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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시리즈 24] 도전과 탐색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4일 15시46분    조회: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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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4] (김영금 편-4)

나는 언제나 남다른 새로운 그 무엇을 써내려는 생각으로 늘 휴식일을 리용하여 취재길에 오르 군 하였지요.

시간 앞에서 달리던 중국조선족소년보사 기자부 주임 시절

‘동무’라는 부름 하나에도 눈물 짓던 죄수들

1986년 6월경 나는 철창속에 갇힌 청년범죄자들을 취재하러 1개월 동안 휴식일을 리용하여 연길감옥으로 다녔어요.

감옥장은 워낙 연변일보사에 근무하던 안면있는 분이였어요. 그는 여태껏 기자가 죄수들을 찾아 감옥에 취재를 온 적이 없다고 하면서 무슨 요구가 있는가고 물었어요.

나는 20살부터 25세 사이의 부동한 류형의 범죄자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과연 10명의 청년죄수들이 경찰의 뒤를 따라 들어 왔어요. 경찰은 1번, 2번 하면서 그들의 번호를 불러 벽쪽에 나란히 줄지어 세우는 것이였어요.

나는 경찰에게 취재를 하는 동안 밖에 나가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하였지요. 경찰은 기자의 안전을 걱정하더군요. 절대 문제없을 것이니 시름놓고 자리를 피해달라고 했지요.

경찰이 나간 뒤 그들을 불러 앉혔어요. “동무들, 모두 여기에 와 앉으세요. 나에게도 동무네와 나이가 비슷한 아들이 있는데 동무들은 나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마음 터놓고 얘기해 주세요.”

내 앞에는 뿌연 옷, 중머리를 한 건달범, 상해범, 강간범, 살해범 청년들이 줄느런히 와 앉았어요. 그들은 여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동무’라는 소리를 듣는다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였어요.

학교시절 학생회 주석도 하고 공청단 서기로 활약하던 한 청년은 학교를 졸업하고 식품회사에 출근하면서 장백산지역의 호텔에 남새를 나르는 일을 하게 되였지요. 하루는 외국손님의 방 앞을 지나다가 책상 우에 독일제 고급사진기가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되였지요. 워낙 촬영에 남다른 애호를 갖고 있는 그는 사람도 없는 방안에 들어섰다 나섰다를 여러 번 거듭하다가 끝내는 유혹을 못 이겨 그 사진기를 들고 나왔지요.

돌아오는 길에 고민하다가 결국 파출소에 가 자수하고 카메라를 바쳤어요. 그러나 외국손님이 이미 공안에 신고를 한 뒤여서 그는 도형을 받고 감방에 갇히게 되였지요. 그는 이제 한달이 있으면 만기되여 출옥한다고 하였어요. 한 순간의 유혹을 못이겨 이렇게 범죄자로 되였던 것이였어요.

장모라는 한 청년은 14년 도형에 떨어진 죄수였어요. 그는 “사람 값에 못 갈 바에는 죽겠다” 고 몇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지요. 그는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속도선수처럼 씽-하니 달려가 스팀편에 머리를 들이박기도 했지요. 질그릇 깨지는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의 이마뼈가 환히 드러났고 머리에서는 선지피가 좔좔 흘러 내렸지요. 그는 피못 속에 쓰러졌지요.

 

1985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던 시각, 입당소개인들과 함께

그가 소속된 ‘특수중대’ 경찰지도원은 로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정종휘(길림성우수교양관리자)라는 분이였어요. “그래, 사람 값에 못 갈 바에는 죽는 것도 옳다. 죽겠으면 죽어라. 그런데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야 만나고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누굴 보고 싶은지 말해봐라.”

그는 둘째 누나가 보고 싶다고 했지요. 하여 정지도원은 장모의 서류를 훑으며 형제들의 주소를 낱낱이 찾아내여 사흘동안 12통의 편지를 써서 띄웠어요. 편지들은 련이어 되돌아 왔으나 나머지 한통의 편지가 마침 큰형의 손에 들어 갔지요.

10여 년간 종적이 없어 죽은 줄로 알았던 동생이 살아 감옥에 갇혀 있다니 형제들은 주먹을 쥐고 달려 왔지요. 혈육의 정은 감옥담장도 막지를 못하였어요. 정지도원의 설득으로 죽음을 선택한 동생을 구원하기 위해 형제들은 힘을 합쳐 달래기도 하고 욕도 하고 당부도 하고 돈도 쥐여주고 하면서 끝내 혈육의 정으로 장모의 마음을 돌려 세웠던 것이였어요.

