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잊을 수 없는 나의 1987년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1월14일 07시34분    조회:201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3)

◇최선자(연길)

1987년 7월 22일 입당선서를 마치고 입당소개인 두분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당지부서기 경신성(한족), 필자 최선자, 교장 백경인(조선족).

1983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학교 령도로부터 절육수술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아연해졌다. “아이 하나인 생육할 수 있는 녀성은 피임조치를 세우고 아이 둘인 생육할 수 있는 조선족 녀성은 무조건 절육수술을 받아야 한다. 만약 이 정책을 위반하면 직업을 해고시킨다.”는 내용이였다.

당시 서른세살이였던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였다. 두 아이가 있었지만 아직 어려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여서 절육수술은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직업을 해고시킨다고 하니 감히 거부할 수도 없었다. 황차 나는 당의 중점배양대상이였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수술은 받되 날자만은 미루어달라고 간청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아픈 시누이를 부양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대학시험을 치는 시간과 국에서 지정한 절육수술 날자가 겹쳤기 때문이였다. 부녀주임은 당적극분자가 자기 학교가 산아제한선진단위로 되는 데에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방해를 하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연변일보》 4월 26일 자에 연변주당위 선전부 김영만 부장의 〈소수민족에 대한 산아제한 정책을 잘 선전하자〉는 문장이 실렸다. 글은 “어린애 둘을 낳은 부모들에게 압력을 가해서는 안되며 그 일로 해서 선진으로 되고 모범으로 되고 입당, 입단하는데 영향이 미쳐서는 안된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 글을 보고 고무된 나는 ‘아이 둘인 조선족녀성이 무조건 절육수술을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고저 직접 김영만 부장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낸 지 보름 만인 5월 10일 《연변일보》에 나의 편지가 〈민족정책에 어긋나는 산아제한 규정〉이라는 기자군중사업부의 글과 함께 실렸다. 그런데 이 글이 화근이 될 줄이야!

림업국부련회에서는 나에게 산아제한사업을 파괴했다는 리유로 공격을 해왔고 교수마저 그만두게 했다. 짧은 편지가 이처럼 큰 폭풍을 몰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10여년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왔던 교단에서 나는 내려와야 했다. 일생일대의 위기에 몰리게 된 나는 김영만 부장과 오태호 총편집을 찾아가서 책임져달라고 울고불고 야단을 쳤다. 산아제한정책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선택을 위해 자문을 받으려고 했을 뿐인데 왜 본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연변일보》에 실었느냐고 따졌다.

김부장이나 오총편집께서는 잘못된 산아제한사업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이 글을 신문에 실었지만 사정이야 어찌되였든 나는 림업국을 팔아먹은 내부 ‘역적’이 되여버린 것이다. 오총편은 문제해결을 위하여 정황 보고서를 서면으로 작성함과 동시에 기자 두명을 림업국에 급파하였다. 당시 상황이 너무 살벌하여 나는 두려운 나머지 단위는커녕 집에도 있을 수 없어 오태호 총편집의 집에 머물면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렸다. 단위가 있어도 갈 수 없고 집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죽치고 있는 당시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하고 죽을 맛이였다.

십여일이 지난 어느 날 김부장께서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김부장이 활짝 웃으면서 림업국부련회 주임과 몇번의 교섭을 거쳐 절육수술을 하지 않아도 직업을 해고시키지 않고 그 어떤 처분도 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인젠 돌아가서 마음놓고 출근하라고 했다.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였다. 하지만 림업국 령도의 시선은 옛날 같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후대양성사업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내가 맡은 학급의 중등전문학교 진학률은 화룡시에서 1위였고 나의 학과인 한어과 진학시험 성적은 만점 120점에서 평균 점수가 108점으로서 화룡시적으로 1등이였다.

마침내 1985년 학교당지부에서는 나한테 입당지원서를 쓰게 하였다. 하지만 그 편지 사건 때문에 상급 당조직의 비준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인 1986년에도 1987년에도 련속 떨어졌다. 편지사건이 있는 한 나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7월 21일 나는 또다시 오총편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말도 떼기 전에 눈물부터 앞서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 몰랐다. 편지사건 하나로 인해 소중한 인생이 훼멸되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원통했다. 나의 마음을 리해했던지 오총편집께서는 말 한마디 없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작은 위로라도 하고 싶어하는 오총편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총편집은 나를 데리고 김영만 부주석(선전부에서 정협으로 전근) 사무실로 갔다.

