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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지지리도 운이 안좋은 나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12일 08시31분    조회: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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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59] 지지리도 운이 안좋은 나
리기준


나는 삼형제중 막내로 태여났다. 내가 네살 때 친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우리 집은 매우 어렵게 생활했다. 사람들은 쩍하면 우리를 ‘애비 없는 새끼’ 라고 놀려주었고 어머니는 이상한 남자들의 무시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2년 후 우리 어머니는 룡정시 금불사(현재 룡정시 동불사향 금불사촌)에 재가하고 우리는 이붓아버지의 자식 다섯에 우리 형제 셋까지 10 식구가 코구멍 만한 초가집에서 살았다. 두집이 합쳐서 그것도 10식구가 한집 살림을 한다는 것은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우리를 위하여 고생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 그지없다. 어머니가 재가한 후 애들은 쩍하면 우리를 ‘후애비’라고 놀려주었다. 그럴 때마나 나는 그 애들과 주먹치기를 하곤 했는데 나의 얼굴에는 온통 허물만 남아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새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형들이 입던 옷을 받아 입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닌가고 의심해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나는 참 불행한 운을 갖고 태여났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집 애들이 셈 빨리 든다고 나는 어릴적부터 공부를 잘하여 농촌을 떠나 크게 출세하고 싶었다. 만 6살 때 이붓 아버지를 졸라서 학교 붙으러 갔는데 나하고 다른 한 애는 나이 어리다는 리유로 교장실로 가서 면접을 받아야 했다. 교장실에 가니 한족 교장선생님께서 한어로 <모주석(毛主席)>을 쓰라고 했다. 다른 애는 모주석을 써서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나는 모주석을 쓰지 못해 결국 울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금불사에는 조선족 어린이가 적어서 한족학교에 조선족학교가 귀속되여 있다나니 한해 건너 한번씩 조선족 학생을 모집했다. 나는 2년 후인 8세에 소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빨리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잘하여 출세하고 싶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소학교 졸업 시 선생님들과 함께(세번째 줄 왼쪽 첫번째 필자임)

금불사에서 소학교 첫학기를 끝내는 해에 우리 집은 개산툰진 회경촌에 이사를 갔다. 회경촌은 금불사에 비하여 순 조선족들이 집거하고 있는 마을이고 생활 수준도 좋았으며 촌학교 교육질도 비교적 높았다. 나는 인츰 새 학교생활에 적응하였으며 두달 후에는 반장으로 당선되였다. 그 때부터 줄곧 반장으로 있으면서 학기마다 3호학생으로 되였다. 그런데 소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소학교 5년제가 6년제로 늘일 줄이야?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월반하겠다고 하니 담임선생님은 “오, 알았다. 너 처럼 공부를 잘하면 월반해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교장선생님과 문의하겠다고 했다. 며칠후 담임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이 알아보았는데 정책상 월반이 안된다는구나”고 알려주었다. 공부를 잘해 빨리 출세해서 잘 살고 싶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회경소학교 교장선생님은 “전 향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우리 학교에 기준이 밖에 없는데 기준이가 월반해서 향중학교로 가면 우리 소학교의 명예는 어떻게 하는가”며 월반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광소향 정동중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초중다닐 때도 나의 학습성적은 더욱 우수하여 줄곧 학년 1등을 유지했다. 심지어 초중 1학년 때 초중 2학년의 현(县)수학경연에까지 참가하기도 했다. 어느덧 초중을 졸업하는 해 가난한 집 살림을 보태려는 마음에서 나는 중등전문학교에 지망을 썼다. 그 때 정동중학교 김교장은 이붓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보내신 분이여서 우리 집 사정을 손금보 듯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교장은 ‘기준이는 연변1중에 꼭 붙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모르게 나의 지망을 연변1중으로 바꿔 놓았다. 나의 의사를 무시한 결정이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연변1중에 붙었으니 말이다.

전 연변의 최우등생들만 연변1중에 모이니 나의 성적은 최우수는 아니여도 학급에서 중등 수준은 됐다. 그런데 대학입시에서 락방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선생님도 그렇고 학급 동창생들도 모두 놀랐다. 한 초중 동창생은 룡정2중(룡정시고급중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도 대학입시에서 락방했다. 그애는 “그렇게 훌륭한 기준이도 못 붙었는데 내가 대학에 붙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다.”고 별로 락심하지 않았다. 나는 입학 지원서를 잘못 쓴 것도 있지만 시험 볼 때 실수한 것도 있었다. 락방은 엄연한 사실이다. 참말로 급하면 뜨거운 두부를 먹지 못한다는 속담이 맞는 것 같다.