정지도원은 이 사업을 하면서 피치 못할 매질이나 욕질을 한번도 한적이 없었지요. 그는 아무리 빙충맞은 죄인이라 하여도 인간으로 대해주고 죄인들의 성격심리를 깊이 연구하면서 알맞게 교양관리를 하였던 것이였어요.

그는 조사연구를 중히 여기면서 언제나 조용히 태연하게 사업하였지요. 그리하여 그 어떤 ‘특수죄수’들이든 종당엔 개조에 굴복하였던 것이였어요. 죄수들 마음속 한구석에 있을지 모를 한 쪼각 아니 반 쪼각의 선량한 마음이라도 파내여 키워주고 그 마음이 악한 마음을 이겨내도록 부추켜주면 그들은 정상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정지도원의 신조였던 것이지요.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나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세상에 착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지요. 감옥에서도 열심히 학습을 하고 기능을 련마하여 출옥한 뒤 성공한 사례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무들도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자유와 희망과 행복은 꼭 찾아올 것입니다! ” 나는 나의 진정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해 주었지요.

그들과의 ‘특수좌담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청년은 자기가 감방에서 눈물로 쓴 필기책 두권을 나한테 넘겨주는 것이였어요. 나의 집필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지요. 다른 쳥년들도 모두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경례를 하면서 나를 바래 주었지요.

후에 나는 이틀 낮과 밤을 지새면서 감옥에서 받아온 필기장을 읽다가 가슴 치는 한 구절을 발견하였어요.

"금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귀중하지 않아요"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카메라 때문에 금전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존엄과 명예와 자유를 잃은 교훈을 적은 글이였지요.

나는 내가 감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담장 밖의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리하여 〈돈과 사람〉, 〈철창속의 사람들〉, 〈감옥의 별〉 등 글을 집필하여 발표하였어요. 이런 글들은 또 료녕 《갈매기》잡지에 실렸고 〈감옥의 별〉과 같은 작품은 료녕출판총사 2등상을 수상하였지요. 그리고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실화집 《유혹의 세계》에도 올랐어요.

조선족문단의 첫 녀류작가 작품집을 내다

1985년 하반년, 료녕민족출판사에서는 조선족녀류작가 소설집을 출판하려고 연변으로 물색하러 왔어요. 그 시기는 출판사들에 경비는 있으나 원고가 모자랐던 것이였어요. 연변문단의 나젊은 녀류작가들은 금방 소설을 쓰기 시작하다 보니 행운은 나한테 차례졌어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통일 발급한 한복을 입고 늘 취재길에 올랐던 김영금 작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소설을 많이 발표하지 못한 상황이라 몇 편을 더 써서 20만자 되는 작품집을 준비하였어요. 그 원고를 한아름 안고 《연변문예》잡지사의 편집 한수동선생님을 찾아갔지요. 나의 처녀작 〈조약돌〉창작부터 친히 가르침을 주셨던 한수동 선생님은 쌀에 뉘만큼 희소한 녀성작가 양성에 심혈 을 기울려 주신 분이였어요.

그는 한달가량 원고를 자세히 읽고나서 미흡한 점을 지적해주셨고 또 원고를 출판에 교부할 때 〈생의 보람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라는 머리글까지 써주셨어요.

---소설집 《바다가에서 만난 녀인》은 인생, 인간, 인정에 대한 작가의 깊은 탐색과 작품의 공명력으로 돋보인다. 작가는 자기가 바라는 리념과 생활의 철리를 편마다 알맞춤히 박아넣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되새겨 보게 하고 소리 내여 읽어보게 한다…탐색령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는 최근 작품들은 날이 서고 박력이 있어 더욱 기대가 커진다…

조선족문단의 첫 녀류작가 작품집

1988년 5월에 나의 첫 소설집 《바다가에서 만난 녀인》이 출판되였어요. 이 소설집에는 내가 가담가담 과외로 창작한 중편소설 〈그날을 위하여〉와 단편소설 12편이 들어 있었어요. 소설 〈어머니〉와 〈아버지의 참회〉는 1986년 일본 《력사비판》잡지에 전재되기도 했어요.