김부주석은 대뜸 운전수에게 전화를 하여 차를 대기시키라 하더니 나보고 함께 가자고 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나의 일 때문에 바쁘신 분을 고생시키는 것이 미안해서 송구스러울 뿐이였다. 승용차가 연길을 벗어나 룡정을 지나 화룡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화룡림업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림업국 대문 앞에서 김부주석은 나에게 집에 가서 소식을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곧추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내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또다시 어떤 태풍이 불어닥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집에 돌아온 지 3시간 쯤 되였을 때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급하고 거칠게 울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어이 큰일이 났구나!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문앞에 학교 경서기가 서있었다. 그는 나의 입당소개인이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최선자선생님의 입당이 비준되였소!”

뜻밖이였다. 오매에도 듣고 싶던 소리였지만 이렇게 갑자기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흔히들 불행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생긴다고 했지만 행복 역시 생각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였다. 나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김영만 부주석과 헤여진 지 고작 세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였다. 3 시간에 될 수 있는 일을 왜 3년이나 두고 시련을 주었는지 안타까왔지만 나는 행복했다. 방치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주신 김영만 부주석과 오태호 총편집의 휴머니즘적인 인간애에 감사했다.

그 이튿날인 7월 22일, 그 날 나는 드디여 입당하였다. 당기 앞에서 주먹을 들고 당에 충성하며 당의 사업을 위해 종신토록 분투하겠다고 맹세할 때 나는 끝없는 영광으로 가슴이 벅찼다. 나의 시련을 지켜보았던 학교당지부와 전체 교직원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그 날의 감격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어제 일처럼 편지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일을 통하여 나는 모든 행복한 순간들은 그에 못지 않은 아픈 순간을 견디면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아픔이고 고통이였을지라도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이리라.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흩날리는 오동잎은 가을이 다가옴을 알리고 못가의 련꽃들이 활짝 피면서 여름과 가을이 교차되는 이 시각 길림시 송화강반에 우뚝 서있는 길림육문중학교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다보니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쉼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이 무정한 세월의 흐름도 지워버릴 ...
  • 2020-08-26
  • (원제목) 애심이 깃든 티셔츠 입고 새학기 힘찬 출발을 해요 8월 24일,길림성 화룡시신동소학교 어린이들은 사회 각계의 사랑과 관심을 담은 따스한 개학식으로 새학기의 힘찬 스타트를 멋지게 출발했다. 오전 8시,알롱달롱 고운 민족복장을 한 신입생 꼬마들이 가족의 손을 잡고 호기심 어린 눈을 누비며, 순수한 동...
  • 2020-08-25
  • [수기] 자식들이 펼친 낡은 물건 ‘소탕전’ 김삼철 ‘소탕전’이라하면 모두들 전쟁 마당에서 적을 짓부시는 장면을 련상할 지 모르겠으나 지난해 추석 기간 우리 집에서는 시집 간 딸들과 사위들이 오랜만에 놀러와서 난데 없는 낡은 물건을 숙청하는 ‘소탕전’을 벌려 온 집안이 며칠간...
  • 2020-08-14
  • 할머니와 ‘선생님’ 박순자 어느 날인가 뜬금없이 누군가로부터 할머니라 불리우는 바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적이 있다. 아마 47살 나던 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호칭이 무척이나 낯설고 귀에 거슬리긴 했어도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였다. 시력이 1.5로 유난히 밝...
  • 2020-08-09
  • 족보의 종착역은 어디? 첨서    나는 어릴 적 큰아버지가 왜 족보란 물건을 보배인양 숨겨놓고 우리한테 보이지 않았는지 지금껏 알지 못하고 있다. 하긴 큰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어느덧 25년이 지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23년 철을 잡으니 어데 가서 물을 데도 없다. 간혹 있다 해도 아리숭한 추측이거...
  • 2020-08-07
  • 한국 간병업계에 떠오른 새별 한국 “간병정보”회사 황설자 회장에 대한 이야기 한국 “간병정보”회사 황설자 회장 캄캄한 밤 하늘에 유난히 밝게 비쳐오는 작은 별 하나가 있다. 거기에 또 마음과 마음을 하나로...
  • 2020-08-04
  • 이불 30채, 손소독크림 60개, 현금 3천원을 30명 학생들과 장애인녀성들에게 전달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상무리사이며 연길시해금포민족이불유한회사 리사장 최경심의 사랑나눔 미담이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삼복더위 열기를 타고 널리 전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기업이 직격탄을 맞아 직원들을 먹여살리기도...
