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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34] 명예도 고생도 모두 〈몽당치마〉 탓 (림원춘편-6)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월16일 08시47분    조회:2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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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34](림원춘편-6)

〈몽당치마〉가 
나가자마자(발표되자마자), 여러분들이 봤는지는 몰라도 그때는 센세이숀을 잃으켰지. 문단이 막 끓었어요. 그렇게 〈몽당치마〉를 쓰고, 작가협회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중국작가협회에서 〈몽당치마〉가 전국단편소설상을 받았으니 북경에 와서 시상식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왔어요.

1984년 3월이였어요. 1983년도의 우수상으로서 1984년도에 시상식을 하게 되였어요. 그런데,북경에 가긴 가야 하겠는데 입고 갈 옷이 있어야지.

2016년 7월 9일,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작가공원에 〈몽당치마〉문학비가 설립되였다.

나에게는 그때 잔치 때 입던 옷도 있었고 또 단위에서 해준 검은 색 세비로도 있었어요. (그걸 입으면 깔끔해서 대단히 멋있었는데 그걸 입고 전국무대에 나가면 림원춘이라는 이름은 기억하겠지만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 사람이 전국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복을 찾게 되였지요. 가무단에 가서 한복을 하나 좀 빌어입자고 했어요. 그때는 지어 입을 정황도 아니 되였고 또 한복양복점도 없었어요. 그래서 가무단에 가니까 무용복을 내놓는데 옷소매에 박힌 구슬이 반짝반짝해서 조선족이라는 것은 나타내지만 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전국무대에 나서기가 그랬어요. 그래서 안되겠다고 말했더니 예술학교에 가보라고 하더구만.

1983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 수상자 단체사진.

예술학교에 가보니 그곳의 남자 무용복도 다 마찬가지였어요. 개량종이였어요. 그런데 한쪽켠에 먼지를 푹 맞은 하늘색 나는 남자용 한복이 한벌 있었어요. 그걸 들고 물어보니 그것은 이전에 왕청문공단에서 논물관리원이 입었던 옷인데 예술학교에서 다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다시 만들었다고 하더구만. 그래서 살펴보니 하늘색 죠세프로 만든 저고리에 구슬이 달리지 않았더구만. 거기에 남색 비로도 조끼까지 딸려서 입어보니 근사하더군. 그런데 무용복이여서 그런지 아래바지 다리통은 마대같았어요. 대님을 매면 되겠지 하고 그걸 가져왔어요. 가져다가 빨고 다리미질을 하고 입어봐도 다리통은 마대짝 같더군. 그래도 이것을 가져가야겠다 생각하고 그 무용복을 가지고 북경에 갔어요.

1991년에 제작한 텔레비죤영화 〈몽당치마〉의 한 장면.

그때 어느 판점(호텔)에 들었던지는 모르겠으나 오후에 시상식을 하는데 점심시간에 옷을 꺼내 척 입고 대님을 매고 보니 그렇게 입고서는 나서기가 좀 그랬어요. 그래서 외투를 빌어다가 그우에 입으니 잘 보이지 않았어요. 번역을 했던 우소화가 번역상을 같이 받았는데 그를 보고 “이걸 봐라, 모양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일없습니다.” 하길래 그와 같이 시상식 장소로 갔어요.

정협회당에서 시상식을 하는데 민족출판사, 방송국의 책임편집, 기자들이 다 나왔어요. 내가 앞에 앉았다가 외투를 입고 시상대에 나갈 수 없어서 외투를 벗었었요. 조선족복장이 나오니까 그 현장에 있던 촬영사들이 몽땅 나한테 집중되였어요. 다른 분들은 다 일반 복장을 입었는데 사진에서 보다싶이 내혼자 민족복장을 입었지. 그렇게 사진세례를 받고 시상무대에 올라가는데 우소화와 같이 올라갔지요. 올라갈 때 손목을 잡고 올라가니 박수세례가 터졌어요. 왜냐하면 녀성이자 한족인 그의 손목을 잡고 올라갔으니까. 그렇게 시상대회는 잘 되고. 왕몽, 모순 등 유명한 작가들과 같이 좌담도 하고…돈 3백원을 상금으로 주더구만. 3백원으로 민족출판사와 중앙방송국 분들을 청해서 함께 먹으니 상금이 마이나스가 되였어요.