소설집 《바다가에서 만난 녀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녀성작품집이라는 의미에서 여러 보도매체들에서 대서특필하여 보도하였지요. 그리고 이 작품집은 또 1989년도 동북3성우수도서 2등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어요.

이에 큰 힘을 얻은 나는 계속하여 중국조선족녀성고급지식인 실화문학집 《단풍시절》(흑룡강성조선민족출판사 1991년), 수필집 《푸른 바다 빨간 노을》(연변인민출판사 1993년)을 출판하여 역시 조선족문단의 첫 녀성 실화문학집과 수필집을 펴내게 되였던 것이였어요.

《단풍시절》을 맞은 녀성고급지식인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수 많은 곳을 다니면서 우리 민족이 겪게 될 위기감을 짜릿하게 느끼게 되였지요.

중국의 경제생활에서 과학기술은 날따라 기둥역할을 해가고 있었고 백성들의 생활과 사회 각 측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요. 지혜로운 민족의 생존바탕은 어디까지나 지식인 것이였어요. 우리 민족은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발붙일 곳을 잃고 말겠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였지요.

나는 우리 중국조선족 한세대 두세대 과학자들의 위훈을 발굴하여 후세대에 전해야 겠다는 사명감을 짊어지고 우선 녀성고급지식인들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였어요.

우리 조선족녀성들이 ‘현처량모’요 ‘춤 노래의 능수’로만 칭찬받는 일은 만족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였지요. 나는 고급지식인 녀성들을 찾아 멀고 가까운 곳을 많이도 다녔어요.

민족정기 고양에 혼심을 몰붓고 있는 대련조선족문화관 박태옥(왼쪽) 화가를 만나

연변대학 수학학부 주임 리증숙은 우리 나라 미분방정식 안전성리론연구의 대표자의 한사람이였어요. 그는 1952년에 북경대학에 입학한 ‘문화혁명’전의 교수였어요. 그가 쓴 ’다-빙 방정식의 주기해’란 론문은 우리 나라 국가간행물 ‘과학통보’한문판과 영문판에 실렸고 제1차 전국안정성리론학술회의에서 발표되였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우수 론문상을 받았지요.

특히‘례나드방정식령해의 전국안정성에 관하여’라는 론문을 비롯한 그의 론문은 국가급 긍정을 받았고 그는 “중국당대자연과학인물전기”에 수록되였어요.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허분적교수는 또 아주 ‘특수한 녀성’이였어요. 17세에 지하당에 가입하고 스무살 나는 해에 항미원조전선에 나가 중앙군사위원회 총참모부계통에서 사업하였지요. 그는 3등공을 세웠고 주덕 총사령원의 접견을 받기도 하였지요.

그는 전업한 후 연변대학 한어학부를 졸업하고 연변대학조선어문학부 교단에서 교편을 잡으셨어요. 교수를 하는 한편 1986년에 이르러 32만 8000자에 달하는 《현대한어속성실용문법》을 세상에 내놓게 되지요. 실용성과 과학성이 강하고 깊은 내용을 알기 쉽게 가르친 이 한어어음어법교과서는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출판된지 몇 달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요량이 많이 매진되였지요.

연변병원의 15명 녀부주임의사들을 취재하던 광경 역시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빨간 단풍이 한창인 때였어요. 연변병원 원장은 15명 녀고급의사들을 추천하면서 모두가 특점이 있고 개성이 있으며 각기 공헌이 크다고 하였어요.

80년대 말의 연변병원 부분적 녀고급의사들

안과 명의로 소문난 심옥진 의사를 찾아가니 공교롭게도 미국으로 연수를 가고 없었어요. 서운해도 연변병원 치고 처음 출국연수를 떠난 녀의사라는 사실에 여간만 기쁘지 않았어요.

그 길로 높고 널직한 방사선검사실에서 사업하는 박숙희 부주임 의사를 만났어요. 그는 1960년 연변의학원 졸업생이였고 방사과에 배치되여 온 첫번째 본과생이였어요. 알고 보니 방사선의 위해로 본과생들은 거의 방사선과로 지원해 오지 않는 것이였지요.

세 아이를 키우면서 사업을 잘하느라 기진맥진한데다 1년 동안 내몽골의료대로 나가 투시를 도맡아하다 보니 직업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겠다고 의료대에서 돌아오던 참으로 아이들을 남에게 맡기고 상해중산병원에 가 방사선연수를 했던 그녀였어요.

