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주소 없는 편지’
허동철
지난 한가위 추석을 앞두고 조카 허매화(연변전업국 고급 회계사)한테서 삼촌께 드릴 말씀이 있다며 연집강뚝 부산돌솥밥집에서 만나뵙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는 약정한 시간에 똑 같이 도착했습니다. 점심 밥상을 마주하고 조카는 썩 오래전부터 별렀다면서 만나고저 한 사연을 얘기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우리 남매를 극진히 아껴주고 사랑해주었고 그에 못지 않게 삼촌도 남달리 보살펴준 이야기를 많이 듣고 또 직접 목격도 했다면서 형님과 형수님께 노래를 써줄 수 없겠냐고 하였습니다. 노래를 지어주시면 료양원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이젠 90세도 넘으셨으니 조만간에 저세상에 가시겠는데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재작년)어머니를 만나서 이 사연을 얘기하면 어머니 또한 얼마나 위로를 받겠는가고 하면서 말입니다.
서로 맞춰가며 한생을 살아온 필자의 형님 허동준(92세)과 형수님 고 윤련숙.
저의 형님 허동준은 1950년대 연변 초대 프로축구팀 주장이였고 연변전업국 경제사였으며 형수 윤련숙은 1950년대 연길시제2백화상점 초대 판매원이였고 재작년에 별세하였습니다. 두분이 룡양원에 계실 적에 조카는 무릎 관절염 때문에 수술까지 받은 불편한 몸으로 연길 서쪽 한끝에서 동쪽 한 끝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며 부모들에게 제때에 약을 챙겨드리고 수시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리발을 해드리며 온갖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현대심청’이라고 별명을 져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조카의 당부인 데 어찌 그저 듣고만 있겠습니까. 그 부탁을 받고나니 지난 날 감격스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면서 가슴이 찡해났습니다.
제가 화룡현 서성구 (현 서성진 팔가자진) 고성소학교를 다닐 때였습니다. 형님은 당시 연변대학을 중퇴하고 심양축구단에 있다가 연길시정부 교육과에서 근무했는데 장래에 큰 사람이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집에 다녀올 때마다 책을 사다주었습니다. 그중에서 《북해의 이야기》라는 책이 가장 인상이 깊었습니다. 여기에는 양산 장사를 하는 아들과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을 둔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비오는 날에는 양산 파는 아들이 양산을 팔 수 없게 되였다고 생각되여 걱정하고 해가 나는 날에는 우산 파는 아들이 우산을 팔수 없게 되였다고 근심을 하다보니 비가 오나 해가 나나 늘 근심걱정으로 나날을 보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생각을 확 바꾸어 비오는 날에는 우산 장사가 잘되겠다 생각하고 해가 나는 날에는 양산 장사가 잘 되겠다고 생각되여 늘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였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사고방식―나어린 동심에 심어진 이 사고방식은 저의 전반 인생의 지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소학교 때 소년선봉대 대대장이 되고 해마다 최우등생, 개근생, 모범생이 되고 또 화룡현 현장상(현장 최석린, 부현장 장보전)까지 받게 되자 형님은 더욱 신이 나서 ‘6.1’국제아동절 (1954년)을 앞두고 250그람인가 500그람인가 피를 수혈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저의 신발, 붉은넥타이, 하얀셔츠, 잉크색바탕에 빨간줄 록색줄이 간 반바지(그 당시 농촌에서는 구경도 못했음)까지 사가지고 집에 와서 (당시 수혈하면 대가가 있었고 일정 기간 휴양도 했음) 나한테 직접 신을 신겨보기도 하고 옷을 입혀보기도 했습니다. 형님은 하도 많이 수혈을 해서 얼굴이 볼품없이 수척해졌습니다. 그런 맏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께서는 너무 가슴이 아파 보름내내 닭곰을 해서 챙겨주었습니다.
필자의 형님 허동준과 형수 윤련숙 가족사진(뒤줄 오른쪽 첫번째 조카 허매화)
저는 형님이 피를 팔아 사다준 새 넥타이, 새 신발, 새 옷가지로 전신무장하고 떳떳이 자랑스럽게 서성구 제1중심소학교 운동장 ‘6.1’ 국제아동절 축제장 연단에 올라 수많은 학부모들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3,000여명을 헤아리는 소선대 대원들의 행진을 지휘하였고 또 무대에 올라 ‘바다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교과서)는 시를 랑송하여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형님은 아버지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아주 명필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오기만 하면 저한테 습자 (习字 붓글씨 과목)도 가르쳤는데 가르치는 대로 붓대를 놀리지 못하니 화가 나서 상까지 뒤집어놓아 벼루돌은 온돌에서 나뒹굴고 먹물이 온 방바닥을 시꺼멓게 먹칠하기도 했습니다. 형님은 저에 대해 이 같이 엄하기도 하였고 성질은 또 불 같았습니다.
제가 연변제2고중(현 연변1중)에서 추천을 받아 중앙민족학원에 다닐 때입니다. 당시 형님과 형수의 월급을 다 합쳐도 아버지, 어머니, 녀동생 두 자매, 저까지 여섯 식솔을 거느린 상황에서 매우 어렵게 지내는 형편이였으나 매달 월급이 나오는 날 첫 일과가 저한테 돈 10원을 부치는 일이였다고 합니다. 책을 사보라고 말입니다.
형수님은 또 제가 방송국을 다닐 때 출장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번마다 시동생이 육붙이를 좋아한다고 기분 좋게 출장을 다녀오라며 돼지고기국을 해주군 하였습니다. 본인은 무슨 고기든 입에 붙이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 같은 사연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면서 저는 형님, 형수님께 드리는 편지, ‘주소 없는 편지’를 쓰게 되였습니다. 서한체로 가사를 써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1.
형님의 성질은 불같이 화끈하고
형수의 맘씨는 물같이 부드러워
일편단심 성스런 이 믿음 하나로
맞춰가며 살아가는 천생배필이였습니다
형수의 가슴은 바다같이 넓었고
형님의 욕심은 하늘처럼 높았습니다
2.
형수는 가문의 자랑이 되라고
형님은 민족의 기둥감 되라고
나어린 동생을 다 큰 시동생을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보살폈습니다
그 시절의 형님 형수 그립습니다
이제 꿈에라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이 가사에서 “맞춰가며 살아가는 천생배필” 이 구절은 조카가 자기의 남편(김철수 연변대학 교수)을 두고 어머니 앞에서 하소연을 하니 어머니는 “얘야, 내가 그 호랑이 같은 아버지도 맞춰가며 말없이 살았을라니 네가 철수 같은 사람을 못 맞추겠냐?! 참는 것이 약이네라.”라고 했다는 충고에서 따온 것입니다.
기실 저도 형님이 화를 낼 때면 형수님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형님이 거듭 화를 내면 어쩌다가 한번쯤은 왈칵 대꾸질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때면 형님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쥐죽은듯 조용히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문의 자랑’이란 이 구절은 저의 노래 〈한 삼백년 살아볼가 한 오백년 살아볼가〉가 매주일가로 나가는 것을 보고 듣고 난 형님께서 이 동생을 보고 “우리 가문의 자랑”이라고 하시던 말씀에서 빌려다 쓴 것입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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