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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정든 살림집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9월7일 08시46분    조회: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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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송권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살던 살림집에 많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1984년 봄 부모님들은 우리를 분가시켜 세간살이를 하도록 했다. 나의 첫 살림집은3 0여평되는 초가집이였는데 옛날 마을의 지주가 살던 집이였다. 토피장으로 두툼하고  반듯이 쌓아올리고 아름드리 홍송 각구목으로 대들보를 언젖는데  정말 으리으리 한게  동네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였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지주, 부농을 투쟁하고 그들이 재산도 청산하자 멀리 흑룡강에  도주해 갔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오자 촌에서 90평 되는 이 집을  30평씩 세칸으로 막고 집체호로 개조했다. 후에 정책락실로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들이 하나 둘 돌아가자 농호에 팔았다. 한 지붕 아래 세살림이 살다 보니 불편한 점도 많았다.  그래도  내가 살 집이라 안해와 둘이서 집안 청소도 깨끗이 하고  집 안팍 벽도 새로 횟가루칠을 하고 안해가 시집올 때 갔고 온 이불장, 옷장, 식장도 놓으니 환하고 아담했다. 장모님도 기별을 받고 왕청에서 가마 한쌍을 사왔고 형님네도 새 밥상을 사다 주었다. 세간 나가던 날 어머니가 우리 부부에게 "분가해 나간다 하여 마음도 분가해서는 안되느니라. 가족이  라는 큰 나무의에 비하면 너는 곁가지이고 며느리는 혈육을 정으로 이어주는 접목한 가지와 같으니 뿌리를 잊지 말거라. 갗추어 준게 없다고 섭섭해 말고 둘이 열심이 살아야 한다."  서당문 앞에도 못 가본 어머니가 어디서 이렇게 철리에 담긴 말씀을 하셨을가?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이미 심장한 말씀이 또렷이 떠오른다. 세간난 첫날밤 우리는 아들딸 낳고 열심히 살리라 굳게 맹세했다,
       그때 나는 향정부에  금방 출근했는데  월급이 30여원이였다. 그래서 살림에 보태려고 닭도 치고 토끼도 기르고 돼지도 길렀고 안해가 밭도 조금 다루었다. 일밭에서 돌아 올 때면 안해는 늘 짐승들이 먹을 풀을 이고 지고 하였고 나도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돼지죽도 주고 저녁준비도 해놓았다. 가을에 돼지를 팔아 14인치 흑백 텔레비도 척 사놓았다. 11월에는 귀여운 딸애까지 보았다. 행복과 희망에 가슴이 부푼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늦가을의 탈곡을 끝내고 초겨울이 닥쳐오면서 시끄러운 일이  자주생기였다. 호도거리농사를 하다보니 집집마다  벼낟가리 콩낟가리를 제집 마당에  무져놓으니 쥐들이 성화였다. 어느날부터 였던가 쥐들이 천정에서 하나 둘 장난치던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무리지어 소란을 피웠다. 한밤중에는 서로  싸우는지 찍찍 소리를 내는데  애가 놀라 깨날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쥐약을 사서 집주위를 돌며 쥐굴마다 넣어도 몇칠 지나면 몰려왔다. 밤이 싫어졌고 근심도 생겼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을 먹고 있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천정에서 엄청 큰 쥐 한마리가  구들장에 떨어졌다. "저,,,쥐야!" 안해가 먼져 발견하고  아이를 제꺽 안았다. 내가 후닦따 일어나 부엌아궁이의 나무막대기로  젖먹던 힘 다해 내리쳤는데 요리조리 날뛰면서 종시 잡히지 않았다. 한참 난시판을 벌렸는데 갑자기 쥐가 어디로 도망가고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여느때와 같이 내가 부억에서 아궁에 불을 지피고 안해가 쌀함박에 쌀씻어 가마에 앉히는데 잡자기 빨래방치만한 큰  쥐 한마리가 아궁이에서 뛰쳐 나왔다. 화뜰 놀란 내가 "쥐다! 하며 나무막대기로 내리치니 빗 맞은 쥐가 이번에는 가마목에 훌쩍 뛰여올랐다, 안해가 놀란 나머지 뒤로 훌렁 물앉으며 본능이랄가 모성애랄가 애를 안고 밖에 나갔다. 이번에는 나는 침착하게  부엌아궁이 부터 단단이 막고 쥐잡이에 나섰다. 한참 용 쓰던 놈도 힘이 빠졌는지 옷장 밑에서 헐떡거고 있었다. 내가 벽과  옷장 사이로 힘껏 내리치자 찍 소리를 내며 나자빠졌다. 그후로 내가 쥐약을 푼푼히 사서 세 집에서 다 같이 동시간에 놓으니 점차 쥐피해가 적어졌다.
