우는 데 이른다. 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원심기산업이였다. 그는 세계 선진수준의 초고속원심기를 세상에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속원심기 회전자의 안전수치를 확보하였다.

김록송은 지난 1989년부터 수십년을 거쳐 줄곧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북경지구 비서장직을 맡았다. 그는 비서장직을 젊은 학자에게 넘겨준 지금도 자연과학 분야의 학술교류와 중국조선족박사 포럼 등 조선족 젊은 인재들의 교류와 양성에 많은 심혈을 기울여오면서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중국민족》조선문판 서정옥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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