  • 2020-07-31
  • 민낯   주소: https://mp.weixin.qq.com/s/iEXOQSZMrSSFfY4JNRKq0Q   아침에 일찍 나오면 드물게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른 시간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표정이 살아서 걸어다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원래는 이게 정상인데 어떻게 하다보니 얼굴표정을 볼 수 있는 길거리가 이...
  • 2020-07-24
  • '박방본초 전매점”의 려순희 사장의 헌신 이야기   15살 소녀가 발 하나를 잃게 된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동상을 입은 발이 썩어들어가 잘라야 한다는 던. 발이 100일간의 치료끝에 완쾌됐으니 전설같지 아니한가.   사실은 이러했다.   올해 2월, 왕청에 살고 있는 한...
  • 2020-07-16
  • 김매화(왼쪽)씨가 에도가와구 시바다 야스히로 총무부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지난 7월 8일,재일조선족 김매화씨가 도꾜 에도가와구(江戸川区)에 마스크 2만장을 기부하였다.   류학생시절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일본사회복지의 덕택을 받았던 김매화씨는 현재 도꾜 에도가와구에서 주식회사 ...
  • 2020-07-14
  • 엄마 집은  5층으로 된 아빠트인데 내가 엄마 집에 간다고 하면 엄마는 아래층에서 날 기다리실 때가 많다. 엄마가 이렇게 내려오신 것은 내 다리가 걱정되였기 때문이다. 번마다 함께 올라갈 때면 엄마가 내 앞에 등을 내밀면서 말씀하신다. “너 그 다리로 오르기 힘들 텐데 어서 내 등에 업혀.” 그럴 때...
  • 2020-06-29
  •  내가 만난 남편 (박영옥편 7) 2012년도 가을의 어느날, 나는 이외의 사고로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가서 사진 찍었더니 골절되였다면서 석달이 지나야 회복된단다. 정말 약한 다리에 침질한 격으로 부실한 다리가 골절되였던 것이다. 나는 아픔을 견디며 석달 후란 그 날자에 초점을 맞추고는 매일...
  • 2020-06-29
  •  고마왔던 은사님 박영옥편 6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공부하는 동안 제일 고마운 은사는 이미 고인이 되신 박창호선생님이다. 졸업 후 20년이 넘은 후에도 내가 문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에게 여러가지 서적과 속담책도 사다주셨고 발표된 글을 보러 일부러 우리 집에 오시기도 했던 선생님이시다. 그리고 내가 장...
  • 2020-06-24
  • 내 '아픈 손가락'들이 남기고 간 자리  박미자(연길시제2중학교 교원) 2020년 5월 4일 태암촌의 진달래는 유난히도 화사하게 봄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덤무덤의 묘지를 지나 푸른 초원마냥 길게 뻗은 들판을 지나 흐드러지게 피여난 진달래는 파아란 하늘과 어우러져 연분홍빛 꽃바다를 뽐내고 있었다. &nb...
  • 2020-06-19
  • 인생에서 지기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나는 행운아였다. 나에게는 나의 분신 같은 친구 둘이 있다. 소꿉친구이자 동창생(화룡현신동소학교 1966년급 동창생)이며 부대의 전우이자 지기인 허문선과 방창화다. 이들 둘은 평생을 부대에서 청춘과 정열을 다 바쳐 근무하다가 퇴직한 전업 군인이다. 허문선은 원 길림...
  • 2020-04-12
  • ▲사진설명: 최창성 의사 부인인 채경숙씨가 정성드려 준비한 청국장   2020년 4월 1일 수요일 어제는 잊을 수 없는 날! 우리 낭군님께서 우한 의료 제일선으로부터 칭다오로 돌아오셔서 한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50일간 집밥을 못 드시고 고추장, 된장을 못드셨으니 얼마나 허전하셨겠습니까?   우한에서...
  • 2020-04-03
  • “나이가 들다 보니 큰 도움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이나마 저의 성의를 표달하려고 합니다.” 3월 5일, 71세의 로당원 신순자는 들고 간 현금 만원을 신립사회구역당지부 서기인 정립화의 손에 쥐여주면서 전염병 예방통제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일군들과 환자들에게 전해달라고 ...
  • 2020-03-11
  •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술공장 리성모 공장장은 설기간에 본사 주재기자와 함께 당지에서 제일 장수로인으로 불리우는 박동수(107세)로인을 방문했다. 장백술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박로인(우) 박동수로인은 1913년 10월 11일에 조선 단천에서 출생했다. 1.60메터의 작은 키에 백근 정도의 몸무게를 가진 로인은&n...
  • 2020-02-12
  •       조선기업인 천진청송화약(青松华药)의약회사에서 최근 천진시인민정부에 3만장의 한국 의료용 마스크를 기증했다.   신종코로나가 발생후 1선 방역에 필요한 마스크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이 회사 심재관 리사장과 직원들이 설 휴식도 마다하고 여러경로를 통해 해외공급상과 연락했다. 드디여...
  • 2020-02-05
  • 나는 꿈을 꾼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해빛이 창문에 따갑게 비추던 어느 하루, 여섯살 난 나는 집에서 이야기책을 보고 있었고 어디선가 뿡뿡하는 기분 나쁜 승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빚쟁이들이 들이닥친다. “엄마는 어디 갔니?” 이젠 “아빠는 어디 갔냐”도 생략이다. 얼어붙...
  • 2020-02-01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1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