       그 해 겨울 불길이 잘 들던 집이 기압이 낮은 날이나 흐리고 눈 오는 날에는 불길이 들지 않아 문을 열고 불을 때야 했다. 집이 추우니 딸애도 자주 앓았다. 쥐들이 굴을 파느라 구들고래를 메웠고 구새목도 메웠던 것이다. 추운 겨울의 어느날 구들돌을  들어보니 쥐버럭이 꼴똑 찼다. 그걸 다 훑어내고 개자리 버럭도 퍼내고 젖은 소똥과 흑을 버무려 잘 발라 놓았더니 불길이 잘들었다.
       이듬해 봄에 또 사달이 생겠다. 지붕에 이영을 얹으려고 벼단까지 올려 놓고 이일저일 미루다나니 6, 7월 장마가 오니 집에 비가 샜다. 한밤중에 세수대야, 물통, 바가지 까지 동원해서 비물을 받았다. 집안이 온통 물란리다. 우기가 끝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 지붕에 올라가 보니 또 그놈에 쥐들이 벼단에 뭍혀있는 날알을 먹느라 숱한 구멍을 뚫어놓았던 것이다. 형님들의 손을 빌어 곱게 새 이영을 얻고 인젠 한 심름 놓았다 했는데 8월에 접어들자 지붕 우에서 노린내가 지독하게 나는 벌거지가 기여내려왔다. 밖에 전등을 켜고 모기태쑥을 태워도 666호 독한 농약을 쳐도 죽지 않았다. 그저 세수대야에 물 떠다놓고 비자루로 쓸어냈다. 련몇칠 내리더니 9월의 서늘한 날씨에 종적이 없어졌다. 1988년 늦가을 우리는 귀동자를 보았고 새 집에 이사를 했다
          나의 두번째 살림집은 120여평방이였는데 중간을 막은 한 지붕 아래 두 살림이 살 수 있게 지은 집이였다. 집주인은 촌의 림장도 도급하고  목이버섯장도 꾸리고 집도 여러 채 지어팔며 사는 경제 핵산이 빠르고 부지런한 사람이였다. 그는 100여평방에 달하는 자기 살림집을 새로 짓고 장식을 하면 서 림시로 거주하던 이 집을 팔기로 한 것이다.  아직 손 갈 데가 많은 집이였으나 값도 합당해서 8000여원에 사기로 하고 현금 6000원을 먼저 지불하고 나머지 2000원은 년 말에 물어주기로 합이했다. 새 집에 이사한 후 나는 짬짬이 시간을 내서 울바자도 세우고 집채석도 돌로 쌓고 돼지우리도 짓고 하며 부지런히 집을 꾸려 나갔다. 일요일 휴식이 따로 없었고 아침, 저녁 지어 점심시간에도 일했다.  내가 살 집이라 피곤한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하루 오후에 일찍 퇴근하여 돼지굴 안에 널판을 펴고 못질 하는데 "이 집이 인제야 제주인을 만났구만" 하면서 이웃 집 형님벌 된는 사람이 "일 잘 하자면 공구가 마당해야 되지"하면서 집에 들어가 톱, 도끼, 망치를 갖고 와 일손을 도와 주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적녁에 한상 차렸다. 술이 서너순배 돌자 말도 많아졌고  코물에 눈물에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워나 어릴 때부터 싸움대장이였는데  중학교 다닐 때 무리싸움에 가담했다가 결의형제가 뭇매를 맞자 그를 구하려고 칼로 대방을 찔러 로동교양소에 갔다가 만기되여 나왔는데 지금은 큰 탄광에 로동자로 일한다고 묻지도 안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김형이라 불렀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이 마누라가 나와 겨우 얼려 집에 데려갔다. 첫 인상과 달리 내 심정이 좀 찜찜했다. 며칠후 딸집에  놀러 가셨다던 그의 엄마가 돌아왔다. 키 크고 광대뼈가 툭 하고 튕겨 나온 꿋꿋한 로친이였는데 아침을 먹는 우리 집에 찿아와 아들이 주고 간 공구들을 몽땅 찾아가면서 "술 취한 사람이 취김에 준 걸 받아가지면 되냐"하면서 나를 나무랐다. 그리고 바자띠를 동이고 남은 쇠줄도 제집에 가져갔다,
       그러던 6월말 어느날 밤 내가 단위에서 7,1절 경축보고대회 자료를  집에 갔고 와 쓰는데 마당에서 인기척 소리가 나더니 똑똑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누구세요?"하며 문을 여니 이웃집 김형이 술냄새를 확 풍기며 들어섰다. 그는  부엌 널마루에 앉더니 술한잔만 달란다. 내가 례의를 지켜 놀라 잠 깬 안해보고 술상 차리라고 하니  김형이 손 사래치며  강술을 석잔하고 돌아갔다. 우리 부부가 뭐가 뭔지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의 엄마가 찿아왔다. "우리 아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술취한 사람한테 또 술주면 되냐"고 하며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후에 안일이데  이웃집 김형은 알콜중독자였다. 한번 술을 과량하면 일주일식  강술을 마셨는데 그럴 때면 밤에는 엄마가 지키고 낮에는 마누라가 지키는데 조금만 쪽잠에 빠져도 동네집 돌며 술을  마셨다. 