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지기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나는 행운아였다. 나에게는 나의 분신 같은 친구 둘이 있다. 소꿉친구이자 동창생(화룡현신동소학교 1966년급 동창생)이며 부대의 전우이자 지기인 허문선과 방창화다.
이들 둘은 평생을 부대에서 청춘과 정열을 다 바쳐 근무하다가 퇴직한 전업 군인이다.
허문선은 원 길림성변방총대당위 서기, 총대장직에 있으면서 수차 국가, 성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였고 밀수타격 1등공을 세운 정사급 지도자였다. 2019년 국경절에는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공화국 창립 70주년 기념훈장을 수여받았다.
앞줄 오른쪽으로부터 허문선, 방창화, 뒤줄 오른쪽 필자
방창화는 길림성삼림경찰총대 연변지대 정치위원, 길림성삼림경찰항공(机降)대대 대대장 력임 기간에 수차 성, 주 선진사업일군으로 표창 받았고 대흥안령 화재 진압 전투에서 영용히 싸워 국무원으로부터 집단 1등공, 개인 1등공을 기입 받은 공신이다.
방창화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짜개바지 친구였고 또 한 집체호에서 함께 참군한 막역한 사이이다. 1993년 부대에서 복원한 나는 1976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으며 후에는 연길시인민검찰원 검찰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다.
우리 셋은 같은 경력, 같은 취향, 같은 꿈이 있었기에 수십년 동안 늘 함께 할 수 있었고 늘 서로에게 힘이 되여주고 서로를 걱정해주고 다독여주고 고락을 같이 겪는 친형제보다 더 끈끈한 지기로 될 수 있었다.
1969년급 중학교 졸업생인 우리는 시대의 피해를 제일 많이 받은 불행아였지만 결코 운명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맡은바 분야에서 꾸준히 열심히 파고들었고 남보다 몇십배의 노력을 한 보람으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74년 연변사범학교 공농병 학원이였던 나는 장춘사범학교에 가서 중문연수를 하게 되였다. 그 시절 학교 식사라야 매일 옥수수떡과 감자 아니면 멀건 죽 뿐이였다. 그때 장춘삼림경찰총대 문예선전대에 있었던 방창화는 일요일이 되면 우리 학교로 찾아와 나한테 식사 한끼를 만포식시키고 또 자기의 로임(33원 50전)봉투에서 10원을 꺼내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주군 하였다. 그때의 10원이면 지금의 몇천원은 될 것이다. 창화는 5형제중 둘째였는데 집형편이 매우 어려웠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진한 감동에 가슴이 뭉클해지군 한다.
2019년 5월, 오랜 당뇨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나는 합병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한달 남짓이 병원에서 사투를 벌리고 있을 때 허문선이 안해와 함께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나의 두손을 꼭 잡고 기필코 병마를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기에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과연 나는 한달반 만에 산소호흡기를 떼고 기적같이 일어섰다.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나에게 용기를 준 친구 허문선이 정말 고마왔다.
2014년 가을에 내가 대장 수술을 받았을 때였다. 일주일간은 무조건 죽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때는 창화가 나섰다. 안해가 외국에 가고 없는 상황인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병원으로 죽을 날라다주면서 하루 빨리 병세가 회복되도록 보살펴주었다.
문선이와 창화는 내가 힘들거나 아플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나의 버팀목이 되여주었고 나를 부축하여 일어서도록 하였다.
올해 나는 66세이다. 60여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하늘땅이 내려앉고 숨이 꺽 막히는 감이 드는 경험을 두번 겪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84세 고령에 취장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새벽에 운명하실 때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가냘픈 모습을 보는 순간이였고 다른 한번은 방창화가 운명했을 때였다.
방창화가 간암 진단을 받은지 3개월이 되였을 때였다. 그날 동창생들 몇이 병문안을 갔는데 점심때가 되자 방창화는 점적주사를 다 맞았으니 집으로 가겠다는 것이였다. 간병하는 안해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병실이 추워서 안된다는 것이였다. 복수까지 와서 바지도 춰입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자기 생각은 전혀 안하고 안해의 건강을 챙기는 창화였다. 우리가 집으로 가지 말고 병원에 그냥 있으라고 그렇게 만류해도 막무가내였다. 별수 없이 창화를 보내고 우리끼리 음식점으로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우리가 첫 밥술을 들기도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창화의 아들이였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것이였다. 우리가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가보니 120구급차 담가에 실려 있은 창화는 이미 턱이 떨어져있었다.
그날 창화는 안해와 함께 집으로 가던 도중에 쓰러졌다. 아빠트 계단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가다가 그만 5층 집 문어구에서 그 자리에 선채로 숨을 거두었다… 간이 ‘폭발'했던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앞둔 순간까지도 다른 사람을 챙기고 남을 배려했던 창화, 이것이 창화의 원체 사람 됨됨이였다. 그래서 친척들은 물론 동창생, 친구 누구든 평소에 어려움이 있으면 늘 창화를 찾아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하군 했다. 하지만 창화는 언제 한번 싫은 티를 내지 않고 몸을 내번지고 최선을 다했고 도와준 티도 내지 않았다. 이런 창화 앞에서 나는 늘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군 하였다. 나의 영원한 롤모델 창화는 이렇게 영영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1986년에 우리 셋은 연변의 범죄 타격 제일선에서 함께 사업한적이 있다. 허문선은 연변변방지대 정치위원, 지대장이였고 방창화는 연변삼림경찰지대 정치위원이였고 나는 연길시인민검찰원 형사과 과장이였다. 우리 셋은 연변 범죄타격 선진표창대회, 길림성 범죄타격 선진표창대회에서 함께 나란히 선진개인으로 표창 받았다. 허문선은 밀수타격 전투에서 뛰여난 성과를 거두어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간판프로‘초점탐방 (焦点访谈)'에까지 오른적도 있었다.
나는 나의 인생에서 이렇게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서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진정 그들은 내 령혼의 동반자이다.
비록 방창화는 한발 먼저 저 세상으로 갔지만 그의 소탈한 품성과 먼저 남을 위하는 고상한 정신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오늘도 내 곁에서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고 있는 허문선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약 같은 친구이다.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창화의 목까지 다하여 문선이와 더욱 끈끈한 우정을 쌓아갈 것이다.
원용호/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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