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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같은, 저녁 같은… 이재무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9월20일 06시10분    조회: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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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를 출간한 이재무 시인./사진=헬스조선DB
서해의 온 바다가 한꺼번에 저물면서 빛날 때 저녁은 대낮보다 아름답다. 술 없이도 불콰한 그런 저녁에 무슨 심통 나는 일을 겪으셨나. 시집들 사이로 귀하게 내는 산문집에 ‘괜히 열심히 살았다’란 제목을 붙였다. 이재무 시인의 가을 같은, 저녁 같은 산문이다.

알록달록 홀가분한 책을 받고서 심통의 연원이 궁금해 표제 산문부터 찾아 펼쳤다. 네 쪽에 걸친 산행기다. 정상에 집착하신 적이 있던가. 정상에의 강박 때문에 한때 고행과 다름없는 산행을 했다,는 고백이 앞선다. 그 세월이 얼마였는지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언젠가부터 시야에서 정상을 지웠고 걸음은 가벼워졌다. 이후 ‘선율처럼 굽이치는 등고선을 밟아’ 가는 산행이 시작되는데, 시인의 눈에 펼쳐진 풍광과 절경이 두어 쪽에 걸쳐 눈부시다.

계절로 치면 봄에서 여름까지, 젊은 시절의 한가(閑暇)와 완상(玩賞)을 놓친 게 아쉬웠을 수 있겠단 생각은 해본다.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한 마디에 담긴 회한의 깊이를 타인이 잴 수 없으니 잠시 요량만 할 뿐이지만…. 그리 짐작할 일이 아니라, 흐릿한 주점에서 얼마간이라도 집요하게 청문할 일일라나.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를 숙이고
표제를 잊고 목차를 훑다가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 숙인다’는 제목이 숭고해 다시 책을 펼쳤다. ‘밥이 하늘’이라는 동학 교주 최시형(또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파격 선언을 공유하며 시작하는 글을 찬찬히 읽고 있자니 시인의 말마따나 밥 앞에 송구하다. 나의 밥과 남의 밥이 모두 하늘인데, 어느 쪽에도 신심을 보이지 못했다. 내 밥엔 탐욕했고, 남의 밥엔 질투했다. 안팎으로 불경했다. 시인의 관찰대로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늘 고개든 채로 좌고우면하며 흘기고 탓했다.

밥은 하늘이기 전에 생명이다. 생명이었다가 하늘이니 더하고 뺄 것 없이 그 자체로 우리 삶이다. 그러나 그런 암시를 파악하고 안심하는 순간, 시인은 밥상을 엎는다. 숟가락을 엎고, 밥그릇을 엎어 놓고는 둘 다 무덤 형상이라 귀띔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불이(不二)의 경구가, 깜깜한 새벽 절간의 차디찬 쇠문고리 촉감으로 마음에 예리한 충격을 안긴다.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시인의 촌철이 매서워 흠칫한다. 그 앞에서 숭고와 송구가, 삶과 죽음이, 밥과 무덤이, 번뇌와 열반이 한 끗 차이를 버리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시인의 문장 깊숙한 곳마다 연한 먹물처럼 그리움이 고였다. 정상이 사라진 산에서 낮은 풍경에 반한 뒤 밥상으로 내려와 무덤을 읽는 시인에겐 뜨거웠던 대낮의 지난 세월이 아득하다. ‘나는 저녁이 좋다’ 제하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지난 삶을 간결한 서정으로 추상하며, 따스했던 시골 부엌 같은 저녁의 품에 안기려 한다.

슬픔과 허기의 가을, 그리고 저녁이지만…
수천의 시(詩)를 풀어내고도 서글픈 게 인생일까. 밤샘의 방생처럼 40년에 걸쳐 시를 펼쳤으니 허기질 수 있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가을 저녁의 허기 끝,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시인의 푸념이 독자들에겐 신새벽의 한줄기 바람처럼 성찰의 잠언들이다. 적요한 에세이의 숲에서 너와 나의 지난 일들이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산문 속으로 녹아든 시의 언어들은 홀연한 사유로 거듭나, 저녁노을의 진경(眞境)을 보여준다.

어쩜 우리 모두는 괜히 열심히 살았으나 그 무의미한 최선과 탈진의 끝에서 가려운 듯, 뒤척이듯 조심스럽게만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빛바랬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붉은, 타오르는 중인 서해 바다의 낙조(落照)처럼. 천년의시작 펴냄, 260쪽.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사진=헬스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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