한번은 한밤중에 앞집에 갓 이사온 젊은 사람의 집에 뛰여들었다. 뭇매도 맞았다. 내가 달려가 술 마신 사람을 때려서는 안된다고 그 젊은이를 따끔하게 타이르고 한밤중에  그를 싣고 향위생소에 데리고가 처치도 해주었다. 그후에도 술만 마시면 이집저집 돌며 술을 마셨는데 동네에서  모두 반기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집만은 허물없이 찿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이웃집 김형이 술주정도 피곤한데  어느 하루는 내집 원 주인 아즘마가 안해가 출근하는 백화상점에 찿아와  나머지 집값을 몽땅 내란다. 몇칠후에도 주지 안으면 남편이 출근하는 향정부에 찿아가겠다고 했다. 년말에 값기로 했는데도 말이다,  저녁에 안해와 토이하고 년말까지 길러 돈을 더 받자던 돼지를 팔고 한달후 아들 첫돌에 들어온 부조를 합해 몽땅 갚아버렸다.  몇년후 집주인이 우리 집에 찿아와 나무를 채벌하겠는데 류동자금이 모져라 돈 좀 꿔달란다. 정말 "올리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법"이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안해가 두말없이 돈을 꿔주었다. 그해가을 본전에 리자까지 갖고와 거듭 인사하는데 우리는 리자를 받지 않았다,
       93년도 개혁이 심화되면서 안해가 출근하던 2층백화상점도 파산을 선고하고 금융계통에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일짜리를 잃은 안해가  시장에서 20여평되는 가게를 세맡고 비닐제품으로 생산한  장판곽을 비롯한 일상용품과 오금을 들여다 팔았다. 그래서 시장과 거리도 가깝고 집도 큰 독집이 수요되였다.  이사를 간다고 짐을 꾸리던 어느날 저녁 이웃집 김형이 엄마가 찿아와 녀자  구두 한컬레와 팬티 하나를 내놓으면 "정말  젊은 사람들 보기 미안하오. 아들이 3대 독자여서 손주놈 하나 보자고 했는데 손녀를 낳고난 며느리가 시름시름 자주 앓으면서 임신이 안돼 점쟁이를 찿아더니 아들딸 낳고 별일없이 무사히 사는 집 녀자의 구두와 팬티를 갖고 오면 방토를 해준다기에 이 집 걸 가져갔더럈소." 하며 내민다. 작년가을의 어느날 해볕이 유난이 좋타고 하면서 습기찬 옷가지와 구두랑 내다 말리웠는데  저녁에 거더들일 때 보니 없어졌던 옷가지들이다. "무던한 집을 만나 잘 살았는데 이사가니 섭섭하오"라고 하며  서운해서 눈을 적신다,
        우리가 세번째로 산 집은 80여평되는 단독 살림집이였는데 집주인이 한국로무를 일찍 나가서 새 집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앞마당이 대단이 너른 게 마음에 들없다, 이사한 봄부터 나는 해마당  뜰안에 사과배, 복숭아, 앵두, 오얏, 살구, 포도 등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그 밑에 곰치 100여포기, 부추도 서너고랑 심었다. 그리고 토끼, 게사니, 개도 키웠다. 봄이면 여러가지 과일꽃들이 다투어피여 향기가  뜰안에  그윽했고 4월이면 곰취와 부추도 파릇파릇  돋아나 푸른주단을 펴놓은 것 같았다 가을이면  여러가지 과일이 무르익어 그 향기 멀리까지 풍기였고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먹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이웃도 잘 만났다. 항미원조에  참전한 로인인데 늘 자식처럼 대해주고 내가 회이나 출장을 가면 낚시하고 돌아올 때 꼭 토끼풀이나 게사니먹이를 자전거에 달고 왔다. 여름에는 빨래 같은 것도 걷어주군 했다. 나도 무거운 짐이 생기면 들어주고 가을에는 다 큰 토끼도 같이 잡아먹고 게사니알도 절구어서 나누어먹었다. 2000년에 나는 도문시에 전근되여 농촌생할을 접고  시내에 80여평 되는 아빠트에서 생할한다, 물론 생할이 많이 향상되고 거주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아들딸 낳고 행복의 웃음소리 넘치던 나의 초가집,  이웃이 사촌처럼 살려면 내가 먼저 사촌이 되여야 한다는 철리를 일깨워준 두번째 벽돌집, 서로서로  믿음을 앞세우고 "부자간에도 일이 사랑"이라 어려울 때 서로 일해주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준 집들... 아마도 내 생에 영원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20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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