그리고 ‘세균 속에서 사는’ 전염병실의 신금희 부주임의사는 〈류행성출혈열소뇨기효과관찰〉이란 론문집필과정과 리질치료에 현저한 효과를 보고 있는 유장료법 연구에 대한 소개를 들려주었지요.

그러나 선진사업일군으로 황소처럼 일하던 호흡내과 최경숙 부주임 의사는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사망하여 얼굴조차 보지 못했지요. 기타 사정으로 만나야 할 분들을 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그번 취재를 마치게 되였지요.

50대를 넘어선 그녀들은 출국연수가 잦은 남성의사들의 빈자리를 막아 주면서 환자들을 알심들여 치료해주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남성들에게 뒤지지 않겠다고 밤마다 외국어를 자습하여 진급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고 자료를 수집하고 경험을 총화하면서 한편 또 한편의 론문을 써내고 있었지요. 그들이 국가급, 성급 잡지나 회의에서 발표한 가치있는 론문만 해도 60여편은 실히 되였어요.

그외에도 하나의 콩품종을 배육하자면 12년씩 걸리는 간고한 탐구의 길에서 ‘연농’ 계렬 콩품종 7종까지 연구개발하여 북방의 대면적에 보급한 연변농업과학연구소 김냥숙 부연구원, 마를줄 모르는 ‘옹달샘’처럼 끊없이 용솟음치는 열정과 패기로 대학생들을 꿈이 있고 덕이 있고 재능 있는 고급인재로 키운 연변대학 유기화학학부 리경숙 교수, 파란 많은 인생살이 속에서도 화가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조선족녀성의 기개를 펼친 대련조선족문화관 박태옥 화가, 대형무극 〈춘향전〉의 연출이며 국가 1급 안무가인 최옥주, 장백산의 귀중한 적백송 무성번식에 성공한 고급원림기사 반봉선, 길림성우수기업가 장춘중의중약공장 리숙자 공장장… ‘녀중호걸’ ‘절반하늘’을 떠올리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없이는 들을 수가 없었지요.

 

료녕금주무방추공장 부총공정기사 김기숙(왼쪽)을 인터뷰하며

여기에는 또 미묘한 취재일화도 있었어요. 료녕성금주무방추공장 부총공정사이며 고급기사인 김기숙은 워낙 나의 고중동창생이였어요. 인물이 출중하고 재능이 뛰여난 그는 남학생들의 총애인물이였지요.

그는 길림대학 화학학부 고분자 학과를 마치고 대련화학섬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업하였어요. 그는 1981년부터 우리 나라 복장업종의 점착덧심(흔히 말하는 심지천)의 락후한 상황을 개변시키고 세계선진수준급 덧심천을 연구개발하였어요.

공장의 소개에 따르면 생산에 정식 투입한 1987년 4월부터 반년사이에 1,420만원이라는 리윤을 올리고 405만원이라는 세금을 나라에 바쳤다고 했어요.그녀는 제7차 5개년 계획기간에 네가지 국가중점과학기술연구항목을 돌파하여 거액의 경제효과성을 올렸고 중화전국총공회와 국가계획윈원회로부터 전국합리화 건의 및 기술개진활동 적극분자칭호를 수여 받았어요.

우리 나라 폴리아미드풀열용덧심 연구성과에 조선족녀성의 이름을 써넣을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대견하고 기뻤어요.그런데 그녀에 대한 취재가 무르익어가던 중 한가지 ‘중대한 발견’을 하게 되지요. 그녀는 워낙 나의 남편의 풋내기‘첫사랑’이였던 것이였어요.

인간관계란 다잡을 수 없이 미묘하고 복잡하지요. 하지만 사랑에 대한 믿음과 존경, 리해와 같은 감정요소들이 있기에 녀자의 본성인 질투와 의심을 넘어 아름다운 공감과 용기로 〈바다의 진주-부총공정기사 김기숙의 이야기〉를 생동하게 써내게 되지요.

중국조선족녀성고급지식인들의 이야기를 쓴 실화집 《단풍시절》이 1991년경에 출판되였어요. 그뒤로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를 발족한 연변대학 유기화학교수 강귀길 교수는 나를 꼭 잡고 어떻게 하나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들을 세상에 널리 알려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해왔지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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