그리구 집에 돌아오니까 12.9평방메터되는 땅굴속에 형편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기자들이 와서 묻고 그래서 창작담을 이야기 하였어요. 조카의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하여 동불사 사돈이 봄이면 시내에 와서 옥수수쌀이 아니면 옥수수가루를 이고 가서는 애들을 먹이고 가을이면 그대신 하얀 입쌀을 가져다 주곤 하던 이야기를 했지요. 그 마을이 형수님이 살던 마을이였대요.

중국작가협회 당조 부서기이며 서기처 서기인 장건(가운데 사람)이 원로작가 림원춘과 담소.

그리고 작품에 동불사, 조양천 등 지명이 나오고 조양천댁, 동불사댁이 나오는데 연변병원 부산과 주임을 하던 형수님 오래비(지금 사망했어요.)가“제집안을 팔아먹구. 잘 돼서 잘 살겠다,”며 막 내 목춤을 쥐고 야단쳤죠. 형수님이 이렇게 말을 했어요.“어째서 소설에 조양천댁을 넣었는가요?” 원래 형수님네가 조양천에 살았댔는데 주변사람들로부터 조양천집으로 불리웠대요. 조양천댁을 부정인물로 쓰고 창작담에도 그렇게 설명했으니까 그 가문에서 죽일놈은 림원춘이지. 그분들이 나하고 한 십여년 등을 돌리고 살았어요. 길에서 만나서도 픽 하고 피했어요. 그렇게 십여년이 지나서 제가 말했어요. 제가 모르구 그랬으니 량해하라고.“알면 내 사둔집을 그렇게 쓰겠나구? 그리고 내가 사돈을 사돈이라구 부르던가? 형님처럼 생각하고 형님, 형님하고 불렀지.” 그렇게 화의하고 후날 편하게 지냈지만 이렇게 〈몽당치마〉는 옛말거리가 많았어요.

또 하나는 전국상을 받기 전 귀주 화계유람구에서 한달동안 진행된 전국 소수민족작가 50여명이 참가한 현지창작활동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때 제가 우소화가 번역한 〈몽당치마〉를 받쳤어요. 소수민족작가들이지만 대부분 한문으로 창작하니까. 거기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유명한 작가 마라친부가 소수민족작가들앞에서 나를 저명하다고 하면서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주었어요.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이 글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2018.5월 25일 훈춘)

그렇게 중앙에 작품을 올려보내고 나는 연길에 돌아와서 누워 앓는데 작곡가 안계린이 와서 “형님 <몽당치마>가 형님이 쓴거요?”하고 묻길래 “내 쓴게 맞다.” 이랬더니 안계린이 “아닌데…”하면서 지금 림원춘이〈몽당치마〉를 도적질했다고 문단이 떠들고 난리났다고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고 물었더니 어느 한분이, 나하고는 형님동생하는 사이로 시를 잘 쓰는 분인데 룡정에 갔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림원춘의 <몽당치마>는 도작이다. 수개를 해달라고 림원춘이한테 주었는데 림원춘이 자기 이름으로 연변문학에 내고 바쁘게 되니 원고료를 자기에게 주어서 오늘 그 돈으로 한턱 낸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룡정시 덕신향에서 장재로 넘어가기 전 마을의 사람인데 그분이 그렇게 하면서 술 한잔 사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나한테 말하지 않고 작가협회에 직접 일러바치니까 작가협회에서는 세번이나 조사조를 파견하여 조사하면서 석달간 저의 루명을 벗겨주지 않아 고생했어요. 그래서 초고를 가져다가 바치면서 이 것이 그사람의 필력인가 아닌가고 따졌어요.〈몽당치마〉의 초고를 그렇게 잃어버렸어요. 초고가 있으면 당안국에 보존하겠는데 말입니다.

최근년간에 출간된 림원춘소설가의 작품집들.

그래도 작가협회에서 해방을 시키지 않아 석달을 고생했어요. 글 한자도 못 썼어요. 작가에게 도작이란 생명을 끊는 것과 다름없어요. 붓을 내려놓아야 되지요.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내가 쓴건데 왜서 도작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런데 조사조가 그쪽에 가면 자기가 썼다던 그분은 자기가 쓴것이 옳다고 우긴다는 거지. 마지막에 그분과 나를 당신들앞에서 삼자대면을 시켜달라고 제기했는데 그것도 시키지 않고 이게 도작이요, 아니요 라는 결론도 없이 석달동안 질질 끌다가 미지근하게 없어졌어요.

한 사람의 문학인재를 배양하는데, 나는 그때 나이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싹수가 보이면 이끌어주고 길러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그게 좀 섭섭했어요.

결국 〈몽당치마〉때문에 영예도 얻었지만 고생도 하고 욕도 숱해 먹었어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태국 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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