초중 3학년 때 동창들과 함께(뒤줄 오른쪽으로부터 5번째 필자임 ) 

가정형편 때문에 더는 연변1중에서 재수하지 못하고 개산툰진 자제고중에서 재수했다. 입학 지원서를 쓸 때 1년이라도 빨리 졸업하려고 본과를 지원하지 않고 전문대학을 지원해 길림재정세무전문대학에 지원했다. 그런데 시험성적은 본과모집 점수선을 초과했는데도 입학통지서를 받지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개학날자가 지난지도 한달이 되였건만 감감무소식이였다. 이대로 농사일이나 해야 하는가? 흰구름이 둥둥 뜨는 푸르른 하늘은 변함이 없건만…한 귀인의 말을 듣고 나는 연변인사국에 갔더니 입학통지서가 이미 내려왔다는 것이다. 대학은 붙었는가 본다. 꿈인지 생신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연변1중에 갔더니 글쎄 대학입학통지서가 그 곳에 있지 않는가? 하늘로 날듯 좋았지만 그래도 반신반의의 마음이였다.

당시 대학교를 졸업하면 국가에서 통일배치해주었다. 그런데 우리 웃학년까지는 통일분배란다. 선배 졸업생들은 세무국이나 재정국 등 좋은 단위에 배치 받았는데 우리 학년부터는 국가 공무원제도를 실시한다며 통일 분배를 취소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하여 국가공무원시험을 봤다. 나는 룡정시세무국을 지원했다. 그런데 성적이 높은 내가 ‘면접시험’ 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여러 단위에 지원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반년이란 허무한 시간을 보내다가 시험을 거쳐 룡정직업고중 교원으로 있게 되였다. 당시 룡정시의 재정이 매우 어려웠는지라 급여를 반년이나 미루어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동창들은 로무로, 개체업을 경영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급여도 제때에 타지 못하는 지라 나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한때 는 ‘공부 잘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는 생각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결국 나는 2년간 교원직에 있다가 2000년에 천진에 있는 한국회사  LG신형건재라는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교원직에 비해 급여도 무척 높았고 또래들이 많아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회사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처음 취직한 한국회사에서는 재무부 일을 하게 되였다. 중국에서 재무전산학과를 전공한 나는 회계전문용어를 중국어로만 알았을 뿐 한국어로는 전혀 몰랐다. 노트에 적으면서 배웠다. 차츰 업무에 익숙해졌고 효률도 높았으며 상사의 인정과 높은 평가도 받았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따르지 않던 운을 개변시킨 것이다.

이 한국회사의 제도는 체계적이고 분명하고 철저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제도도 있었다. 업적을 불문하고 승진할 때 대학 본과생은 입사해서부터 2년이면 대리로 승급하고 전문대학 졸업생은 입사해서부터 3년이 돼야 대리로 승급하게 했다. 나와 함께 재무부에 입사한 대학 본과생 김모는 업무 수준이나 효률이 나보나 못했지만 본과생이라는 리유로 입사 2년 만에 대리로 승진하고 급여도 올랐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나는 등소평의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만 잡으면 훌륭한 고양이다.”는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내가 근무하던 회사는 한국에서 10위권에 드는 회사였다. 나는 회사를 떠나고야 말았다.

그 후 청도에 있는 한국회사 재무과 책임자로, 직급도 원래보다 높고 급여도 원래보다 많이 높게 입사했다. 입사초기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실무수준을 높인 데서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고 직급도 한층한층 올라갔다. 맡은 분야의 관리감독 역활을 잘하여 회사의 훌륭한 참모로 일해왔다. 특히 경영분석, 세무, 로무 및 법적업무 등 면에서 회사의 운영자금을 절약하고 안정된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회사의 충실한 실무자, 관리자, 파트너로 일했다.

가족과 함께 

끊임없이 배우고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해왔다. 나는 내가 겪었던 소중한 기업관리 경험으로《중국기업관리실무》라는 책을 집필, 출판하게 되고 련재로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컨설팅 및 대행 업무를 맡아주면서 기업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리론과 실무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선진적인 경제의식과 직업정신을 배우고 국가의 경제상황과 금융정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였으며 중국의 시장경제 정책과 더불어 중국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경제적 부도 이루게 되였다.

꾸준한 노력 결과 나의 아들딸들은 어릴 때부터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고 과외로 피아노, 영어, 태권도 등을 배우도록 했으며 지금은 말레이시아에 가 조기 류학중이다.

끊임없는 노력을 거쳐 불행했던 나의 운명이 개변되였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말하면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되돌릴 수 없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가 떳떳한 삶이며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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